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불감증 사회, ‘중복설계’가 답이다
안전불감증 사회, ‘중복설계’가 답이다
감동근 삼성뉴스룸
새해 벽두부터 대형사고가 잇따르고 있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4년 가까이 지났지만 안전불감증은 여전히 사회 곳곳에 만연해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 ‘대충’과 ‘제대로’의 차이
연구년을 맞아 얼마 전부터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립대학교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집 앞 철길 건널목 너머 초등학교가 있어 하루에도 몇 번씩 이곳을 지나는 스쿨버스를 목격한다. 어느 날 ‘모든 스쿨버스가 건널목 앞에 멈춰 서서 꼭 한 번씩 출입문을 연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건널목을 건너다 시동이 꺼졌을 때를 대비해 출입문을 미리 열어두는 걸까?’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건널목 앞에서 문을 열었던 버스는 출발하며 다시 문을 닫았다. ‘문이 잘 열리는지 시험해본 건지도 모르겠다’ 싶어 스쿨버스 운행 매뉴얼<아래 도표 참조>을 찾아봤다. 답은 거기에 있었다.
미국 스쿨버스 철길 운행 매뉴얼 / 스쿨버스가 철길을 건너는 올바른 방법 / 건널목 100m 앞에서 비상등을 켜고 교통 흐름을 살피면서 진입한다 / 철길로부터 최소 5m, 최대 15m 떨어진 곳에 일단 정차한다 / 건널목을 한 번에 건널 수 있도록 기어를 변경한다 / 창문과 출입문을 열고 열차가 진입하는지 살핀다. 이 때 소리를 듣는데 방해가 되는 장치는 모두 끈다 / 안전하다고 판단되면 출입문을 닫고 주위를 살피며 진입한다 / 건널목을 통과하면 비상등을 끄고 창문을 닫는다
아하! 스쿨버스 운전자가 버스 출입문을 여는 건 “열차 소릴 잘 듣기 위해서”였다. 매뉴얼엔 ‘건널목을 건너는 도중 시동이 꺼졌을 때’의 대응책도 있었다. ‘열차가 접근하지 않을 때엔 두 번까지 재시동을 걸어보고 실패하면 탈출한다. 열차가 접근 중이라면 즉시 앞문과 뒤쪽 비상구를 이용해 탈출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렇게 상세한 매뉴얼이 존재한단 사실도 신기했지만 그 꼼꼼함에 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처음부터 미국 스쿨버스 운전자들에게 상세한 매뉴얼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1938년 눈보라 속에서 스쿨버스가 열차와 부딪히는 사고를 당하며 25명의 아이들이 목숨을 잃은 후 새 매뉴얼을 만든것. 매뉴얼은 현재까지 잘 지켜지고 있고, 스쿨버스 사고 사망자 역시 현저히 줄어들었다.
그렇지만 이들 역시 처음부터 이렇게 꼼꼼한 매뉴얼을 만들어 지켜온 건 아니었다. 1938년 12월 1일 유타주(州) 소재 시더시티에 기록적 눈보라가 몰아쳤다. 그날 스쿨버스 운전기사 페롤드 실콕스(Farrold Silcox)씨는 평소와 다름없이 운전대를 잡고 철길 건널목을 지나려 했다. 그는 규정대로 건널목 앞에서 정차한 후 주위를 살폈지만 눈보라 탓에 시야가 흐려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지난 3년간 늘 같은 시간에 그 건널목을 통과했던 실콕스씨는 별 의심 없이 버스를 출발시켰다. 하지만 바로 그때 그가 몰던 스쿨버스는 시속 100㎞로 진입하던 화물 열차와 충돌하고 말았다. 열차와 충돌한 버스는 800m를 끌려갔고 25명의 아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건널목 직전 차량 출입문을 여는’ 규정은 이 사고를 계기로 마련됐다. 악천후로 시야가 제한된 상황에서도 기차 소리는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있는 스쿨버스는 안전이 중요하다
사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로 치면 미국인들도 우리와 다르지 않다. 하지만 이들은 일단 고치기 시작하면 제대로 고친다. 그리고 수십 년간 고친 내용을 고지식하게 지킨다. 실제로 시더시티 사고 이후에도 미국에선 왕왕 스쿨버스와 기차 간 충돌 사고가 발생했다. 하지만 당시와 같은 실수는 80년간 한 번도 반복되지 않았다. 사고가 발생하면 진상을 철저히 규명하고 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한 후 현장에 반영했다. 그 결과, 2018년 2월 현재 미국 전역에서 2600만 명의 아이들이 연간 64억㎞를 스쿨버스로 이동하지만 같은 기간 사고로 숨지는 아이는 8명 정도다. 물론 8명도 결코 적은 숫자는 아니지만 미국 고속도로에서 연간 4만2000명이 사고로 생을 마감하는 것에 비하면 극히 적은 비율이다. 참고로 스쿨버스 통학 학생 수가 미국보다 훨씬 적은 우리나라는 2015년과 2016년 각각 8명의 아이들이 스쿨버스 교통사고로 안타까운 목숨을 잃었다.
최대 중량 700㎏ 승강기가 진짜 견디는 무게는?
중복설계란 장치 하나의 고장이 설비 전체의 고장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같은 장치를 중복해서 설치하는 것이다
공학에서 시스템의 안정성(reliability)을 다룰 때 중요한 개념이 ‘마진(margin)’과 ‘중복설계(redundancy)’다. 엘리베이터를 탈 때 벽면에 적힌 최대 중량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최대 중량이 700㎏인 엘리베이터에 체중 총량이 701㎏인 사람들이 타더라도 엘리베이터는 추락하지 않는다. 엘리베이터 케이블은 최대 중량의 10배 이상을 버틸 수 있도록 설계돼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 상황에선 충분한 마진을 남기고 경보를 울려 마지막에 탄 사람이 내리게 한다.
승강기에는 중복설계가 되어있다
중복설계는 대개 ‘역전(驛前) 앞’처럼 불필요한 중복을 가리킬 때 쓰인다. 하지만 공학 분야에선 좀 다르다. 핵심 장치가 고장 났을 때 시스템 전체 고장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핵심 장치를 2중·3중으로 중복 배치하는 작업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당장은 비용이 증가하거나 효율이 떨어질 수 있지만 시스템이 고장 날 확률은 현격히 줄일 수 있다. 핵심 장치 하나가 고장 날 확률을 10%라고 할 때 두 개가 동시에 고장 날 확률은 1%, 세 개가 모두 고장 날 확률은 0.1%로 현저히 낮아지는 것이다.
스쿨버스가 철길을 건널 때 출입문을 여는 것도 공학적 중복설계에 해당된다
스쿨버스가 철길을 건널 때 출입문을 여는 것도 공학적 중복설계에 해당한다. 철길 앞에서 출입문을 여닫느라 몇 초가 더 걸리긴 하지만 차단기가 고장 나거나 악천후로 한치 앞이 안 보여도 기차 소릴 듣는 것만으로 사고를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안불망위(安不忘危)는 ‘안전할 때 위험을 대비해야 한다’는 뜻으로, 안전 문제가 생겼을 때 어떤 자세를 취해야 바람직한지 알려주는 말이다. 실제로 안전은 모든 일의 ‘기본’이다. 따라서 기본을 망각한 채 효율에만 치중해 벌어지는 대형 안전 사고를 방지하려면 다음 명제를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사람 생명을 지키는 일엔 결코 실패가 있어선 안 되므로 3중∙4중의 중복설계도 지나치지 않다.”
“군자는 태평할 때에도 위태함을 잊지 않고, 순탄할 때에도 멸망을 잊지 않으며, 잘 다스려지고 있을 때에도 혼란을 잊지 않으니 이로써 내 몸을 보전할 수 있고, 가정과 나라를 지킬 수 있다.”
공자는 일찍이 주역(周易) ‘계사전(繫辭傳)’ 하편에서 ‘안불망위(安不忘危)’를 말했다. 현대 사회가 거듭된 대형 참사로 고통 받는 배경엔 ‘마구잡이 개발을 거치며 효율에 저당 잡힌 안전’이란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하지만 안전을 희생시켜 얻은 효율이 과연 진짜 효율일까? 어떤 경우에도 편리와 효율을 사람의 생명과 바꿀 순 없는 노릇이다. 즉 사람 생명을 지키는 일에 관한 한 3중·4중의 중복설계도 결코 지나치지 않다.
시스템 이기는 건 ‘기꺼이 불편 감수하려는’ 자세
폭설이 내린 뒤의 모습
내가 살고 있는 노스캐롤라이나는 지난달 16일(현지 시각) 폭설이 예보돼 오후 6시쯤 휴교령이 내렸다. 이튿날엔 15㎝ 가까이 눈이 쌓였고 휴교 조치는 18일까지 이어졌다. 제설차가 거리를 부지런히 돌아다닌 덕분에 도로의 눈은 거의 다 치워졌지만 19일에도 휴교령은 풀리지 않았다. 사흘이 넘도록 열일 제쳐놓고 아이들을 돌보려니 슬슬 짜증이 났다. 대체수업일로 지정된 20일, ‘드디어 등교하나’ 했는데 또 휴교령이 내려졌다.
생각보다 길어진 휴교에 대해 항의하려고 교육청 페이스북 페이지에 접속했더니 이미 항의성 글이 몇 개 올라와 있었다. 의외였던 건 그 글에 달린 수십 개의 비판적 댓글이었다. “당신 집 앞 눈은 깨끗하게 치워졌는지 몰라도 (서울시 면적의 네 배에 이르는) 카운티 곳곳에 아직 스쿨버스가 다니기엔 위험한 구간이 남아 있을지 모른다. 우린 안전이 최종적으로 확인될 때까지 학교의 휴교 조치를 지지한다” “학생과 교사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교육청이 자랑스럽다” 대부분 이런 내용이었다.
그 댓글들을 읽으며 스쿨버스 운행 매뉴얼을 처음 접했을 때보다 더 깊은 인상을 받았다. 사회가 안전해지려면 탄탄한 시스템과 프로세스를 갖추는 게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건 그 시스템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자세 아닐까? 말하자면 ‘정신적 중복설계’가 필요한 셈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본능적으로 쉽고 편한 것부터 찾게 마련이다. 하지만 때로 ‘나’와 ‘우리’의 안전을 지킬 수 있는 불편쯤은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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