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계시는 저녁밥상 [한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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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계시는 저녁밥상

2017.10.19

가족이라는 말은한자로 집 가() 자에 무리 족() 자를 사용합니다. ()가 자는 갓머리() 변에 돼지 시()) 자를 씁니다. 무리 족()자는 씨[] 의 개념이 강합니다. 가족이라는 말은 한 지붕 밑에 씨족이 돼지를 키운다는 뜻이 됩니다. 가족의 구성원을 식구(食口)라고 합니다. 같은 지붕 아래서 한 솥에 지은 밥을 같이 먹는다는 뜻이 됩니다.

1960년대에만 해도 가족들은 최소한 저녁에는 밥상에 둘러앉아서 저녁을 같이 먹는 풍경이 친숙했습니다. 어머니도 저녁을 지어서 아버지가 집에 계시느냐의 여부를 따져가면서 저녁 밥상을 차리셨습니다.

저녁을 먹을 때가 되어도 아버지가 귀가하시지 않으면, 어머니 당신이 직접 아버지를 찾으러 가시든지, 자식들 중의 누군가 아버지를 찾으러 가야 했습니다.

겨울은 일찍 해가 저뭅니다. 1960년대 초에는 가정에 들어오는 전기가 일반선과 특선이 구분되어 있었습니다. 특선은 한 낮에도 불이 들어오지만, 일반선은 날이 어두워야 전기가 들어옵니다. 아버지를 찾으러 나가야 하는 시간은 일반선이 들어오고, 전등불이 방안을 밝힐 무렵입니다.

요즘처럼 가로등이 보편화되지 않았던 시절이라서 캄캄한 골목을 빠져나가면 저 멀리 선술집의 불빛이 창백하게 어둠을 밝히고 있습니다. 유리창이 있는 미닫이문 유리에는 성에가 하얗게 내려 앉아있기 마련입니다.

손바닥으로 유리에 내려앉은 성에를 살짝 문지르고 선술집 안을 들여다보면 친구 분들과  아버지모습이 보입니다. 아버지 스스로 일어나실 때까지 한참이나 찬바람과 싸우며 몰래 지켜봅니다. 기다리다 지치면 긴장이 돼서 잔뜩 주눅 든 얼굴로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갑니다.

미닫이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따뜻한 기온과 술국이며 막걸리 냄새가 섞인 구수한 냄새가 얼굴을 덮어 버립니다. 그 냄새는 곧 아버지의 냄새이기도 합니다. 어른들의 시선이 몰려오는 것을 느끼며 부끄럽게 인사를 합니다. 어른들은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거나, 장난기가 많으신 분은 막걸리를 찔끔 따라 내미시기도 합니다.

아버지가 계신 저녁 밥상의 반찬도 아버지 앞으로 배치가 됩니다. 생선 비린내라도 풍기는 반찬이라든지, 두부를 넣고 끓인 구수한 된장찌개는 아버지 드시기 쉬운 위치에 있기 마련입니다.
자식들은 아무리 배가 고파도 아버지가 먼저 수저를 드실 때까지 기다립니다. 아버지가 수저를 들고  한 수저 떠먹을 즈음에야 밥을 먹기 시작합니다.

아버지는 당신이 힘들었던 일에 대한 이야기는 밥상머리에서 하지 않으십니다. 자식들이 듣고 교훈이 될 만한 말씀들, 이를테면 뉘 집 자식은 길에서 어른을 보고 인사를 않는다. 남의 집 고구마가 먹고 싶어서 캐 먹을 때는 다른 줄기가 상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캐 먹어야 주인이 화를 덜 낼 것이라는 말씀을 조곤조곤 말씀하십니다.  이른바 밥상머리 교육입니다.

1980년대에 아버지가 된 저는 주말이 아니고는 가족과 같이 저녁을 먹는다는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습니다. 아침에도 자식들이 일어나기 전에 간단하게 요기를 하고 서둘러 출근을 하다 보니 가족 모두가 밥상 앞에 앉아 있을 때는 주말뿐입니다.

자식들과 밥상 앞에 앉아 밥을 먹을 때 가끔은 아버지처럼 무언가 교육이 될 만한 이야기를 해주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궁리를 하다보면 자식들은 벌써 밥상 앞에서 일어나기 일쑤입니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거의 모든 아버지는 가시고기와 같습니다. 가시고기는 수컷이 둥지를 만들면 암컷이 알을 낳고 떠나버립니다. 수컷은 홀로 알이 부화될 때까지 침입자의 공격으로부터 알을 지켜냅니다. 힘들게 알과 새끼들을 지켜내면 기력이 다해 수컷 가시고기는 죽게 되고, 새끼 가시고기들은 죽은 수컷의 몸을 먹으면서 자란다고 합니다.

요즘 현실의 아버지는 무기력하기만 합니다. 인터넷에서 떠도는 일화 중에 딸에게 줄 바나나를 먹은 죄로아내에게 혼이 난 끝에 집을 나가 홧술을 마셨다는 말이 결코 웃고 넘길 말이 아닙니다.
집 안에서 키우는 반려견인 강아지가 아버지보다 가족 순위에서 더 높다고 하는 말도 있습니다. 1순위는 자녀, 2순위는 엄마, 그리고 3순위가 아버지라고 합니다.

얼마 전에 어떤 정치인이 저녁이 있는 삶을 찾아야 한다고 외친 적이 있습니다. 저녁이 있는 삶을 정착시키려면 근로시간 단축이 선행되어야 하고, 기업은 연간 123천억 원이 넘은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정치인이 주장하는 저녁이 있는 삶을 구가하기 위해서는 근로시간을 단축해야 한다면, 가족을 위해 더 많은 돈을 벌기 원하는 아버지들은 찬성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녁이 있는 삶은 근로시간 단축에서 찾기보다는 가족 간의 따뜻한 소통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의 위상이 땅에 떨어지게 된 것은 반드시 경제적인 문제 때문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버지 스스로가 대화가 단절된 우리 안으로 걸어 들어간 결과이기도 합니다. 언제 퇴직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살얼음판 같은 세상을 살아간다 해도 가족과 짧은 대화 정도는 할 수 있습니다.

말 한마디가 천 냥 빚을 갚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이에는 백 마디 말을 하지 않아도 눈빛으로 알아듣고 행동으로 옮깁니다. 가끔 마주치는 자식들에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따뜻한 말 한마디라도 던질 수 있는 여유를 가진다면 아버지의 위상은 여전히 건재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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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한만수

1990년부터 전업으로 소설을 쓰고 있음. 고려대학교 문학석사. 실천문학 장편소설 하루등단. 대하장편소설 금강15권 외 150여권 출간. 시집 백수블루스5권 출간. 이무영문학상 수상. 장편소설 문화예술진흥위원회 우수도서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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