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석탄으로 전기 끊겨도 책임 못진다는 정부
탈석탄으로 전기 끊겨도 책임 못진다는 정부
전기사업법 개정안 입법 예고
발전소 셧다운돼 전기료 올라도
법적책임 면제하는 규정 신설
"법적분쟁 사전차단 꼼수" 지적
정부가 탈(脫)원전·탈석탄 정책에 따라 전기 공급이 중단되거나 전기료가 인상되더라도 사업자의 손해배상 책임을 면제하는 규정 신설을 추진해 논란이 되고 있다. 혹시 모를 법적 분쟁을 차단하기 위해 ‘꼼수’를 부린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미세먼지 저감 대책에 따라 내년 봄 셧다운(일시 가동 중단)이 예정된 보령화력발전소 전경. /한경DB
특별한 사유 없인 전기 공급 중단 불가
산업통상자원부는 사업자가 법률에 따른 의무를 이행해야 하는 경우 소비자에게 전기 공급 중단을 허용하는 것을 골자로 한 ‘전기사업법 시행령 개정안’을 이달 초 입법예고했다. 발전사업자나 전기판매사업자의 전기 공급 거부 사유를 열거한 시행령 5조의2에 ‘전기사업법 및 다른 법률에 따라 사업자의 의무 등을 이행하는 경우’를 추가한 것이다.
산업부가 이런 항목을 신설한 것은 정부 정책 변화에 따라 사업자가 발전기 가동을 멈춰 전기 공급이 중단되거나 전기료가 인상되면 전기사업법에 위배된다는 비판을 의식해서다. 전기사업법 14조는 ‘발전사업자 및 전기판매사업자는 정당한 사유 없이 전기의 공급을 거부해선 안 된다’고 적시하고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국민에게 전기를 공급해야 할 의무를 부여한 것이다.
다만 예외적으로 사업자가 전기 공급을 거부할 수 있는 사유는 대통령령에 위임했다. △전기료 미납 △발전설비 보수 △재난이나 비상사태 발생 등 여덟 가지 경우다. 여기에 정부 정책에 부응하기 위해 한국전력이나 발전사들이 전기 공급을 중단하는 경우를 추가하겠다는 것이 산업부의 계획이다.
셧다운 손해배상청구 원천 봉쇄
전기 공급 거부 사유 추가는 정부가 매년 봄철 시행하기로 한 노후 석탄화력발전소의 셧다운(일시 가동 중단)과 관련이 깊다. 앞서 정부는 봄철 미세먼지를 줄이겠다는 명목으로 지난 6월 한 달간 가동한 지 30년이 넘은 석탄발전소 10기 중 8기를 셧다운했다.
내년부터는 셧다운 기간이 넉 달(3~6월)로 늘어난다. 산업부 관계자는 “내년부터 3~6월 노후 석탄발전소의 가동 중지가 정례화되면 전기사업법 위반 등 여러 법적 책임 문제가 불거질 것으로 예상했다”며 “혹시라도 가동 중단으로 전기료가 인상됐다며 손해배상청구 소송 등이 들어올 것에 대비해 셧다운 등에 관한 근거규정을 마련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부는 올해 한 달간 석탄발전소 셧다운으로 약 680억원의 전기료 인상 요인이 발생한 것으로 추산했다. 비용은 전기료에 반영하는 대신 일단 한전이 떠안기로 했다. 하지만 내년에도 이런 방식으로 비용 부담을 계속할지는 결정하지 않았다. 발전업계는 내년에 석탄발전소 셧다운 기간이 넉 달로 늘어나면 전기료 인상 요인이 연간 4000억원에 달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이 비용은 한전과 발전사들이 떠안지 않는 한 고스란히 전기료 에 전가된다.
정부의 탈원전 정책에 따라 수명 연장이 가능한 원자력발전소를 셧다운하거나 조기 폐로하는 경우도 전기료 인상 요인으로 작용한다. 법조계에선 이로 인해 전기료가 오르면 전기사업법 등에 근거해 피해를 본 민간 기업·소비자가 한전이나 발전사 등을 대상으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이번 시행령 개정으로 탈원전·탈석탄 정책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 등이 사실상 불가능해지게 됐다. 한 에너지 전문가는 “정부가 뒷일을 생각지 않고 정책을 내놓고서 발생하는 법적 문제점을 회피하고자 손쉬운 시행령 개정을 택했다”고 비판했다.
오형주 기자 ohj@hankyung.com 한국경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