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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敵)의 심리전, 극에 달했다(2)
2017.12.18
-삐라 북(北)에는 공포, 남(南)에는 쓰레기-‘삐라’의 뜻과 어원이 궁금했습니다. 아주 자주 쓰던 말인데 왜 뜻과 어원을 모르고 있었는지 스스로 의아합니다. 이 글을 쓰면서 처음에는 막연히 러시아어라고 짐작했습니다. 단순히 강한 발음과 공산주의자들이 선전이나 대적심리전에 능하다는 기억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여기에다 우리 정치와 강압정치시절 가졌던 묘한 느낌이 그대로 남아있던 것도 작용했습니다.강압정치시절 삐라는 반정부 행위로 통했고, 대남 적화전술의 방편이라고 세뇌를 받았기 때문일 겁니다. 이보다 더 앞선 기억으로는, 삐라를 주워 가지고 있다가 제재를 받았다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삐라를 주워다 파출소나 지서에 가져가면 연필과 공책을 주었습니다. 제재와 보상의 대립이었겠지요. 여하튼 삐라는 나쁘다는 인식이 머릿속에 박혀 있습니다.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을 보니 ‘<일>bira’라며, 전단을 보라고 화살표를 해놓았습니다. 또 하나는 전단을 북한에서 사용하는 말이라고 했고요. 국어사전에 따르면 일본에서 비라(bira)로 받아들인 것이 우리나라로 오면서 경음화되어 삐라가 된 것으로 보입니다.이미 1938년에 간행된 조선어사전에 ‘삐라’가 등재되어 있고, ‘삘’에서 온 말이라고 풀이 되어 있답니다. 최근에 간행된 조선말대사전에도 삐라로 실려 있다네요. 우리는 순화하여 전단으로 쓰기로 했는데 아직도 북한은 삐라를 그대로 사용한다는 것이겠지요.일본어 사전을 보니 외래어나 외국어를 적는 ‘가다가나’로 표기했습니다. 다른 사전은 ‘히라가나’로 쓴 것도 있어 혼용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히라가나로 된 사전에 따르면 비라는 선전광고를 하기 위하여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거나, 내붙이는 종이 조각이라고 설명합니다. 흔히 찌라시라고도 하고요. 일본어 ‘히라’(ひら, 片·枚)를 다른 뜻으로 돌려썼다고 합니다. 한편으로는 의태어 흔들흔들(히라히라 ひらひら)로부터 왔다는 설도 있습니다.가장 신빙성 있는 설명은 근세 연예의 선전에 사용된 것이 최초라고 합니다. 대정기(註 大正期 1912~1926년)에 영어 bill(註 빌)의 영향으로 외래어 의식이 생겨났고, 현재는 비라(ビラ)라고 쓴다고 풀이했습니다. 이에 따르면 영어 빌(bill)에서 왔다는 것이 사실처럼 보입니다. 영어 bill은 우리말로 계산서, 청구서, 법안, 지폐 또는 100달러 등으로 번역합니다. 여기에다 포스터, 쪽지 같은 알림의 의미를 포함합니다.일본은 이중 유독 알리는 의미에다 초점을 맞춘 듯합니다. 어느 기록인지 확실한 기억은 없습니다. 다만, 2차 세계대전 막바지 오키나와에 미군이 상륙하기 직전 하늘에서 삐라가 하얗게 뿌려지는 것을 보며 장래를 걱정하는 일본인 병사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일본은 아마도 대적심리전이 펼쳐질 것을 예상하고 있었나 봅니다. 전쟁의 한 방편으로 벌써 생각한 것이겠지요.하지만 컴퓨터와 인터넷 시스템이 발전한 근래에는 별로 소용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서울 상공에 삐라가 날리기 시작했습니다. 내용을 보면 북한에서 날려 온 것 같습니다. 핵무기를 가지고 겁주고 싶은데, 한국 국민이 동요를 하지 않으니, 심리전 담당자가 오히려 당황하나 봅니다. 이렇게라도 해서 우리의 반응을 보고 싶었던 것일까요? 시간이 1960년대 즈음으로 되돌아간 것 같은 착각에 빠집니다.삐라를 본 한 도로 포장 근로자는 귀찮다는 듯이 “신문도 안 보는데 누가 이걸 보겠느냐”며 “거리를 청소할 때 힘만 든다”고 말했습니다. 허튼짓에 근로자들의 일만 늘어난다는 불평이었습니다. 한 노인은 “이런 돈 있으면 굶주리는 동포들에게 따뜻한 밥이나 한 그릇 먹이지”라며 혀를 찼습니다. 공산당이 가장 중점을 둔다는 근로자가 전단을 보고는 별 X같은 소리냐며 콧방귀를 뀌고, 젊은이들은 아예 관심이 없습니다. 스마트폰으로 검색하면 언제 어디서나 세상의 모든 일들이 눈앞에 훤히 펼쳐지는데, 정말 음식점 영수증만한 종이쪽지 하나로 흔들릴 만큼 허약한 정신을 가지지 않았다는 뜻입니다.하지만 북에서는 사정이 다른가 봅니다. 우리가 보내는 삐라가 북의 주민에게는 중요한 정보원 노릇을 톡톡히 한다고 합니다. 실제로 북한은 기회 있을 때마다 대북 삐라 살포를 중단하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우리 정부는 탈북자 단체들이 날려 보내는 삐라를 막기도 합니다.‘자기 기준으로 남을 보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는 말로 되짚어 보면, 북한은 아직도 정보가 차단되어 있다는 것을 역설로 증명합니다. 정확한 정보를 접할 수 없으니, 작은 종이 조각 정보에 귀중한 자기 목숨을 걸고, 자기 살던 고향을 등지고 다른 나라로 탈출하겠지요. 시작된 김에 아주 싼 비용으로 상대를 궁지에 몰아넣을 삐라를 대량으로 살포합시다. ‘만인의 입이 쇠를 녹이듯’ 만장의 삐라가 적의 핵무기를 녹일지 누가 압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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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신현덕
서울대학교, 서독 Georg-August-Universitaet, 한양대학교 행정대학원, 몽골 국립아카데미에서 수업. 몽골에서 한국인 최초로 박사학위 방어. 국민일보 국제문제대기자, 한국산업기술대학교 교수, 경인방송 사장 역임. 현재는 국민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서독은 독일보다 더 크다, 아내를 빌려 주는 나라, 몽골 풍속기, 몽골, 가장 간편한 글쓰기 등의 저서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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