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휴일(Roman Holiday, 1953)’ 속 스페인 계단엔 소통의 건축 DNA 담겼다
‘로마의 휴일(Roman Holiday, 1953)’ 속 스페인 계단엔 소통의 건축 DNA 담겼다
경제 수준, 세대별로 도시 공간 단절
공짜 쉼터 줄고 1인 좌석 둔 숍 늘어
스페인 계단 같은 ‘거대 벤치’ 갈증
문·창문·계단만 바꿔도 화목해져
광장 향해 창문 연 유럽의 카페처럼
아파트 거실쪽 창문 내면 소통 활발
유전공학적으로 우리의 유전자(DNA)는 4개 염기(AGTC, 아데닌·구아닌·티민·시토신)로만 구성되어 있다. 셀 수 없이 다양한 많은 종류의 생명체가 있지만 이 네 가지 염기가 다른 순서의 조합을 가지면서 새로운 종의 생명체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전혀 달라 보이는 인간과 초파리도 유전자의 60%가 일치한다고 한다. 건축도 마찬가지다. 수천 년의 건축역사를 살펴보면 너무나도 다른 건축물들과 도시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내부를 면면히 들여다보면 건축에는 6가지의 요소밖에 없다. 벽·문·창문·계단·지붕·바닥면. 이 여섯 가지가 건축 DNA의 염기다. 이 여섯 가지의 요소들이 건물마다 각기 다른 크기와 상호적 위치관계에 따라서 다른 건축물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6가지 요소 중에서 벽·지붕·바닥면은 공간의 관계를 나누는 기능을 한다면 문·창문·계단은 관계를 연결하는 요소다.
이탈리아 로마를 찾은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스페인 계단. 여기에 앉아 아름다운 분수와 로마 명품숍을
내려다 보며 쉴 수 있다. 이처럼 건축에서 계단은 분리된 공간을 연결해주는 역할을 한다. [사진 독자 이지아씨]
21세기 대부분의 사회는 자본주의에 근거를 두고 있다. 개인의 사유재산을 중요하게 생각하다보니 모든 공간들이 사유화되어 있다. 현재 사유화되지 않은 공간은 도로와 공원뿐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공원은 멀리 있어서 가기가 어렵다. 멀리 있는 공원을 가도 대부분 산으로 되어 있는 경사지다. 경사지여서 앉아 있기가 힘들다. 거리에는 벤치도 없다. 도시에서 야외공간에 앉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은 주차장을 불법으로 점유해서 만든 카페의 데크 공간뿐이다. 우리는 집 밖으로 나오는 순간 앉아있지 못하고 계속해서 움직여야 한다. 어디에 앉으려면 돈을 내야 한다.
그래서 우리 도시에는 카페들이 많다. 각종 노래방, PC방, 찜질방 같은 ‘방’으로 끝나는 시설들이 많은 이유는 공적인 공간에 공짜로 앉을 자리가 없어서다. 문제는 돈을 내야만 앉을 수 있기 때문에 경제적인 여유에 따라서 사람들이 가는 장소가 나누어진다는 점이다. 카페를 가도 5000원짜리 스타벅스에 가는 사람과 3000원짜리 동네 커피숍에 가는 사람으로 나누어진다. 우리의 도시공간은 세대별로 나누어지고 경제적 수준에 따라서 나누어진다. 다른 세대와 다른 경제적 계층의 사람이 만날 수 있는 ‘공짜 공간’이 없기 때문에 사회는 더 분열돼 있다. 카페에 가도 일인용 좌석이 점점 더 많아진다. 지금 필자가 글을 쓰고 있는 카페에도 랩톱을 올려놓고 쓰는 혼자 앉는 스툴 자리가 전체 좌석의 절반 가까이다. 자본주의와 개인주의의 세상에서 더 화목하게 살 수 있는 공간을 만들 방법은 없을까. 6개의 건축요소 중 연결의 요소인 문·창문·계단을 잘 이용하면 된다.
둥굴게 앉은 원시사회의 모닥불, 좀 더 인간적
소통하는 도시가 되려면 문의 배치가 중요하다. 사람이 모이고 소통하는 대표적인 공간은 광장이다. 유럽의 광장을 보면 광장주변으로 카페와 레스토랑이 배치되어있다. 그 가게들은 공통적으로 문과 창문이 중앙광장을 향해서 나있다. 광장이 소통과 통합의 기능을 하는 것은 창문과 문들이 중심을 향해서 열려있고 마주보고 있는 구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같은 원리는 일반 주택에서도 적용이 된다.
선사시대 때 동굴집이나 움집을 보면 사람들이 모닥불 주변에 모여 있다. 불은 가까이 가면 뜨겁고 멀리 가면 어둡고 춥다. 그러다보니 불에서 같은 거리를 띄우고 앉게 된다. 그렇게 불과 같은 거리를 두고 앉다보면 자연스럽게 둥그렇게 앉게 된다. 원은 한 점에서 같은 거리의 점들을 연결한 도형이다. 모닥불 주변의 자리배치는 원형이 될 수밖에 없다. 원시사회의 모닥불은 공간적으로 자연스럽게 평등한 사회를 만든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불에 밝게 비추인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이야기할 수 있다. 당시의 모닥불은 현대에 와서 가스불, TV, 보일러 불, 전등으로 나누어졌다. 지금도 거실에 가면 모닥불의 진화된 형태인 TV가 있다.
문제는 TV는 둥그렇게 앉아서 볼 수가 없다는 점이다. 거실에서는 서로의 얼굴을 보기보다는 TV가 있는 벽을 바라보게 된다. 예전에는 둥그런 밥상에 모여서 밥을 먹었다가 1980년대 들어서는 옆에 앉은 사람얼굴을 보기 힘든 직사각형 테이블에서 먹게 되었다. 2000년대 들어서는 식구들이 식탁에 모여서도 휴대전화를 쳐다보느라 건너편 사람의 얼굴을 보기 힘들다. 각자의 손바닥을 쳐다보는 휴대전화 시대에 가족 간의 소통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장소에 대한 정의도 예전에는 내 몸이 있는 곳이었다면, 지금은 내 손가락이 있는 곳으로 바뀌었다. 몸은 거실에 가족과 함께 있지만 실제로는 친구와 휴대전화로 채팅하거나 페이스북 가상공간에 있다. 이런 시대에 가족 간의 소통을 좋게 만드는 건축공간은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과거의 한옥 마당에 지붕이 덮여서 지금 아파트의 거실이 됐다. 얼핏 보면 비슷하나 크게 바뀐 것이 있다. 다름 아닌 창문의 위치다. 과거의 한옥에서는 방에 앉아서 창문을 열면 마당 너머 사랑방에 앉은 사람이 보였다. 각 방의 창문이 가운데 마당을 향해서 나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아파트의 창문들은 모두 밖을 향해서 나있고, 중앙의 거실을 향해서는 벽만 서있다. 창문이 없는 벽은 소통을 막는다. 만약에 지금의 아파트에서도 각각의 방에서 거실 쪽으로 창문을 낸다면 한옥에서처럼 가족끼리 좀 더 소통이 되는 공간이 만들어질 것이다. 거실로 난 창문은 사적인 공간인 각자의 방에 있으면서도 동시에 다른 가족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공간구조를 만들어준다. 광장을 향해서 난 문과 창문이 소통과 화합의 광장을 완성하듯이 집에서도 창문과 문의 방향을 잘 조절하면 소통의 집을 만들 수 있다. 같은 문과 창문이라도 주변의 건축 요소들과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느냐에 따라서 다른 종의 공간을 만든다.
계단 있는 동네에 보행친화적 골목길 많아
이번에는 연결과 소통의 건축 요소 중 세 번째로 계단에 대해서 살펴보자. 계단은 건축에서 다른 층으로 갈 때 사용하는 요소다. 현대에서는 다른 층으로 이동을 할 때 엘리베이터를 많이 이용해서 지금은 계단이 잘 활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버튼을 누르고 기다려야 하는 엘리베이터와는 다르게 계단은 언제든지 이동할 수 있다. 계단은 다른 층으로 단절된 공간을 연결해주는 건축에서 중요한 연결 요소이다. 그런데 현대건물에서 계단은 예전처럼 멋진 공간이 아니다. 소방법 때문에 대부분의 계단은 어두운 계단실 방화벽 뒤에 감추어져 있어서다. 만약에 계단이 자연채광과 통풍이 잘된다면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될 것이다. 이러한 좋은 사례는 건물 안보다는 도시의 외부공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1953년 개봉한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오드리 헵번(왼쪽)이 그레고리 펙과 데이트를 즐기고 있다. [중앙포토]
도시 속에서 계단은 다른 높이의 지형을 연결해주는 요소다. 이때 단순히 다른 높이를 연결시켜주는 기능 이외에 사람이 앉아서 쉴 수 있는 거대한 벤치의 기능을 하기도 한다. 대표적인 사례는 로마의 스페인 계단이다. 여름철에 로마에 가보신 분들은 한번쯤은 이 계단에 앉아서 쉬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 정도로 관광명소다.
이곳은 영화 ‘로마의 휴일’(1953)에서 오드리 헵번이 아이스크림콘을 먹은 장소로도 유명하다. 로마는 구릉 지형에 위치하고 있어서 주변에 언덕이 많다. 그렇다보니 도시가 형성된 이후에도 지역 간에 높이 차가 많고 따라서 계단이 많다. 스페인 계단은 그러한 계단 중에서도 가장 폭이 넓고 아름답게 디자인 된 계단이다. 이 계단은 높은 곳에 위치한 ‘트리니타 데이 몬티 성당’과 베르니니가 만든 ‘바르카시아 분수’를 연결하는 계단이다. 여기에 앉아있으면 아름다운 분수와 함께 로마의 명품숍들이 즐비한 거리를 내려다 볼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공짜로 앉을 수 있는 이 계단에서 휴식을 취한다.
서울에서 이 정도로 잘 활용되는 계단은 서울역 플랫폼에서 2층과 3층을 연결하는 계단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사람들은 이 계단에 앉아서 뻥 뚫린 기찻길을 바라보면서 식사를 하기도 하고 친구를 기다리기도 한다. 이처럼 도시에서 앞이 뚫려서 내려다볼 수 있는 곳에 위치한 넓은 계단은 사람들이 휴식장소로 사용한다. 특히나 현대도시처럼 자동차 중심의 도시에서는 계단은 자동차의 접근을 막는 파수꾼의 역할도 한다. 계단이 있는 지역은 통과 차량이 없어서 자연스럽게 보행친화적인 골목길이 된다. 서울의 경리단길 뒤쪽이나 삼청동이 대표적이다. 여러분이 지금 원룸을 구하는 중인가. 필자라면 주변에 계단이 있는 곳의 방을 알아보겠다. 그런 곳의 골목은 원룸 주민들이 자신의 방처럼 쓸 수 있는 조용한 공간이 될 테니 말이다.
유현준 홍익대 건축학과 교수
하버드·MIT에서 건축 공부를 했다. 세계적인 건축가 리처드 마이어 사무소에서 실무를 익혔다. 젊은 건축가상 등을 수상했고 『현대건축의 흐름』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 등 저술활동도 활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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