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 없는 법관'을 고대함 [정숭호]



'양심 없는 법관'을 고대함 [정숭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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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 없는 법관'을 고대함

2018.02.23

나는 최근 이재용 삼성그룹 부회장의 항소심 재판 결과에 대해 법관들이 편을 나눠 서로 비판, 비난하는 것을 보고 법관은, 최소한 재판할 때만큼은, 양심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더 굳혔다. 아울러 법관은 법률만으로 판단해야 하며, 법리에만 근거한 판결만이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판결이라는 생각도 굳혔다. 이재용 항소심을 놓고 법관들이 서로 “올바른 판결이다, 아니다”라고 목청을 높이고 있는 건 ‘법리’ 아닌 다른 기준으로도 판단했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굳어졌다. 

‘법리’ 아닌 다른 판단의 기준은 무엇인가? ‘나만의 양심’이다. ‘나만의 양심’은 불쌍해하고, 부끄러워하고, 미안해하고, 고마워하는 등 사람이라면 당연히 가져야 하는 보편적 양심이 아니라 “양심적으로는 내가 너보다 낫다”고 내세울 때의 그 양심이다. 자리다툼하는 시장 상인들이 삿대질을 하면서 “너는 양심도 없냐?”고 서로 똑같은 말로 악을 쓸 때의 그 양심이다. 

양심은 우리 헌법 제 103조가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심판한다’고 규정함에 따라 법률과 대등한 자격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법률은 법전에 엄밀한 언어로 규정되지만 양심은 그렇지 않다. 법률은 책에 적힌 대로 따르면 되지만 양심은 따를 것이 없거나 수없이 많다. 양심은 자라난 환경과 배워 온 배경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며, 심지어는 자기 이익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시장 상인들의 ‘나만의 양심’은 이런 연유로 존재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서로 다른 양심으로 사건을 접하고 판결을 내리면 판결 역시 서로 다를 수밖에 없게 될 것이고, 판결에 대한 반응 역시 각각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다른 반응들이 맞부딪혀 지금 보는 것처럼 법관사회를, 나아가 나라를 분열시키고, 시끄럽게 하고, 법관들이 서로 다른 법률책을 놓고  재판한 것처럼 비치게 한 것이다. 그들은 시장에서도 그렇게 싸울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내가 “법관들은 양심 없이 살아야 한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법률은 단 한 과목도 공부하지 않은 ‘법 백치(法 白癡)’인 내 말보다는 나에게 이런 생각을 더 깊게 심어준 다른 이의 주장을 옮기는 게 더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대법관이었던 그는 자기 책에 “헌법 103조의 ‘그 양심에 따라 심판한다’는 구절은 유해한 삽입구이므로 삭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썼다. 다음은 그 다음 대목이다.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 ‘그 양심에 따라’라는 말은, 독재와 권위주의의 시절에는 독재와 압제에 굴복하는 ‘굴종(屈從)의 양심’에 면죄부를, 자유 과잉의 시절에는 미숙하고 천박한 ‘방종(放縱)의 양심’에 터무니없는 인허장을 주었을 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헌법 103조의 연혁에 대해서도 알려주고 있다. “우리 제헌헌법은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독립하여 심판한다’고만 규정하고 있었다. 그러다 1962년 제3공화국 헌법을 개정하면서 ‘그 양심에 따라’가 삽입되었고, 오늘에 이르렀다. 이 구절이 왜 삽입됐는지, 그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설득력 있는 논의는 보이지 않으며, 다만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세력이 사법독립을 더 존중하는 듯한 외관을 보이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짐작될 뿐이다.” 

그는 또 “독일의 경우 1919년의 바이마르헌법은 ‘법관은 법률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고만 규정하다가 나치 정권이 지난 다음 헌법을 개정할 때 ‘법관은 법률과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고 개정안 초안에 넣었지만 ‘법관의 양심이 마치 법률과 동일시되거나 초법규적인 법원(法源)으로 오인될 수 있다’는 이유로 반대에 부딪혀 결국 바이마르헌법의 원래 규정을 유지하게 되었다”며 “독일의 이런 논의가 우리에게도 참고가 될 것”이라고 ‘법관의 양심’에 대한 자신의 소회를 마무리했다. 사석에서 그가 “법률 해석에서 떨어지는 법관, 즉 실력이 약한 법관이 양심을 강조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술회한 것도 적어놓아야겠다.

‘법관의 양심’을 이야기하다보니 졸업정원제가 처음 시행된 1980년대 초반, ‘양심으로 살지 마라’라는 제목을 단 사회면 머리기사에 깜짝 놀랐던 기억이 떠오른다. 학력이 도저히 안 되는데도 ‘깡’만으로 서울대 법대에 지원, 덜컥 붙어버린 고학생을 인터뷰한 기사였다. 그는 자기 할아버지의 가르침, ‘양심으로 살지 마라’라는 가르침대로 살아서 합격한 것 같다고 말했고, 이걸 재미있는 말이라고 생각한 편집자가 제목으로 뽑은 것이다. (그가 합격할 수 있었던 건 요즘의 수능인 학력고사 고득점자들이 원서만으로 뽑는 첫 졸정제 입시에서 혹시 낙방할까 두려워 대거 하향지원 하는 바람에 서울대 법대조차도 미달이었기 때문이다.)

‘양심으로 살지 마라라니, 정말 심장에 깡과 털만 있는 친구인가’라는 생각으로 기사를 읽었더니 그가 말한 양심은 도덕적 의식을 말하는 ‘良心’이 아니고 두 마음을 뜻하는 ‘兩心’이었다. 예를 들면 ‘명예를 추구하면서 돈, 혹은 권력까지 바라서는 안 된다’라는 것이었다. 기사 제목은 한자를 넣어 ‘兩心으로 살지 마라’로 바뀐 것으로 기억이 난다.

“앞으로 우리나라 법관들은 양심(良心)으로도, 양심(兩心)으로도 판결하지 마라”라고 하면 가벼운 말장난밖에 되지 않으려나. 어쨌거나 어떤 판결에서도 “양심으로 판단했다”거나, 어떤 판결을 두고도 “양심에 비추어보면 말도 안 되는 엉터리 판결”이라는 말만은 더 이상 안 나왔으면 좋겠다. 법관들이 ‘법률기술자’처럼 보여도 좋으니 오직 법리, 엄정한 법리로만 판결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굳어진다. 그렇게 되면 실력 없는 법관, 법리를 모르는 법관, 그리고 두 마음 양심으로 판결하는 법관은 법원에서 뿌리 뽑혀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 ‘양심 없는 법관’을 갈앙(渴仰)한다! 개헌이 된다면 새 헌법에서도 ‘양심’이 제거되기를 바란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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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정숭호

1978년 한국일보 입사, 사회부 경제부 기자와 여러 부서의 부장, 부국장을 지냈다. 코스카저널 논설주간, 뉴시스 논설고문, 신문윤리위원회 전문위원 등 역임. 매주 목요일 이투데이에 '금주의 키워드' 집필 중. 저서: '목사가 미웠다'(2003년), '트루먼, 진실한 대통령 진정한 리더십'(201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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