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정자의 존재 이유 [김홍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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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정자의 존재 이유

2017.09.22

시절이 스산하고 신세가 신산하면 흰소리가 많아지는가 봅니다. 장래가 불투명하고, 삶이 팍팍하고, 언제 어떤 재난이 닥칠지 예측할 수 없을 때 나오는 자포자기 증상일까요?
-(신부) “하늘엔 영광”……(신도) “땅에는 굴비”
-(스님) “산은 산이요”……(신도) “물은 셀프(self)로다”
경건한 기독교 미사 의식과 심오한 불교 종정의 법문을 패러디한 우스갯소리가 입에서 입으로 옮겨 다니고 있습니다. 저절로 피식 웃음이 튀어나오는 개그입니다. 

그런데 웃을 수도 없는, 한탄만 하고 있을 수도 없는 신소리가 자주 튀어나옵니다. 뼈가 있는 은유입니다.
-“탈원전으로 정전이 잦으면 어떻게 하지?”……“촛불 켜면 되지.”
-“개를 버리고 싶은데”……(유기견은) “청와대로 보내면 돼”(퍼스트 도그도 될 수 있어)
-“가계 빚이 많아서 걱정이야”……(기다려 봐) “탕감해줄 테니까.”
-“엄마, 애들이 날 왕따시키고 자꾸 때려요”……“대화로 해결해 봐라.”

왜 이런 자조(自嘲) 섞인 은유가 횡행할까요? 아마도 전후 가장 심각하게 치닫는 한반도의 위기상황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신문 제목만 봐도 한기가 들 정도입니다.
-군 출신 수뇌부 불러 모은 트럼프…사실상 ‘군사 옵션’ 점검회의(9/3)
-미 “북 전멸(annihilation)시킬 군사옵션 있다”(9/3, 제임스 매티스 미 국방 장관)
-북 수소폭탄이 용산에 떨어지면 서울 대부분 잿더미…수백만 명 사망(9/4)
-“미국과 동맹국의 방어 위해선 북한을 완전히 파괴하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이 없을 것”(9/19, 트럼프 유엔총회 연설서)

# 한반도 문제 해결에 한국이 없다

미국은 올 들어 잇단 북의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에 신경질적 반응을 보여 왔습니다. 허버트 맥매스터 백악관 안보보좌관은 처음으로 ‘예방전쟁’을 언급했습니다.(8/5) 적의 전쟁 능력이 자국보다 우위에 설 가능성이 있을 경우 공격 징후가 없더라도 먼저 공격할 수 있다는 신호입니다.
트럼프의 ‘화염(fire)과 분노(fury)’ 발언에 이어 매티스 국방장관은 “북은 '정권의 종말(end of its regime)'과 ’국민의 파멸(destruction of its people)‘로 이끌 행동을 중단하라”고 경고했습니다.(8/9) 이틀 뒤 트럼프는 “미, 군사 옵션 장전 완료됐다”고 엄포를 놓았습니다. 

일촉즉발의 현실에 우리 정부도 전례 없이 한반도가 위기상황임을 인식한 듯 대북 경고와 현무-2A 미사일(사거리 300km) 맞불 사격 등 군사 훈련을 실시했습니다.
-문 대통령 “한국은 북의 핵 도발을 조기에 분쇄하고 재기불능으로 만들 힘이 있다”(9/15)
-정의용 청와대 안보실장 “한·미·일, 2차 한국전쟁 발발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9/16, 슈피겔지 인터뷰서)
-국방부 “북 ICBM 능력 확보 최종 단계(핵탄두 60개, 소형화 성공)에 접근했다”(9/18)
그러나 15일 발사한 현무-2A 미사일은 2발 중 1발이 수 초 만에 동해에 추락, 실패했습니다.

# 문 대통령 ‘대화’인가, ‘대결’인가

현무 미사일 반쪽 실패보다 더 낭패스러운 일은 문 대통령과 청와대의 말 바꾸기와 대외 엇박자, 그리고 정부 내의 내홍입니다.
-청와대 “한반도 비핵화 기본 방침 변화 없다. 전술핵 반입도 검토한 바 없다”(9/11)
-문 대통령 “우리는 북한과의 대화를 포기하지 않았다”(9/14, CNN과의 인터뷰서)
-북 붕괴 의도 없다던 문…하루 만에 “이러면 몰락의 길, 대화 불가”(9/15, NSC회의서)
-“북 26일 발사체, 방사포 아닌 미사일”…청와대 발표 뒤집은 軍(8/28)
-문정인 (송영무 참수부대 창설 발언) “아주 잘못된 것”(9/17, 오마이뉴스 인터뷰서)
-송영무 “학자 입장서 떠드는 문정인, 특보 같지 않아 개탄스럽다”(9/18, 국회 국방위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미국엔 ‘경고’ 일본엔 ‘협박’, 한국은 ‘무시’ 전략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국치일인 8월 29일 평양 순안공항에서의 중거리 탄도미사일(IRBM) 발사 성공을 두고 김정은은 30일 미국에 “태평양 군사작전의 첫걸음”, 일본엔 “일 상공 가로지른 기절초풍할 대담한 작전”이라고 과시했습니다. 그는 이전에 문 대통령의 ‘한반도 운전자론’을 "처지에 어울리지 않는 헛소리"라고 폄하했습니다. 
진작 “한반도 문제를 우리가 주도적으로 해결할 힘이 하나도 없다”고 토로했던 문 대통령이 언감생심 ‘견인차에 끌려가는 차에 탄 운전사’(홍준표 한국당 대표 발언)가 될까 걱정스럽습니다.

문 대통령의 고뇌는 참으로 많고 깊을 것 같습니다. 미국의 가랑이 밑을 기어야 하고, 독일에서는 북 압박 요청에 ‘북한은 중국과 혈맹’이라는 시진핑의 한마디에 머쓱해지고, 푸틴으로부터는 대북 원유공급 중단 요청을 단칼에 거절당하고. 한반도에 영향력이 가장 큰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주재 대사 한 명도 아그레망을 요청하지 못하는 처지가 돼 있으니까요 .
이런 때 역사의 교훈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 몇 사람의 행적을 더듬어 보았습니다. 1천만 명의 죽음을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던 1차 세계대전에서 승리를 이끌어낸 100년 전의 클레망소와, 100년 뒤 ‘유럽의 병자’ 독일을 소생시킨 슈뢰더 이야기입니다.

# 저격범을 용서한 클레망소의 관용

국가의 명운이 걸린 제1차 세계대전, 독일과의 전쟁에서 연합군의 승리를 이끌어낸 프랑스 수상 조르쥬 클레망소(Georges Clemenceau 1841~1929). 그가 종전 직후 정치적 이념을 달리하는 한 청년의 저격을 당했습니다. 일곱 발 총알 가운데 한 발만 맞은 수상은 다행히 목숨은 건졌습니다. 수상을 암살하려던 청년은 현장에서 체포돼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수상은 청년의 사형에 반대했습니다. 큰 전쟁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 또 한 사람의 목숨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이유입니다.

그렇다고 용서해 줄 수도 없었습니다. 수상은 사법 당국에 다른 벌을 제안했습니다. 청년을 8년 동안 교도소에 가두되 사격 훈련을 집중적으로 시키라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목숨을 빼앗으려 했던 사람에게 용서와 관용을 베푼 클레망소에게 기자가 “왜 사격 훈련을 시키라고 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의 대답은 명쾌하고 애국적이었습니다. “1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프랑스에 총알 일곱 발 중 단 한 발밖에 못 맞힌 사람이 있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기 때문”이라고.

“전쟁은 반드시 이겨야 한다.” “전장의 탈영병은 무조건 총살하라.” 과격하고 독선적이기도 한 그의 성격 때문에 클레망소는 처칠 혹은 스탈린 등 상반된 스타일로 비유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의사·상원의원·언론인·내무부 장관의 다양한 경력을 지닌 그는 1919년 76세의 나이에 육군 장관을 겸한 수상에 취임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그는 전선을 시찰하던 중 “내가 죽으면 독일 전선을 향해 세운 채로 묻어라”라고 할 만큼 조국 프랑스에 대한 사랑을 잊지 않았습니다. 전후 베르사유조약 체결의 주역을 맡기도 했습니다.

# 선거 패배 감수하며 개혁 추진한 슈뢰더

‘독일 개혁의 기수’, 중도 좌파 정당인 사회민주당 출신 게르하르트 슈뢰더(Gerhard Schroeder 1944~) 전 독일연방 총리(재임 1998~2005)가 최근 한국에 왔습니다. 자서전 한국어판 발간에 맞춰 방한한 그는 각종 매체와, 대통령을 포함한 여러 인사들과의 인터뷰 면담에서 “정치지도자는 선거에 지는 한이 있더라도 국익을 위해 결단을 내려야 한다. 국가의 이익은 권력의지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집권 당시 마이너스 또는 제로 성장 상태의 독일 경제를 유럽 최대의 부국으로 회생시킨 그는 “시대를 앞서가지 못하면 시대에 잡아먹힌다”고 당시를 회상했습니다. 

2003년 발표한 슈뢰더 개혁안 ‘어젠다 2010’의 표제는 ‘혁신, 성장, 일, 지속 가능성’이었습니다. 50년간 손보지 않은 복지를 수술하고, 해고를 쉽게 하고, 실업수당 지급을 32개월에서 12개월로 줄이고, 연금 수령 시기도 늦췄습니다. 막대한 통일 비용, 500만 명에 달하는 실업자, 누적된 복지 부담에 짓눌린 경제를 살리는 채찍이었습니다. 
그는 “사회보장제도는 재정이 감당할 수준이어야 하고 미래에도 지속 가능해야 한다”며 “재정은 연구·개발(R&D)에 투입되어야 하는 돈”이라고 밝혔습니다. 이를 위해 그는 지지 기반인 노조의 격렬한 시위, 연정 상대인 녹색당과 당내 반대세력을 소통으로 설득했습니다. 

슈뢰더는 “대안도 없이 이해당사자를 참여시켜 합의를 도출해 내는 것은 시간도 많이 걸리고 과정도 힘든 어려운 일”이라며 “정치지도자는 바로 그런 일을 하라고 있는 존재”라고 못 박았습니다. 총리 재임 때 ‘제3의 길’을 선언한 것은 유럽 중도 좌파 정당들이 역점을 둔 ‘분배를 통한 정의’만으로 충분치 않다고 판단, ‘성장을 통한 분배’의 길을 택했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는 “개혁의 효과는 최소 2~3년이 지나야 나온다”며 “총리 퇴임 후 후임자 메르켈 총리가 내가 한 개혁의 과실을 수확하고 있는 셈”이라고 했습니다. 

기원전 3세기 중국 사상가 순자(荀子; 본명 荀況, 자 荀卿)의 경구는 지도자의 철학과 소신이 국가를 다스리는 데 얼마나 중요한가를 일깨워 줍니다. 
“군주가 △백성들이 자기를 위해 목숨을 바치려 하지 않는데도 군대가 강하기를 바라거나 △성이 견고하지 않은데도 적이 쳐들어오지 않기를 바라고 △적이 쳐들어오는데도 땅을 빼앗기거나 나라가 망하지 않기를 바라며 △한쪽으로 땅과 백성이 유린당하는데도 안락을 추구하는 것은 미친 삶과 같다.”
시대를 초월하는 선견지명입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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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김홍묵

경북고, 서울대 사회학과 졸업.  동아일보 기자, 대구방송 이사로 24년간 언론계종사.  ㈜청구상무, 서울시 사회복지협의회 사무총장, ㈜화진 전무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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