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의 도시락 [한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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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의 도시락

2017.12.14

해마다 명절이 되면 둘째 아들의 친구가 정성이 담긴 작은 선물을 들고 옵니다. 선물을 들고 오는 이유는 고등학교 다닐 때 아내가 한동안 도시락을 싸 주었던 고마움에 대한 답례입니다. 

산골에 사는 둘째의 친구는 양친이 새벽부터 농사일에 매달리느라 도시락을 쌀 여유가 없다고 했습니다. 둘째로부터 말을 전해 들은 아내는 그 다음 날부터 도시락을 두 개씩 쌌습니다. 산골 출신인 아내는 고등학교 다닐 때 읍내에서 자취를 했는데 반찬 만들기가 어려워 맨밥 도시락만 쌌다고 합니다. 

우리는 그 일을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는데 대학을 졸업한 둘째의 친구는 취직하고부터 명절에 선물을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내는 둘째의 친구가 선물을 들고 올 때마다 다음부터는 갖고 오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지만 지난 추석에도 어김없이 선물을 들고 왔었습니다. 

선물은 가격을 떠나서 주는 사람의 정성이 중요합니다. 아내는 둘째 친구가 선물을 들고 올 때마다 매번 다음부터는 가져오지 말라고 하면서도 요즘 보기 드문 젊은이라는 칭찬을 아끼지 않습니다.

도시락을 싸 들고 학교에 다녔던 학창시절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열 손가락으로 헤아려도 부족할 만큼 도시락에 관한 추억을 간직하고 있을 것입니다. 

한 해를 보내는 12월이 되면 눈이 올 것처럼 흐린 날이 많아집니다. 하늘이 잿빛으로 물들면 교실 안은 낮에도 어두컴컴하고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틈새 바람은 더 날카롭게 이빨을 세우고, 교실바닥은 더 차갑게 냉기를 뿜어냅니다. 

교실 가운데에 있는 똥장군 난로가 열기를 내뿜고 있습니다. 제 몸을 살라 불을 피우고 있는 나무들은 학생들이 직접 구한 것들입니다. 날이 좋은 날은 가끔 4~6학년 학생들은 선생님들의 인솔로 뒷산에 올라갑니다. 

학생들은 매운바람에 콧물을 훌쩍이거나 언 손으로 얼굴을 비비며 삼삼오오로 몰려다니며 고주배기라 부르는 그루터기를 모읍니다. 어느 해는 집에서 장작 다섯 개씩을 가져오라는 말에 너도나도 장작 등짐을 지고 등교를 하기도 했습니다.

똥장군처럼 생겨서 똥장군 난로라 부르는 무쇠 난로 근처에 앉은 학생들은 열기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릅니다. 창문 옆이나 통로, 혹은 맨 앞이나 뒤쪽에 앉은 학생들은 부러운 눈빛으로 난롯가에 앉은 학생들을 곁눈질하며 수시로 등을 쓰다듬는 찬바람에 몸서리를 치기도 합니다. 

셋째 시간이 끝나면 난로 가운데 물주전자가 자리를 잡습니다. 물주전자 주변에는 벤또(弁當)라고 부르던 도시락이 겹겹이 쌓입니다. 크거나 얇은, 혹은 타원형의 도시락들 안에는 반찬통이 들어 있는 것도 있습니다. 

선생님은 칠판 앞에서 열심히 수업을 진행하시지만, 학생들은 코끝을 스쳐 가는 김치나 콩자반이며 멸치볶음이 덥혀지는 냄새에 마른 입을 다십니다. 주책없이 배에서 꼬르륵 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오면 민망한 표정으로 옆자리 짝의 눈치를 살피기도 하며 어서 수업이 끝나길 기다릴 때는 창문가에 앉은 학생도 틈새바람을 느낄 겨를이 없습니다.

수업을 하시던 선생님이 "밥 탄다"라고 지나가는 말처럼 하시는 말씀에 난롯가에 앉은 학생 두어 명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발딱 일어납니다. 밑에 있는 도시락을 제일 위로 올리고, 위에 있던 도시락은 밑으로 내립니다. 

수업이 끝날 무렵이면 주번은 양동이를 들고 숙직실로 향합니다. 숙직실 부엌에 걸린 가마솥 안에는 노란색의 옥수수죽이 부글부글 끓고 있습니다. 달걀의 흰자처럼 보이는 우유가 드문드문 섞인 옥수수죽을 양동이에 받아 들고 교실로 향하면 점심시간이 시작됩니다.

빈 도시락을 든 학생들은 일제히 양동이를 기준으로 줄을 서서 주번이 국자로 퍼 주는 옥수수죽을 받습니다. 더러는 밥을 싸 온 학생이 옥수수 죽을 먹으려고 빈 도시락과 바꿔서 줄을 서기도 합니다. 

도시락을 싸 올 형편이 되지 않아 옥수수죽을 먹는다고 해서 어느 누구 하나 그 학생을 동정어린 눈빛으로 바라보거나, 가난한 집에 산다고 멸시하지 않습니다. 단순히 그럴 만한 사정이 있어서 도시락을 싸오지 않았을 것이라는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도시락을 먹는 스타일은 천태만상입니다. 행여 누가 빈약한 반찬을 볼까 봐 도시락을 팔로 가리고 먹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도시락을 들고 다니면서 맛있는 반찬만 골라 먹거나, 여럿이 모여 반찬을 가운데 모아 놓고 먹기도 하고, 밥을 몇 수저 떠먹은 다음에 반찬을 넣고 뚜껑을 덮은 도시락을 흔들어 비빔밥을 만들어 먹기도 합니다. 

도시락을 먹는 습관은 천태만상이지만 표정들은 하나같이 즐겁습니다. 보리밥에 장아찌를 싸왔어도 당당하고, 옥수수죽을 퍼먹어도 번들거리는 웃음을 짓고, 김치깍두기에 콩자반을 먹는 얼굴도 즐겁고, 그 시절에는 귀한 달걀부침이나 어묵볶음을 싸 왔다고 해서 어깨를 세우지 않습니다. 

하굣길에 신작로를 뛰어갈 때는 책보나 책가방 안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는 모두 같습니다. 점심시간에 옥수수죽을 먹었다고 해서 조용하지 않고, 달걀부침이 들어있던 도시락이나, 콩자반이며 깍두기가 있던 도시락도 같은 소리를 냅니다. 

요즘에는 집에서 도시락을 싸는 경우는 흔하지 않습니다. 가족끼리 야외로 놀러 갈 때는 도시락보다는 근처 음식점에서 사 먹을 계획을 세웁니다. 음식점이 없는 경우는 고기를 구워 먹는 경우가 많습니다.

야외에서 단체 행사를 할 때 배달이 되는 도시락은 예전의 도시락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반찬의 가짓수도 많고 고급스럽습니다. 그러나 예전에 김치며 콩자반 반찬에 먹던 도시락처럼 입맛이 당기지 않습니다. 편의점에서도 20여 가지의 도시락을 판매하는데, 가격이 싸다는 것 외는 담백한 맛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불고기에 쌀밥 도시락이 보리밥에 김치 반찬의 도시락보다 입맛을 당기게 하지 않는 이유는 경제발달로 입맛이 까다로워진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직장이나 사업 관계로 한정식을 먹는것 보다, 고향 친구와 먹는 동태찌개가 더 맛있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세월이 변해도 예전의 도시락이 그리워지는 까닭은, 티 없이 맑은 친구들과 먹는 도시락에 어머니의 정성이 깃들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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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한만수

1990년부터 전업으로 소설을 쓰고 있음. 고려대학교 문학석사. 실천문학 장편소설 “하루” 등단. 대하장편소설 “금강” 전 15권 외 150여권 출간. 시집 “백수블루스”외 5권 출간. 이무영문학상 수상. 장편소설 “활” 문화예술진흥위원회 우수도서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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