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왕봉에 올라 [방석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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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왕봉에 올라

2017.11.06

지난달 중순 오래 별러 온 지리산 천왕봉 등정에 나섰습니다. 함께 떠난 친구들 몇몇은 벌써 열 번은 올랐노라 자랑했지만 제게는 첫 등정 길이었습니다. 그동안 노고단, 벽소령, 세석, 장터목을 여러 차례 오르내리면서도 이런저런 사정으로 번번이 정상 문턱에서 주저앉아 아쉬움이 컸습니다. 

동서울터미널에서 아침 7시 첫차를 타고 꼬박 4시간을 달려 함양군(咸陽郡) 백무동(白武洞)에 도착했습니다. 옛고을식당이라는 곳에서 간단히 요기하고 곧장 등산로에 접어들었습니다. 등정 전날 밤을 보낼 장터목대피소까지는 5.8km. 네 시간 이상 부지런히 걸어야 하는 길입니다.

백무동에서 올라가는 산길은 그리 만만하지 않았습니다. 가파른 비탈과 계단 곳곳에서 숨을 헐떡여야 했습니다. 그런 길 4.3km를 숨 가쁘게 오르니 비로소 능선길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거기, 장대한 지리산 줄기의 응달진 골마다 하얗게 연무가 피어오르고 있었습니다. 양지바른 경사면엔 눈이 부시도록 찬란한 단풍이 불타고 있었습니다. 일행은 기성을 지르며 그 광경을 놓칠세라 휴대폰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다른 산행 팀의 젊은 여인 하나가 흥에 겨웠던지 부탁도 하기 전에 휴대폰을 빼앗아 들더니 선경에 파묻힌 우리 일행의 증명사진을 찍어주었습니다. 

장터목으로 가는 길에는 크고 작은 나무들이 숲을 이루어 산을 찾아온 이들을 포근히 맞아 주었습니다. 나무는 오래 묵고 덩치가 커질수록 더 넉넉히 품을 내어줍니다. 늙어갈수록 나무처럼 저렇게 너른 품으로 주위를 감싸 안을 수 있어야 하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따지지도 떠밀지도 말고 다가오는 대로 누구나 품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안녕하세요!” 산길을 걸으며 마음이 넉넉해진 덕인지 마주치는 산행객을 향해 인사말이 절로 튀어나옵니다. 저 좋아 하는 일이니 고생이랄 것도 없지만 서로서로 수고한다며 위로와 격려를 주고받습니다.
장터목대피소 공동 취사장의 그 왁자지껄한 소음과 음식 냄새조차 정겹게 다가옵니다. 마침 옆자리에서 조금 전 증명사진을 찍어주던 여인이 생일축하 케이크에 45라고 쓰인 양초를 꽂고 있었습니다. 산행으로 홍조 띤 여인의 얼굴은 양초를 모로 뒤집어 24세라 해도 어울릴 것 같았습니다. 우리 일행도 함께 손뼉 치며 생일축하 노래를 합창해 주었습니다. 

아직도 이른 시각, 그러나 다음 날 새벽 산행을 위해 모두들 서둘러 잠자리에 들어갑니다. 벗어 놓은 등산화가 현관 신발장 가득입니다. 두어 개 조금 비뚤어진 신발도 보입니다. 아무도 눈치 못 채게 그것들을 가지런히 정돈하면서 혼자 자탄합니다. ‘아이구, 이 고질병을 어떻게 고치나? 모든 걸 다 함께 품어주는 산에 들어와서도 이 더러운 성미를 못 버리는구나!’

장터목에서 천왕봉까지는 다시 1.7km. 정상 가까이 다가가면서 나무들의 키가 점점 작아지더니 마침내 덤불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지리산을 넘나드는 세찬 바람에 움츠러든 때문일 것입니다. 그 덤불숲에서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선 고사목도 보였습니다. 나무는 죽어서도 저렇게 의연하구나, 감탄이 절로 나왔습니다.

통천문(通天門)을 지나 마침내 천왕봉에 올라섰습니다. 정상 표석을 어루만지며 하늘의 축복이라도 받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지리산은 그 속에 깃든 수많은 사연들을 일일이 들춰냄이 없이, 그 자락에 얹혀사는 수많은 생명들을 나무람이 없이 조용히 품고 앉아 있었습니다. 그 모성의 위대함을 천왕봉 산정에서 더욱 깊이 느끼게 되었습니다. 서울 근교의 크고 작은 산에 올라 시답잖은 농으로 떠들다 내려오던 때와는 다른 상념에 한동안 정상을 떠나지 못했습니다. 

정상 표석에는 ‘智異山 天王峰 1915M'라고 새겨져 있었습니다. 산행에 앞서 찾아본 한 백과사전에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으로 달라진다.’ 하여 지리산(智異山)이라 불렀다던 소개가 생각났습니다. 저는 나름대로 ‘서로 다름을 알게 하는, 지혜의 산’, 그래서 ‘서로의 이해가 필요함을 깨우치게 하는 산’이라고 믿고 싶었습니다. 지구촌 어느 곳보다 갈등이 심한 우리 사회에 특히 절실한 화두니까요.

천왕봉은 동에서 올랐는지, 서에서 올랐는지 누구에게도 묻지 않았습니다. 널찍한 마루를 열어놓은 채 오르는 사람은 오르는 대로, 내려가는 사람 내려가는 대로 소리 없이 반기고 전송할 뿐이었습니다. 마주치는 사람들끼리 서로 어디서 올라왔는지, 어디로 내려갈 것인지 확인해보고 있었습니다. 천왕봉이 궁금해야 할 일을 사람들이 왜 그리 궁금히 여기는지 오히려 신기했습니다. 

표석 뒷면에는 ‘韓國人의 氣像, 여기서 發源되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건 또 누가 내린 정의일까?’ ‘지금 이 사회에서 우리의 기상이라고 내세울 만한 건 무엇일까?’ 표석 뒷면의 글귀를 읽으며 문득 이런 의문이 떠올랐습니다.

해발 1,400m 고지에 터 잡은 천년 고찰 법계사(法界寺)를 거쳐 중산리(中山里)로 내려오는 5.4km의 하산 길도 꽤 가파르고 험했습니다. 그러나 빨강, 노랑, 갈색, 초록으로 곱게 물든 단풍 길은 쉬이 발걸음을 떼지 못할 만큼 황홀했습니다. 거북이 부부의 느린 걸음을 잘도 참고 산행을 이끌어 준 친구들이 새삼 고마웠습니다. 산청군(山淸郡) 원지(院旨)의 대중목욕탕에서 땀을 씻고 서울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습니다. 시외버스의 안락한 좌석에서 졸며 깨며 지리산행의 감흥을 되새겨보았습니다. 몸은 고달파도 마음은 꿈같이 달콤한 산행이었습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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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방석순

스포츠서울 편집국 부국장, 경영기획실장, 2002월드컵조직위원회 홍보실장 역임. 올림픽, 월드컵축구 등 국제경기 현장 취재. 스포츠와 미디어, 체육청소년 문제가 주관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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