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하는 것만으로도 인정받는 사회가 되기를 바라며 [박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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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하는 것만으로도 인정받는 사회가 되기를 바라며

2017.10.25

필자가 처음 아나운서가 되었을 때, “TV 뉴스보다 라디오 뉴스가 더 어려워!”라고 말씀하신 선배가 있었습니다. ‘아니, 당연히 TV 뉴스가 더 어렵지. 카메라 보랴, 원고 읽으랴 얼마나 정신이 없을 텐데, 그냥 원고만 읽으면 되는 라디오 뉴스가 더 어려울라고?’ 당시엔 선배님의 말씀에 감히 반론을 제기할 수 없어서 속으로만 생각했는데, 한동안 이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50대가 되니 선배의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서서히 알게 되었습니다. 젊었을 때는 간혹 오독을 하더라도 젊다는 이유로 스스로 용서가 빨랐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작은 오점도 스스로 용납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라디오 뉴스는 앵커가 오독을 하고 지나가면 이를 정정할 방법이 없습니다. 청취자가 오로지 앵커의 목소리에만 의존해서 뉴스를 듣기 때문입니다. ‘생생한 현장’을 ‘생생한 형장’으로 발음하면 사람들은 ‘누가 처형당하나 보다’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한국학 대학원'을 '한국 학대학원'으로 잘못 띄어 읽으면 배우는 과목이 달라집니다.  ‘서울시 장애인협회’를 ‘서울시장 애인협회’로 잘못 띄어 읽으면 서울시장의 도덕성에 흠집을 만드는 우를 범하게 됩니다. 반면, TV 뉴스에서 같은 실수를 할 경우에는 자막과 영상 또는 기자의 리포팅으로 앵커의 실수를 시스템적으로 보완해 줍니다. 왜냐하면 TV 뉴스의 경우는 앵커의 오디오에만 정보를 의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속된 말로 앵커가 개떡같이 발음해도 찰떡같은 자막과 영상으로 뉴스가 차질 없이 전달되게 됩니다. 

여기에 또 하나의 큰 변수가 작용합니다. 바로 앵커의 미모입니다. 젊고 예쁜 앵커가 시청자의 눈을 사로잡으면 살짝 부정확한 발음은 별로 티가 나지 않게 됩니다. 옛날에는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고 했는데 요즘엔 이 말이 진화를 해서 ‘예쁘면 무죄’라는 말로 변했습니다. 필자가 후배들 교육을 하다가, “시청자들이 너의 오독까지 사랑해줄 정도로 매력이 있으면 열심히 아나운싱을 배우지 않아도 돼.”라고 우스갯소리를 한 적이 있습니다. 연습에 지친 후배들에게 한바탕 웃자고 한 말이지만 방송 쪽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이 말이 얼마나 뼈아픈 것인지 매우 잘 알고 있습니다.

일찍이 연암 박지원은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에서 ‘보고 듣는 것 같은 사람의 감각기관에 의해 어떤 사물이나 현상이 증폭되면 그 실체를 정확하게 살필 수 없다’는 것을 간파했습니다. 연암은 사람들이 낮에 요하(遼河)를 건널 때 물소리가 나지 않는 것은 요하가 평야에 위치하여 있기 때문이라고 얘기하지만, 이것은 사람들이 낮에만 건너므로 눈에 보이는 거친 파도 때문에 소리가 귀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밤에 요하를 건너게 되면 소리가 크게 들리는데, 이는 눈에 거친 파도가 보이지 않아 귀로 위협적인 소리만 듣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감각기관은 우리의 이성을 마비시키는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방송사가 젊고 예쁜 여성을 앵커로 기용하는 이유는 ‘감각적인 뉴스’로 시청자의 이성을 마비시켜 시청률을 올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과거 공영방송에서 여성 앵커를 선발할 때, 최종 2명을 두고 “내일도 보고 싶은 아나운서가 둘 중 누구인가?”라고 사장이 물어봤다는 일화는 유명합니다. 뉴스의 포장에 몰두하는 만큼 공정성과 직업적 소명의식에 매진했더라면 지금쯤 대한민국의 방송은 많이 달라졌을 겁니다.

최근에 KBS의 유애리 아나운서가 화제가 되었습니다. KBS의 파업으로 노조원들이 방송현장을 떠나자 노조원이 아닌 간부가 현장에 투입되었는데 전 KBS 아나운서 실장이었던 유애리 아나운서가 뉴스광장을 진행하게 된 것입니다. 퉁퉁한 아주머니가 아침을 깨우는 뉴스를 진행하는 것을 본 시청자들은 처음에는 다소 당황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귀에 쏙쏙 들어오는 정확한 발음으로 차분하게 뉴스를 진행하는 모습을 본 시청자들은 이내 태도를 바꿔 유애리 아나운서를 KBS 파업이 낳은 뜻밖의 수확이라며 반기는 분위기입니다. 파업의 지지여부와 상관 없이 필자의 주변에서도 젊은 여자 앵커가 진행할 때보다 오히려 지금이 더 좋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꽤 많습니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잘하는 것’에 대한 바른 판단을 하는 분들이 많아졌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 글을 읽으신 독자께서 지금 보는 뉴스 앵커의 발음이 정확한지 알고 싶으시다면 눈을 감고 오디오만 들어보시면 훨씬 쉽게 평가할 수 있을 겁니다. 이 방법은 필자가 후배들의 뉴스를 평가할 때 쓰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실력보다 포장이 중요한 사회가 되었습니다. 방송사의 특집프로그램에 진행 능력이 미숙한 연예인이 MC로 종종 캐스팅되는 경우 역시, 실력보다는 포장을 먼저 고려했기 때문이고, 아직 뉴스 진행을 하기엔 경험도 부족하고 진행능력 역시 부족한데도 미모 덕에 앵커 자리에 앉는 경우 역시 포장을 먼저 고려했기 때문입니다. 

체로키 인디언 추장이 어린 손자에게 인생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인간 마음속에서는 늘 두 마리의 늑대가 싸운단다. 하나는 악마 같은 놈, 다른 하나는 선한 놈. 네 마음속에서도 마찬가지야.”  그러자 손자가 물었습니다. “그럼 어떤 늑대가 이겨요?” 추장은 “네가 먹이를 주는 놈이 이긴단다.”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이미 연암이 <일야구도하기>를 통해 오감에 치우치지 않고 제대로 사물을 보는 혜안에 대해 깨달음을 주셨으니 이제 그 혜안을 통해 바른 판단을 하고 그 판단에 맞춰 먹이를 주면 참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보기에 그럴듯한 앵커보다 기본이 잘 된 앵커, 발음이 좋고 음성에 신뢰가 가는 앵커,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앵커, 강직하게 살아온 내면의 모습이 화면에 느껴지는 앵커에게 합당한 관심과 사랑을 준다면 잔망스러운 방송문화도 품격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유애리 아나운서를 통해 우리가 다시 한번, 기본에 충실한 것이 어떤 것인지를 되돌아보는 기회를 갖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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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박상도

SBS 선임 아나운서. 보성고ㆍ 연세대 사회학과 졸. 미 샌프란시스코주립대 언론정보학과 대학원 졸. 
현재 SBS 12뉴스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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