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든 소녀상 [안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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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든 소녀상

2017.08.31

초록으로 덮인 늦여름 늦은 오후, 강원도 평창에 위치한 한국자생식물원의 산책로를 천천히 걷습니다. 하얀 안개꽃처럼 보이는 가는 대나물이 낮게 흔들립니다. 노란 마타리가 발걸음을 가볍게 해주고 분홍빛 앙증맞은 섬쥐손이가 미소를 머금게 합니다. 그리고 보랏빛 수국을 울타리 삼은 푸른 잔디밭에 오르자 마음이 경건해집니다.

우리 꽃으로만 조성된 우리의 풍경, 이곳엔 꽃을 들고 있는 소녀상이 있습니다. 특이한 것은 브론즈로 제작된 이 소녀상만 있는 것이 아니라, 소녀에게 무릎 꿇고 절을 하고 있는 사내의 동상이 같이 있습니다. 평화의 소녀상으로 널리 알려진 부부 조각가의 소녀상이 아닙니다. 이곳 한국자생식물 김창열 원장님의 생각과 바램이 왕광현이라는 조각가의 손을 통해 발현된 새로운 소녀상입니다.

앞가르마를 하고 곱게 땋은 머리를 옆으로 늘어뜨리고 얌전히 앉은 한복 차림의 소녀상. 가지런히 모은 소녀의 두 손엔 누군가 가는 잎 혜란초를 곱게 올려놓고 갔습니다. 혜란초가 조금 시든 것 같아, 보랏빛 좀개미취를 새로이 꽂아주니 소녀의 모습에 좀 더 생기가 도는 듯합니다. 그런데 이 소녀상을 볼 때마다 자꾸 영화 <귀향>이 떠오릅니다.

일본군에 의한 위안부 피해자들의 아픈 기록, 영화 <귀향>에서도 소녀들은 꽃을 참 좋아했습니다. 머리에 꽂기도 하고 손에 꼭 쥐고 있기도 하는 등, 아름다운 것을 정말 좋아했던, 그 꽃 같은 소녀들이 처참히 짓밟혔던 모습은 몸서리가 치는 일이었습니다. 특히 제작을 했던 감독 스스로 ‘지옥도’라 표현했던 장면은 가히 충격적이었습니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컴컴한 위안소, 방이면 방마다 학대를 받는 소녀들의 모습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시각으로 길게 촬영되었던 장면은 마치 공장이 가동되는 모습이었습니다. 한 개인의 일탈이 아닌 일본군 전체의 주도하에 시스템화되어 있는 위안소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그야말로 지옥이었습니다. 

그 모진 삶을 벗어나려고 얼마나 몸부림을 쳤을까요. 영화 속 장면을 떨쳐내고 싶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마음의 평온을 가져보려 애를 써봅니다. 소녀상 곁에 놓인 작은 통나무 모양의 의자에 조심스레 앉아봅니다. 그리고 그 의자에 앉아 소녀를 향해 정중히 엎드려 절을 하고 있는, 말쑥한 양복차림의 사내를 저도 소녀처럼 내려다봅니다. 

이 사내는 누구일까요? 멍석 위에서 소녀를 향해 머리를 숙인 사내의 얼굴은 땅에 닿을 듯 낮게 엎드려 있어 얼굴이 확실히 보이진 않지만, 뾰족하고 긴 코가 특징적입니다. 그 모습은 사죄해야 할 일본의 역사이기도 하지만, 소녀들을 지키지 못하고 따듯하게 먼저 다가가 손 내밀고 위로하지 못했던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2013년 '제1회 세계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 기념 국제심포지엄'에 참석하여 일본군의 만행을 증언하셨던 하상숙 할머니가 엊그제 돌아가셨습니다. 당시 할머니는 “우리가 바라는 것은 돈이 아니라 '잘못했다'는 사과의 말이다”, “내가 그 사람들에게 잘못했다는 말을 듣기 전에는 못 죽는다.”라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할머니는 결국 분명한 사과의 말을 듣지 못하고 세상을 뜨셨지만 이렇게 소녀상으로나마 사죄의 절을 받으셨음 싶습니다. 

그보다 앞서 7월에 돌아가신 김군자 할머니의 추모비는 경기도 광주시 나눔의 집에 세워졌습니다. 추모비에는 “원하는 것은 단 하나, 돈이 아닌 명예 회복!”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습니다. 평생 모은 돈을 사회에 환원하고 가신 김군자 할머니의 실제 고향이 바로 강원도 평창입니다. 이곳 평창 한국자생식물원에 세워진 소녀상이 김군자 할머니에게도 위로가 되길 바랄 뿐 입니다.

절하는 남자상의 멍석 위에는 조정래 선생님이 자필로 쓰신 작품의 명패가 보입니다. <영원한 속죄> 저질러진 죄의 청산과 용서는 신의 은총에 의해서만 가능하겠지요? 어제는 이름을 밝히길 꺼려하셨던 또 한 분의 위안부 할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하루속히 가해자들의 진심 어린 속죄가 있기를 바라며, 이 아름다운 우리 꽃동산에서 소녀들의 깊은 상처들도 치유되어가길 바랍니다.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자유칼럼그룹은 특정한 주의나 입장을 표방하지 않습니다.

필자소개

안진의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 교수. 삶의 중심은 그림이지만 그림과 함께 일상을 풀어내는 방법은 글이다. 꽃을 생명의 미학 그 자체로 보며 최근에는 ‘꽃과 문명’이라는 화두를 붙잡고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저서 <당신의 오늘은 무슨색 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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