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안(代案) 자기로 사는 세 가지 요건 [신아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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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代案) 자기로 사는 세 가지 요건

2018.01.24

며칠 전 시내의 한 카페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우리말로 대화를 나누는 외국인을 보았습니다. 말의 내용과 발음만 들었을 때는 외국인인 줄도 몰랐다가 억양이 약간 어설프다 싶어 돌아보니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지요. 문득 개화기의 서양 선교사가 연상되면서, 학부모 두 사람과 어린 학생 둘에게 하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대안 학교뿐만이 아닙니다. 지금은 대안 기업, 대안 가정도 필요합니다. 물질 위주의 소비문화에서 오는 자기중심적인 사고와 배타적인 소유욕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모습도 그렇고, 대화 내용도 그렇고 역시 선교사 내지 교육자인가 싶었습니다. ‘대안 학교’는 익숙해도 ‘대안 기업, 대안 가정’이라는 말은 지금껏 들어본 적 없이 신선하고 새로워, 그렇다면 ‘대안 개인’, 내지 ’대안 자기’는 왜 없겠느냐며 저도 모르게 사유를 확장하게 되었습니다.

‘대안(代案)’이란, 말 그대로 ‘어떤 것을 대신하는 방안’을 의미합니다. 즉, ‘현안(現案)’이 완전한 제 구실과 본래적 제 모습을 구현하지 못할 때 ‘대안’이 나오게 되는 것일 테지요. 그 외국인의 표현대로라면 학교도, 기업도, 가정도 지금 상태로는 안 되겠다는, 몸담고 있는 사람들의 욕구와 의지, 가치 등을 제대로 반영하고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대안이 대안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참(된) 안’이 될 수도 있겠지요.

제가 만들어 낸  ‘대안 자기, 대안 개인’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다른 말로 하자면 지금의 나에게 채워져야(혹은 비워져야) 할 것, 깨달음이 필요한 영역은 무엇일까요? 지금보다 내가 더 잘 살 수 있는 길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요? 카페의 외국인 일행의 옆 자리에 앉아 저는 대략 세 가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째, 모방이 아닌 창의적인 사람이 되는 것, 둘째, 든 사람보다 된 사람이 되는 것, 셋째, 독존하는 존재가 아닌 타인과, 나아가 우주 만물과의 연결을 회복하고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이렇게 말하니 ‘대안 자기’란 곧 ‘참 자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목회자이자 정신분석학자인 박종서의 <목적없음이 이끄는 삶>에 첫 번째로 말한 모방이 아닌 창의적인 삶의 상징적 예가 있습니다. 이렇게 살려면 새 술을 새 부대에 담듯, 삶의 틀과 판을 바꿔야 가능할 것 같습니다. 

“어느 도시에서 찰리 채플린 흉내 내기 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마침 그곳을 지나던 채플린은 본인이 진짜 채플린이란 사실을 숨기고 그 대회에 참여했다. 결과는 3등이었다. 채플린보다 더 채플린 같은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채플린이 1등상을 놓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본인이 어떻게 자신을 흉내 낼 수 있을까? 채플린 자신은 자신일 뿐, 흉내를 잘 내는 사람이 1등상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모방과 창의적인 삶은 다른 체계 안에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든 사람보다 된 사람이 낫다’는 말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겠지만, 신약 27서에 포함되지 못한 기독교 경전 ‘도마복음’을 보면 그 말뜻이 보다 선명하게 들어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가 모든 것을 안다고 해도 (어떤) 한 가지를 모른다면 완전히 부족한 자이다.” - 박규현 <내 안의 구도자, 도마복음 -잃어버린 신을 찾아서>

그 어떤 한 가지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목자가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두고도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찾는 것을 더 귀히 여긴다.’는 비유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즉, 내 안에 있는 아흔아홉을 온갖 지식적인 것, 아는 것, 머리에 든 것이라고 할 때, 그 아흔아홉의 지식보다 중요한 것은 한 마리의 양, 즉 지혜라는 의미입니다.

지혜는 오직 깨달음, 영성을 통해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아는 것에 의지해서 사는 ‘든 사람’보다 지혜의 눈을 가진 ‘된 사람’이 곧 참 자기, 대안 자기로 살 수 있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예수가 말한 ‘모르는 어떤 한 가지’란 바로 영성, 깨달음, 마음의 눈을 뜻한다고 저자 박규현은 말하고 있습니다. 마침 박규현은 20세기 초 오스트리아의 인지학자 루돌프 슈타이너의 교육 사상을 잇는 한국발도르프 협동조합 이사장이자, 그 교육 정신을 구현하고 실천하는 이른바 대안학교인 '양평자유학교'의 설립자입니다.

끝으로 제가 생각한 ‘대안 자기’의 세 번째 요소는 나와 타자의 연계적 삶입니다. 흔히 독선적인 사람에게 “너는 하늘에서 혼자 뚝 떨어진 줄 아냐?”며 꾸짖듯이, 우리는 애초 자연의 산물이자 타자와의 연관성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종종 잊고 삽니다. 태어나는 것뿐만 아니라  살아가는 것도, 죽는 것도  혼자 할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많은 것을 가지고 마음을 꽁꽁 닫는 대신, 가진 것을 나누고 마음을 열어야 되레 안전합니다. 그게 바로 나를 보호하는 길입니다. 따지고 보면 남을 돕는 것도 그 사람 잘 되라는 게 아니라 나 잘 되라고 하는 일 아닌가요? 일례로 내가 누군가에게 먹을 것을 나눠 주지 않아서 그 사람이 사흘을 굶은 후에 내 집 담을 넘어왔다면, 그때부터는 나의 안전을 걱정해야 합니다. 그러기 전에 미리 조금 나눠주는 것이 내 것을 지키는 방편이자, 결국 나한테 이로운 길이더란 말이지요. 

이렇게 대안 자기에 대해 생각하고 나니 대안 가정, 대안 학교, 대안 기업 나아가 대안 국가, 대안 인류에 대한 답이 저절로 주어지는 것 같습니다.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의 순서처럼, 일찍이  함석헌 선생이 말한 '자기로부터의 혁명'처럼 말입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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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신아연

이대 철학과를 나와 호주동아일보와 호주한국일보 기자를 지내고, 현재는 자유칼럼그룹과 자생한방병원 등에 기고하며 소설을 쓰고 있다. 저서로는 생명소설『강치의 바다』 장편소설 『사임당의 비밀편지』를 비롯, 『내 안에 개있다』 『글 쓰는 여자, 밥 짓는 여자』 『아버지는 판사, 아들은 주방보조』 『심심한 천국 재밌는 지옥』 『마르지 않는 붓(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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