나라 땅에 별짓을 다 하고... [박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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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땅에 별짓을 다 하고...

2019.08.21

충무로, 을지로, 퇴계로 등등 우리에게 익숙한 시내 주요 거리의 명칭은 광복 후 1946년 10월 1일 일제식 명칭을 개정할 때, 우리 명현(名賢) · 명장(名將)의 이름을 따서 붙이면서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는 충무로를 본정통(本町通)이라 불렀으며, 을지로는 황금정통(黃金町通), 퇴계로는 소화통(昭和通)이라 불렀습니다. 당시 누구의 아이디어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일본식 지명을 이렇게 멋지게 바꾼 것은 참 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충무로는 충무공 이순신의 탄생지가 그 길에서 가까운 옛 건천동(乾川洞), 지금의 명보극장 앞이라서 그렇게 이름을 지었다고 합니다. 필자는 어린 시절 이 거리들을 지날 때마다 이순신 장군과 을지문덕 장군, 퇴계 이황 선생에 대한 자랑스러운 마음과 존경심을 막연하게나마 느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자신의 재임 중에 자신의 이름을 딴 ‘승만로’를 서울 시내 어느 도로에 이름 붙였다면 어땠을까요? 또,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쿠데타의 성공을 기념하여 ‘정희로’를 서울 도로 어딘가에 붙였다면 과연 그 도로명이 지금까지 남아 있을까요? 더 나아가 6·25 남침으로 서울을 함락한 김일성이 전쟁 중 서울 세종로를 ‘일성로’로 바꿨다면 어땠을까요? 아마 ‘일성로’라는 표지판은 서울 수복과 함께 철거되었을 거고, ‘승만로’는 4·19 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 자신이 하야하면서 그 길의 이름도 다른 이름으로 바뀌었을 겁니다. ‘정희로’ 역시 역사의 부침에 따라 존폐 기로에 서다 광화문 현판 교체시기와 함께 사라졌을 겁니다.

과거부터 존재했던 동네 이름이나 도로 이름의 경우는 장구한 시간이 그 이름에 정통성을 부여하지만, 새롭게 작위적으로 붙이는 이름은 국민이 보편적으로 수긍해야 하며 시대가 바뀌어도 가치가 변하지 않아야 할 겁니다. 따라서 살아있는 사람의 동상을 세우는 것을 꺼리는 것처럼 도로나 공공장소의 명칭에 살아있는 사람의 이름을 가져다쓰지 않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사유지에 개인의 동상을 세우는 것이야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하지만 공공장소의 경우는 그 이름을 붙이거나 상징물을 세울 때에는 절차와 내용을 엄격히 따지고 가능한 한 보수적인 시각에서 결정을 내려야 할 것입니다. 논객으로 활동하는 전원책 변호사가 “살아있는 사람의 동상은 독재자나 세운다.”고 한 말은 한 번쯤 새겨볼 만합니다.

이렇게 공과(功過)가 나뉘는 정치인의 경우도 그를 기념하여 세우는 동상, 기념관, 도로 등등에 분란의 소지가 있는데 인기에 영합하여 연예인의 이름을 빌려, 도로나 공원의 이름을 짓는 지자체의 행위는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박유천 벚꽃길','로이킴 숲', '승리 숲'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최근에는 연예인을 상대로 CF 계약을 할 때도 ‘품위유지’ 조항이 있어서 광고 모델이 음주운전이나 마약 또는 성추행 등 품위를 손상했을 경우 제품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에 대해 손해배상을 할 것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의 지자체의 행태를 보면 인기 연예인과 관련된 거의 모든 정책은 덮어놓고 다 밀어부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이런 부작용이 생긴 겁니다.

예전에 서태지와 아이들이 은퇴를 한다고 온 매스컴에서 호들갑을 떤 적이 있습니다. 당시 그 모습을 보며 최불암 씨가 “그게 은퇴야? 조퇴지.”라고 일갈했던 일이 기억납니다. 이십 대의 아이돌들이 고작 몇년 만에 활동을 중단하는 것을 두고 은퇴라는 용어를 쓴 경박한 세태에 대한 일침이었습니다. 최불암 씨는 연기자로서 평생 한길을 걸어 온 분이십니다. 또한 수십 년 동안 사회활동을 묵묵히 해 온 훌륭한 어른입니다. 필자가 대학에 다닐 때, 청소년의 일탈과 관련한 교수님의 연구를 도운 적이 있는데 그 연구의 후원을 최불암 씨가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최근에도 사회의 어두운 곳을 비추는 훌륭한 활동을 많이 하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만약에 연예인의 이름을 빌려 공공장소의 이름을 짓는다면 최불암 씨야말로 적합한 분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결정 역시 급하게 내릴 필요가 없이 그분께서 정말로 은퇴를 한 이후에 ‘불암로’나 ‘불암 숲’을 만드는 것이 맞을 겁니다.

지자체 장이 다음 선거만 의식하니 기사 한 줄이라도 나올 만한 이벤트, 주민 동원이 쉬운 이벤트에 집중하게 되고 그러다보니 공공장소에 젊은 연예인의 이름을 빌려 쓰는 무리수를 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은 완벽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람에 대한 평가는 사후에 내려집니다. 왜냐하면 어떤 삶을 살게 될지 남은 인생을 어느 누구도 예단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80년대에 이른바 ‘땡전 뉴스’의 주인공이었던 전두환 전 대통령만 봐도 그렇습니다. 당시 뉴스는 “전두환 대통령 각하께서는…” 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광주지법에 출석할 때의 호칭은 “전두환 씨”였고 실제로 기사도 “전두환 씨”로 쓰였습니다. 실형을 선고받았었기 때문에 전직 대통령의 예우를 공식적으로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산천을 호령하던 그 막강한 권력도 시대가 변하면서 이렇게 초라해졌습니다. 연예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늘을 찌르던 인기가 뜬구름처럼 언제 사라질지 모릅니다. 게다가 마약, 성폭행, 성추행, 도박, 음주운전 등등으로 물의를 빚게 되는 경우도 너무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서 언급한 '박유천 벚꽃길', '로이킴 숲', '승리 숲'은 생각 없이 행정력을 남발한 대표적인 예로 기록될 것입니다.

“나라 땅에 별별 지랄을 다해놨네.”

위에 언급한 장소들에서 물의를 일으킨 연예인의 흔적을 지운다는 기사에서 가장 많은 공감을 얻은 댓글입니다. 생각 좀 하고 일을 하면 좋겠습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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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박상도

SBS 선임 아나운서. 보성고ㆍ 연세대 사회학과 졸. 미 샌프란시스코주립대 언론정보학과 대학원 졸. 
현재 SBS 12뉴스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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