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들의 서러운 이름 [임철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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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들의 서러운 이름

2017.11.08

나는 신문의 부음/부고란과 인사란은 빼놓지 않고 늘 봅니다. 누가 세상을 떠났는지, 누가 어느 자리 어느 직위에서 어디로 옮겼는지 등등을 제때 알지 못하면 사회생활 하면서 실례를 하거나 요즘 돌아가는 세상에 어둡게 됩니다. 이런 걸 모아서 싣는 사람들 페이지(이른바 피플면)는 신문에서 늘 잊지 말고 봐야 합니다. 

그런데 이번 여름부터는 왜 그런지 부고란의 여성 이름에 주목하게 됐습니다. 요즘 신문은 대개 망인(亡人)과 상주들의 이름을 함께 알려주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망인이 무명이면 그 이름은 생략하고 유명인사인 아들 딸의 모친상이라고 싣곤 했습니다. 나도 그게 익숙해서 망인보다 상주(喪主)의 이름을 더 먼저 찾아보게 됩니다. 상주가 여럿이면 내가 아는 사람의 이름을 놓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최근 몇 달 동안 신문에 실린 부고의 이름을 살펴보려 합니다. (1) 양금임(7월 초). 어떤 법무법인 대표 변호사의 어머니. 사망 당시 몇 살인지 모르지만, 가문을 일으키고 시집가서 잘 살라는 원망(願望)이 이름에 담겨 있습니다. 아들을 법대에 보내려고 노심초사하며 살아온 삶이 이름을 통해 읽힙니다. 금임의 금은 金인지 錦인지, 동생은 은임인지 궁금합니다. 8월 하순에 세상을 떠난 임복임 씨의 이름에도 같은 바람이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2) 김음전(8월 하순). 네 아들의 어머니입니다. ‘음전’은 말이나 행동이 곱고 우아하다는 뜻입니다. 부모가 딸에게 바라는 모습이 음전입니다. 음전하게 살림 잘하고 시집 잘 가서 애 많이 낳고 남편과 시부모의 사랑 받고 현모양처로 존경 받고... 박완서의 소설 ‘도시의 흉년’에는 “구닥다리 장롱과 반닫이와 고리짝과 횃대보와 놋요강이 쓸쓸하고도 음전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는 말이 나옵니다. 

(3) 유거복(8월 하순). 3남 1녀 자녀를 뒤로하고 남편보다 먼저 떠난 분입니다. 누구나 짐작하듯이 거복은 巨福, 크게 복을 받으라는 뜻입니다. 그게 아니면 오래 산다는 거북이라는 말이 거복으로 잘못 기록된 경우일 수도 있겠지요. 박경리의 소설 ‘토지’에서 주인공 서희의 아버지 최치수를 살해하고 처형당한 김평산의 큰아들이 거복입니다. 그는 나쁜 짓을 했지만, 부모가 이름을 줄 때에는 스스로 복을 받고 세상에 복이 되는 사람이 되라는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이름은 한자나 작명 배경을 잘 몰라도 대체로 의미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박염례 김묘저 박분놈 윤사분, 이미 고인이 된 이분들의 이름은 대체 무슨 뜻일까요? 요즘은 한자를 전혀 쓰지 않아 무슨 뜻인지 알기 어렵습니다. 묘저라면 妙姐, 妙齡(묘령)의 소녀가 생각나는데 분놈은 뭐지? 전혀 짐작하지 못하겠습니다. 좀 의아하게 생각한 이름 중에는 김일생도 있지만 그건 굳이 따져보지 않아도 의미를 알 것 같습니다. 

최근 본 부고에서는 유호초라는 이름이 눈에 띄었습니다. 아들과 사위가 다들 엽렵하던데, 호초라면 음식과 조리에 필요한 후추, 그러니까 호초(胡椒)를 말하는 걸까요? 후추처럼 살림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라는 뜻이 아닌지. 

여성의 이름을 챙기다 보니 얼마 지나지 않으면 이런 이름이 다 사라질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순자 명자 숙자 영자 길자 정자 이런 이름을 지어주는 부모도 없습니다. 요즘 부모들이 딸 이름으로 선호하는 민서 서현 지안 지유 지아 수아 하윤 서연 서윤, 이런 이름만 남을 것 같습니다. ㅇ으로 부드럽게 끝나는 이름이 대세입니다. 시대의 큰 변화입니다. 

딸 이름을 지을 때는 성씨(姓氏)와 발음이 잘 어울리게 하고,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잘 살리면서 시대감각에 맞게 해야 합니다. 여성은 이름도 없이 살던 시대, 딸을 낳으면 싫어하고 미워하고, 이름을 지어준다 해도 내다 버리듯 비하하던 시대의 유풍이 내가 앞에서 소개한 이름에 담겨 있습니다. 그런 특이한 이름과 만날 때마다 무슨 뜻인지 전화 걸어 취재하고 싶었지만 그러지는 않았습니다. 

여성으로서 고난과 역경의 시대를 어렵게 살아오면서 가정을 꾸리고, 내 한 몸 아끼지 않고 피땀으로 아들딸을 기르고 키운 어머니들의 이름이 이제 점차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그런 이름의 의미는 자녀들이나 겨우 알겠지요. 이름이 사라진다 해도 가족을 위하는 애틋한 여성의 마음씨와, 여성의 삶과 고난은 잊지 말아야 합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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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임철순

1974~2012년 한국일보 근무. 문화부장 사회부장 편집국장 주필 및 이사대우 논설고문을 역임했다. 
한국기자상, 삼성언론상, 위암 장지연상 수상. 
현재 이투데이 이사 겸 주필, 자유칼럼그룹 공동대표, 한국언론문화포럼 회장, 
시니어희망공동체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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