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한다면 옷을 벗겨라! [신아연]

사랑한다면 옷을 벗겨라! [신아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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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다면 옷을 벗겨라!

2018.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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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dog is the only thing on earth that loves you more than he loves himself. 개는 지구상에서 자기 자신보다 더 당신을 사랑하는 유일한 존재 ” “All you need is love...and a dog. 당신의 필요는 오직 사랑, 그리고 애완견”

두 달 전, 호주 타즈마니아 주도 호바트를 여행하면서 도심의 한 동물병원에서 본 개에 관한 두 가지 ‘명언’이다. 그럼 이런 생각은 어떤가. 정신과 전문의 M. 스캇 펙(1936~2005)의 대표 저서 『아직도 가야할 길 The Road Less Traveled』(열음사 간행)을 인용해 보자.

“'사랑'이라는 말을 너무 일상적으로 사용한 나머지 그 특별한 의미를 잃어버려 사랑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어렵게 하고 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나 애착을 갖고 있는 것들의 질적인 차이를 무시하고 모두 '사랑'이라는 말 한마디로 남용하게 된다면, 현명함과 우둔함, 선과 악, 귀한 것과 천한 것의 차이를 구분하는 것이 어려울 것이다. 엄밀히 말해 우리는 인간만을 '사랑'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만이 근본적 성장을 할 수 있는 정신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애완동물에 대해 생각해 보자. 우리는 집안의 개를 ‘사랑’한다. 우리는 개를 먹이고 목욕시키고 만져주고 안아 주며 훈련시키고 또 개와 같이 놀기도 한다. 개가 아프면 우리는 하던 일을 다 그만두고 부리나케 수의사에게로 달려간다. 개가 도망가거나 죽으면 우리는 슬픔에 젖는다. 아이들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애완동물이 그들의 유일한 존재 이유가 되기도 한다. 이런 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그러면 여기서 애완동물과 인간관계의 차이를 고찰해 보자.

첫째로 우리가 애완동물과 뜻을 통하는 정도는 인간들과 통할 수 있는 것보다 지극히 제한되어 있다. 우리는 애완동물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 길이 없다. 이러한 이해의 결핍이 애완동물에게 우리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투입하면서 전혀 현실과 상통하지 않을지도 모르는 감정적인 친근감을 느낀다.

둘째로 우리는 애완동물의 의지가 우리의 뜻과 합치될 때에 한해서만 만족을 느낀다. 이러한 기준을 가지고 애완동물을 선택하며 만약 그들의 의지가 우리 자신의 뜻과 달라지기 시작할 때에는 그들을 제거해 버린다. 애완동물이 반항하거나 대들면 우리는 이들을 오랫동안 돌보지 않고 내버릴 수도 있다. 우리가 애완동물들의 마음이나 정신의 발달을 위해서 보내는 유일한 학교는 ‘복종학교’이다.

그러나 사람에 대해서는 어떠한가. 우리는 그가 ‘자신의 의지’를 발전시킬 것을 소망한다. 참으로 다른 사람이 자기와 다르기를 바라는 것은 순수한 사랑의 특성 중 하나다.

끝으로 우리는 애완동물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의존성을 기른다. 우리는 그들이 자라나서 집을 떠나기를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들이 언제까지나 자기 자리에서 떠나지 말고 난롯가에 믿음직하게 누워 있기를 바란다. 우리가 애완동물을 귀중하게 여기는 것은, 그들이 우리에게서 독립된 개체가 아니라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애완동물을 '사랑'하는 이유는, 그들이 단지 애완동물만을 '사랑'할 줄 알고 다른 인간을 순수하게 사랑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스캇 펙은 애완동물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잘못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주를 달았다. 즉, 모든 사물들, 동물이나 무생물도 ‘정신’을 소유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이 책에서는 자신이 생각하는 사랑의 특정 단계를 논하고 싶었다는 전제를 밝혔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한마디로 ‘스캇 펙은 짖어라’는 식이다. 개들은 이제 애완견의 위치로도 부족해서 '반려견’의 지위에까지 올랐다. 집안의 '반려자'를 밀어내고 당당히 그 자리를 차지하는가 하면 아예 처음부터 '연애나 결혼 대신 반려견’을 택하는 현상도 더 이상 기이하지 않다. 요즘은 고양이까지 가세해서 반려묘의 증가세가 반려견의 그것을 바싹 추격하고 있다. 인간은 관계맺음 속에서 살아가는 '관계의 동물'이기에 같은 포유류끼리 몸을 비비고 마음을 나누고 싶은 욕구를 포기하지 못한다. 그 결과 이런 기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친밀감과 애정을 나눌 대상으로서 개나 고양이는 때로는 사람 이상일 수 있다. 특히 개는 사람과의 교감을 통해 높은 차원의 행동을 한다. 자신을 희생하여 주인의 목숨을 살린 이야기는 새로울 것도 없고, 주인이 죽은 줄도 모르고 매일 같은 시간, 9년을 기차역에서 기다렸던 일본의 충견 하치는 전설적 존재가 되었다. 어쩌면 그 또한 자발적 의지가 아닌 반복 훈련된 복종 행위일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누가 뭐라든 나는 개를 사랑한다’고 끝내 주장하고 싶다면, 제발 개를 개답게, 본성에 맞게 키우시라!

사랑이란 존중에서 출발한다. 존중이란 존재를 그 자체로, 본성대로 인정하는 것이다. 개란 존재는 옷을 입도록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다. 개를 개답게 키우는 것은 사랑이고, 그 반대는 학대다. 한여름에도 옷을 껴입히고 신발을 신기고 털을 염색하고 땋아 내려 기괴한 사람 형상을 만들어 놓고 깔깔대는 것은 나의 악취미는 될지언정 결단코 사랑은 아니다. 그도 모자라 이제는 고양이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전에도 나는 "애완견의 나체를 허하라"는 글을 통해 말했다. 사랑한다면 개 고양이의 옷을 벗겨라. 옷부터 벗겨라. 그 전엔 보신탕 애호가를 욕하거나 말리지 마라. 

치렁치렁한 드레스와 네 발을 옥죄는 '거지 발싸개'로 인해 엉거주춤한 자세로 슬프고 무기력한 눈동자를 굴리는 개들을 볼 때마다 나는 주인에게 분노한다. 등에 맨 '유치원 가방' 무게로  어기적대다 쓰러지는 강아지를 봤을 땐 주인을 응징하고 싶었다. 하나의 생명체로서 또 다른 생명체를 노리개 삼고 조롱하고 구속하고 고문하고 학대할 권리는 없기에.

만약 내가 개라면  이렇게 '개만도 못한' 대접을 받으며 목숨을 부지하느니 차라리 '개죽음'을 택해 한 그릇의 보신탕이 되리! 복날이 가까워 오는 요즘이 실행에 옮길 절호의 기회이리!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이 칼럼을 필자와 자유칼럼그룹의 동의 없이 상업적 매체에 전재하거나, 영리적 목적으로 이용할 수 없습니다.

필자소개

신아연

이대 철학과를 나와 호주동아일보와 호주한국일보 기자를 지내고, 현재는 자유칼럼그룹과 자생한방병원 등에 기고하며 소설을 쓰고 있다. 저서로는 생명소설『강치의 바다』 장편소설 『사임당의 비밀편지』를 비롯, 『내 안에 개있다』 『글 쓰는 여자, 밥 짓는 여자』 『아버지는 판사, 아들은 주방보조』 『심심한 천국 재밌는 지옥』 『마르지 않는 붓(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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