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세의 원미경 씨 [박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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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세의 원미경 씨

2017.12.20

1990년 가을이었습니다. 복학을 하고 첫 학기였는데, 학교정문은 시위로 통제되어서 서쪽 문을 통해 수업을 들으러 가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없어진 연희동 사거리의 연희스포츠센터를 지나는데, 저 멀리 켄터키프라이드 치킨 창가에 앉아 있는 앳된 얼굴이 보였습니다. ‘누구였지? 어디서 본 것 같은데?’ 하고 생각하는 찰나에 “아! 원미경 씨다.”라는 작은 탄성이 나왔습니다. 지금은 방송사에서 근무를 하고 있어서 연예인에 대한 신기함이나 신비스러운 마음이 없지만, 그 당시에는 연예인을 직접 본다는 것은 큰 이벤트였습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는 모르겠으나 켄터키프라이드 치킨으로 들어가서 원미경 씨의 사인을 직접 받기까지 했습니다. 당시 사인을 받을 마땅한 종이가 없었던 필자는 ‘지역사회학’이라는 전공 수업 책에 싸인을 받았고 사인의 힘 덕택이었는지 그 과목의 점수가 A학점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결혼과 육아로 TV를 한동안 떠나있던 원미경 씨가 얼마 전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이라는 드라마로 다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필자가 싸인을 받던 때의 앳된 모습은 어느덧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모습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보통의 경우 연예인들은 일반인들보다 더 젊어 보입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큰 요인은 바로 의학적 기술의 힘을 빌리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원미경 씨는 세월의 흔적을 인위적으로 돌려놓는 일을 하지 않고 TV에 복귀한 것 같았습니다. 필자의 아내도 같이 드라마를 보면서 “저 모습이 딱 저 나이에 맞는 주부의 실제 모습이야. 그동안 너무 젊어 보이는 엄마들과 할머니들만 나와서 주부들의 박탈감이 컸는데, 원미경 씨의 꾸미지 않은 모습을 보니까 드라마에 제대로 몰입하게 되네.”라고 말하며 엄지를 치켜 세웠습니다.

세상의 유행은 참 이상합니다. 성형은 한 것을 들키면 매우 치욕적으로 생각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언제부턴가 연예인이라면 성형은 당연한 것처럼 인식하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성형을 하지 않는 것이 대중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처럼 비치는 지경이 됐으니 말입니다. 하긴, 주사 몇 방으로 얼굴이 갸름해지고, 주름이 개선되고, 이마와 볼이 오동통해지며 예뻐지는데 TV에 얼굴을 비추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라면 대중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라도 과학의 힘을 빌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필자가 잘 알고 지내는 피부과 의사 한 분은 연기자들이 보톡스를 맞는 것에 필사적으로 반대를 하던 분이었습니다. 보톡스는 근육을 마비시켜 주름이 만들어지는 것을 원천봉쇄합니다. 쉽게 설명하면, 표정을 짓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따라서 표정 없는 연기를 하게 되기 때문에 연기자가 보톡스를 맞아서 주름을 없애는 것은 프로답지 못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말하던 그분도 TV에 출연해서 인기를 얻게 되자 어느 순간 이마의 주름이 하나둘 안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필자는 그분의 이중적인 모습을 힐난하려는 마음은 전혀 없습니다. 다만, 그만큼 젊어 보이고 잘생겨 보이려는 욕구는 이성적 판단을 뛰어넘는 강력한 것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그분의 예를 들었을 뿐입니다.

필자 역시 10년 전에 보톡스 시술을 두 번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잠시 방송을 쉬고 2년 동안 연수를 다녀오면서 보톡스가 풀려가는 과정을 지켜봤습니다. 그 과정이 6개월 정도 지속된 것 같았는데, 먼저 풀리는 곳과 나중에 풀리는 곳이 있어서 얼굴의 대칭이 살짝 맞지 않았던 시기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방송을 하지 않던 시기라서 매우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그 이후로는 인위적인 그 어떤 것도 멀리하고 있습니다. 지금 TV뉴스를 진행하면서 이마에 맺히는 주름이 신경이 쓰이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 주름이 오히려 뉴스의 신뢰를 높일 수 있는 방향으로 보일 수 있도록 뉴스의 내용을 숙지하고 표정 하나, 발음 하나에 더욱 집중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먹고살기 힘들다고 말하는데 성형외과, 피부과는 여전히 손님들로 넘쳐납니다. 이른바 뷰티 산업은 해마다 성장을 거듭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돈이 없어서 못 살겠다고 아우성입니다. 우리의 소비행태를 보면 우리가 정말 못사는 건지, 우리의 욕심이 우리를 가난하게 만든 건지 구분이 가지 않습니다. TV에 나오는 가난한 집의 주부 역할을 하는 연기자의 뽀얀 피부와 주름 없는 얼굴을 보며, 보통 사람들은 자신의 주름진 얼굴을 한탄하며 가난하다고 느낄 겁니다. TV에 묘사되는 중산층 집안의 가구들과 가전제품을 보며 보통 사람들은 ‘우리 집은 표준에 못 미치는구나’하고 한탄하게 될 것입니다. 

TV에서부터 신문, 라디오, 모바일, 인터넷 등등 모든 매체를 통해 오늘날 우리는 지독한 상업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집요한 광고에 노출된 채로 살고 있습니다. 유행은 돈을 낳고 그 돈을 위해 또다른 유행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성형시술 역시 유행처럼 번진 지 오래여서 성형을 안 한 얼굴을 TV에서 마주치는 일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혼탁한 세상에 천연기념물 같은 얼굴로 TV에 다시 비친 원미경 씨의 모습은 반가운 마음을 넘어 고마운 마음이 들기에 충분했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의사보다 얼굴을 예쁘게 만들어 주는 의사가 더 많은 비정상적인 세상에 원미경 씨가 주는 메시지를 곰곰이 생각해봐야 할 때입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이 칼럼을 필자와 자유칼럼그룹의 동의 없이 상업적 매체에 전재하거나, 영리적 목적으로 이용할 수 없습니다.

필자소개

박상도

SBS 선임 아나운서. 보성고ㆍ 연세대 사회학과 졸. 미 샌프란시스코주립대 언론정보학과 대학원 졸. 
현재 SBS 12뉴스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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