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의 폭력성
건축의 폭력성
"그곳에 가면 바다가 전부 내 것이 된다"
내년엔 자연과 함께 춤추고, 뒹굴고,
존재하는 건축 만났으면
그곳에 가면 바다가 전부 내 것이 된다. 앞은 탁 트였고, 바다에 접한 수많은 바위가 만들어 내는 절경은 가슴까지 시원하게 해준다. 살랑거리는 바람, 바다 내음이 얼굴을 스친다. 호의적인 평가가 잇따른다. 건축적으로도 꽤 잘 지었다는 얘기도 들린다(사실 어떤 기준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보고 온 이들도 SNS를 통해 칭찬의 글을 올려놓았다.
부산 기장 아난티 코브.
하지만 기자는 올여름 '건축의 폭력성'을 여기서 보았다. 공공 간의 계급화, 구별 짓기, 소외라는 단어를 예서 떠 올렸다. 긍정적인 부문도 꽤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는 부정적인 느낌이 더 강했다. 바다와 강에 접해 병풍처럼 펼쳐진 해운대에 이어 이번엔 기장에 또 하나의 거대 장막이 펼쳐진 것 같은 착각. 이건 필연코 단절이었다. 바다가 육지로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또 육지가 바다로 자연스럽게 이어짐은 이곳에서만큼은 더 이상 '자연스럽게'란 말을 무색하게 했다. 건축가 이타미 준의 제주도 포도호텔, 조병수의 남해 사우스 케이프처럼 좀 더 자연에 순응적이거나 자연을 흡입했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들었다. 병풍처럼 길게 펼쳐진 건축물은 바다와 육지를 너무나 명확하게 경계지어 놓았다. 그래서 고립적이고 배타적이다.
제주도 포도호텔 전경. 부산일보DB
거대 건물은 바다와 아름다운 해안 절경을 자신들의 앞마당으로 만들어 버렸다. '시민을 위한 바다'라는 말이 잠시 무안해진다.
자연 그대로가 최고의 건축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건축을 '보이지 않는 폭력'이라 했던가. 이 크고 거대한 건물은 휴머니즘을 겁박하고 희생을 강요한다. 탁 트인 바다는 누구나 볼 수 있어야 한다. 최근 작고한 부산대 사회학과 윤일성 교수도 그렇게 말했다. 그게 시민의 권리다. 소시민의 삶은 그 속에서 외면당하고 소외당하고 겁탈당했음을 본다. 도시는 분명 시민의 것이다. 시민 다수가 누려야 할 공간을 빼앗아 간 건축!
올해 중순 문을 연 기장 아난티 코브(힐튼 부산과 펜션) 건축물이 갖는 공간성을 두고 느낀 기자의 소회다.
누군가 얘기했던가? 자연보다 더 좋은 건축은 없다고. 처음 이 건물을 접했을 때, 이 말이 절절히 와 닿았다.
아무리 자본주의 사회라지만, 바다와 땅의 만남을 이렇게 단절시켜도 괜찮은 것일까? 이게 그곳을 다녀온 후에도 오랫동안 머리를 짓눌렀다.
Inhabit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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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더불어 사는 삶을 실천했던 경주 최부잣집은 여전히 대한민국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본으로 남아 있는지 모른다. 300년 동안 수 대에 걸쳐 만석지기로 이름을 날린 경주 교동 최부잣집. 최부자는 흉년 때 곳간 문을 열어 이웃을 구제하고 마지막에는 재산 대부분을 사회에 헌납했다. 경주 교동의 최부잣집은 그렇게 부자였지만, 고택의 처마는 이웃집들과 그 높이를 나란히 한다. 부자라는 명성에 걸맞지 않게 너무도 평범한 고택. 건축 당시 인근 향교보다 낮게 터를 깎아 내고 집을 지었다고 전한다.
이탈리아 남부 카프리섬, 부산 영도의 흰여울 마을 역시 성(城)처럼 우뚝 솟아있거나, 병풍처럼 바다를 넓게 막아선 건물은 없다. 그래서 우린 이곳을 아름답다고 하는 것이다.
최근의 우리 건축을 보면, 지나칠 정도로 자본의 욕망에 포획되어 있다. 지극히 자본에 충실하고 그것을 충족시키기 위한 환상을 만들어내는 데 열중한다. 이로 인해 도시를 삶의 공간으로 여겨왔던 소시민은 도시의 환영(幻影) 속에 짓눌러 상대적으로 소외·결핍 당한다.
이제 그 욕망을 좀 내려놓을 때가 됐다. 아니 그 욕망을 멈춰야 한다. 그리고 도시에 대해 깊은 성찰을 해야 한다.
내년에는 도시 속에서 자연과 함께 춤추고, 함께 뒹굴고, 함께 존재하는 그런 건축을 많이 만났으면 좋겠다. 배려의 건축, 소통의 건축 말이다. 건축물로 인해 끊어지고 훼손된 자연에 생명의 연속성을 주어야 한다. 그래서 건축물이 또 다른 자연의 일부인 것처럼 느껴지는 한 해가 되었으면 한다. 공학의 집보다는 인문학적 집을. 승효상의 '빈자의 미학', 정기용의 '감응의 건축', 알랭 드 보통의 '행복의 건축'을, 내년에는 꼭 보고 싶다.
정달식 기자 dosol@busan.com 부산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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