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원전 산업 위협하는 '등 뒤의 비수'


한국 원전 산업 위협하는 '등 뒤의 비수'

김기천 조선비즈 논설주간


   “한국의 원전 기술은 세계적인 수준이다. 안전성이나 기술성을 자부해도 된다.”


조환익 전(前) 한국전력 사장이 최근 퇴임하기 직전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한전이 영국 무어사이드 원전 사업을 인수하는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된 데 대한 소회다. 선진국에서 한국 원전의 우수성을 인정받은 데 대한 자랑 이상의 함축적 의미가 있다.


무어사이드 인수전의 가장 큰 고비는 중국 광둥핵전공사(CGN)와의 경합이었다. 중국은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과 자금력을 앞세워 파키스탄, 루마니아, 아르헨티나 등에서 잇따라 원전 사업을 수주했다. 반면 한국은 2009년 UAE 원전 수주 이후 해외 사업에서 번번이 고배를 들었다. 이번에도 중국에 거의 넘어갈 뻔했다고 한다.


더욱이 한전은 ‘눈 앞의 화살’만이 아니라 ‘등 뒤의 비수’도 상대해야 하는 이중의 어려움을 겪었다. 문재인 정부는 출범 한달여만에 ‘탈(脫)원전’을 내세워 신고리 5·6호기 공사를 중단시켰다. 공론화 과정을 거쳐 신고리 공사가 재개되자 정부는 곧바로 신규 원전 6기 건설 계획을 백지화했다.


원자력 발전의 위험성 때문에 국내에서는 더 이상 원전을 짓지 않겠다고 못을 박은 것이다. 그러면서 해외에 원전을 수출한다는 것은 자가당착(自家撞着)이다. 이번엔 어찌어찌 넘어갔지만 앞으로 계속 문제가 될 소지가 크다. 무어사이드 원전뿐만 아니라 다른 해외 원전 수주도 불가능해질 위험이 있다.


정부·여당이 한국의 원전 기술을 폄하하고 원전 산업을 흔들어댄 또다른 사례도 적지 않다. 주무부처인 산업통상자원부는 지난 9월 “원전 수출을 위해서는 한·미 원자력협정에 의해 미국 승인이 필요할 것으로 예상된다”는 자료를 내 논란을 빚었다.


원전 핵심기술을 모두 국산화했지만 일부 원전 장비와 부품은 미국의 승인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러나 ‘불량국가’에 수출하는 것도 아닌데 미국이 굳이 제동을 걸고 나설지 의문이다. 그런 사태가 벌어지지 않도록 하는 게 정부의 책무이기도 하다. 미국 승인 운운할 게 아니라 재협상을 통해 원전 수출의 걸림돌을 제거하겠다고 하는 게 올바른 태도다.


한국형 원전 APR1400을 유럽 안전기준에 맞춰 재설계한 EU-APR이 유럽사업자요건(EUR) 인증을 받았을 때 정부는 보도자료 한장 내지 않았다. 한국형 원전의 유럽 수출이 가능해졌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했다. 어느 여당 의원은 APR1400을 개발하면서 확보한 특허의 양적·질적 수준이 모두 ‘보통’ 정도이고 경쟁력이 떨어진다고 깎아내리기도 했다. 


정부가 막판에 한전을 지원했다고 하지만 다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 하나 얹은 것이나 다름 없다. 정부·여당의 홀대 속에 한전이 얼마나 고군분투하며 애를 썼을지 짐작하기도 힘들다. 그래서 “한국 원전의 안전성과 기술성을 자부해도 된다”는 조 전사장의 말이 가슴을 울린다. 그동안 속앓이를 하며 맺힌 게 많았을 것이다.


물론 무어사이드 원전 사업은 아직 갈 길이 멀다. 도시바와의 지분 인수 협상, 한국 정부의 예비타당성 조사, 영국 정부와의 전력 판매단가 협상과 원전 인허가 절차 등 넘어야 할 산이 첩첩이다. 모든 과정이 순조롭게 진행되도 원전 건설 착공에는 앞으로 4~5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그런 한편으로 등 뒤의 비수는 여전히 섬뜩한 빛을 뿌리고 있다.


이 정부 들어 영향력이 부쩍 커진 환경운동연합은 최근 ‘영국 원전, 수출 아닌 손해 감수한 위험한 투자’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냈다. 한전이 큰 손해를 볼 게 분명하고, 이를 국민세금으로 메꿀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원전 수주에서 당장 손을 떼라는 주문이다.


영국 원전 사업의 위험성에 대한 지적은 나름 근거가 있다. UAE 원전과 달리 무어사이드 원전은 건설 후 전기를 팔아서 투자비를 회수하는 방식이다. 영국 정부와 전력 최저 판매단가를 어떻게 협상하느냐가 관건이다. 최저 판매단가가 낮게 결정되면 투자비도 건지지 못할 수 있다.


현재 건설중인 힝클리 포인트 원전의 최저 판매단가는 MWh당 92.5파운드로 원전 사업자가 상당한 이익을 낼 수 있는 수준이다. 하지만 그 이후 해상풍력발전의 판매단가가 훨씬 낮게 결정되는 등 여건이 달라졌다. 힝클리 포인트 수준의 유리한 조건은 기대하기 힘들다.


그렇다고 ‘영국에서 이제 원전 사업은 가망이 없다’고 단정할 이유도 없다. 탈원전 찬성파의 일방적인 과장이고 왜곡이다. 영국이 해상풍력발전만으로 전력 수요를 충당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앞으로도 일정 수준의 원전 비중을 유지하고, 여기에 맞춰 전력 판매단가도 결정될 것으로 보는게 합리적이다.


더욱이 한국은 원전 건설기간과 건설단가, 원전 고장 정지율을 비롯한 운용 효율성에서 세계 1위의 기술력을 자랑하고 있다. 같은 조건에서 다른 나라보다 더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다는 이야기다. 한국 원전산업의 기술력을 살릴 수 있는 적극적인 전략이 나와야 한다.


정부 에너지 정책의 재검토가 절실하다. ‘탈원전과 원전 수출은 별개’라는 식의 양다리 걸치기는 결국 자충수가 되고 말 것이다. 재생 에너지에 대한 투자 확대와 함께 원전 산업에 대한 좀더 균형있는 접근이 중요하다. 무엇보다 정부가 등 뒤에서 비수를 찔러대며 원전 산업의 생태계를 파괴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원문보기: 

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7/12/11/2017121101934.html#csidxed6f80d203b89ff88033e1d8f876b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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