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의 서독(西獨)에 비추어 본다 [신현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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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의 서독(西獨)에 비추어 본다

2017.08.18

1980년대 초반 서독 괴팅겐의 Georg-August대학 중앙 맨자(구내식당)에서는 시도 때도 없이 열띤 토론이 벌어졌습니다. 주최자가 없어도 누군가가 당시 민감하게 생각하던 문제를 제기하면, 지나던 학생들이 참가하여 자유롭게 자기의 의견을 이야기했고, 상대의 발언에 질문하고 반박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가장 첨예한 주제는 ‘독일 땅에서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많은 학생들은 당시와 같이 동서진영이 독일 땅에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상황이 계속된다면, 제3차 대전도 독일 땅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다고 걱정했습니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미군이 핵무기와 함께 서독에서 철수해야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반대 입장에서는 동독에 주둔 중인 소련군과 핵무기는 어떻게 할 것이냐며 대안을 내놓으라고 했습니다. 소련군이 동독에서 물러난다고 해도, 폴란드와 헝가리 등에 있는 소련군과 핵무기를 방어할 방안이 무엇인가고 반박했습니다.

이들은 독일 땅에서 전쟁 재발 방지를 위해 서독이 주축이 되어 설립한 유럽안보협력기구(OSCE)가 있었지만 무력사용조항이 없어 독일 안보를 보장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나토와 바르샤바 조약 참가국들이 동시에 회원국이었으나 두 독일이 힘의 중심이 될 수 없다는 뜻이었지요.

학생들은 또 핵발전소도 안 된다며 운전을 당장 중단하라고 외쳤습니다. 기숙사와 자취방 창문, 자동차 유리창, 자전거 등에는 ‘핵 반대!’라는 구호가 빠짐없이 붙어 있었습니다. 핵 반대 시위도 자주 일어났습니다. 프랑스에서 재처리한 핵연료가 독일로 들어오는 것을 막으려고 온갖 수단을 다 동원했습니다. 핵연료를 실은 열차가 지나가는 철길에 자기 몸을 쇠사슬로 묶었고, 자물쇠를 채운 뒤 자물쇠를 멀리 던져버렸습니다.

자물쇠를 찾지 못하면 절단기가 동원되었고, 심한 경우에는 산소용접기로 쇠사슬을 끊은 후에야 이들을 해산시켰습니다. 바락바락 악쓰는 시위대를 경찰이 팔다리를 들어 연행하는 사진들이 보도되곤 했습니다. 경찰은 모든 폭력 시위에는 아주 단호하게 대처했지만, 평화 시위 때는 그들을 격리하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개발현장에는 반드시 환경단체가 몰려들어 자연 훼손은 절대 안 된다고 막아섰습니다. 도로, 산업시설, 공장 등을 건설할 때마다 이들이 몰려와 악다구니를 부렸습니다. 재건축이나 개축 허가가 난 건물에는 예외 없이 젊은 시위대가 들어가 무단 점거했습니다. 그러잖아도 방값이 비싼데, 새 집을 지어 방값을 더 올리면 주인은 배부르겠지만 젊은이들은 살 곳이 없어진다고 아우성이었습니다.

양당정치도 불안정해졌습니다. 정권이 교체될 때 기민(CDU)·기사(CSU) 연합과 사민당(SPD) 등 어느 진영도 과반을 획득하지 못했고, 자민당(FDP)이 가운데서 가장 큰 이권을 챙겼습니다. 자민당 당수였던 한스 디트리히 겐셔는 요리조리 붙어가면서 근 20년이나 외무장관을 독차지했습니다.

핵 폐기와 환경보호를 내세워 녹색당이 등장한 것도 1983년입니다. 그해 총선에서 1인 2표란 투표제도 덕분에 녹색당 의원들이 제4당(기민·기사를 한 당으로 간주)으로 연방의회에 처음 진출했습니다. 첫 등원하던 날, 이들은 장발에 청바지 운동화 차림이었습니다. 독일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유럽에서 가장 강성인 IG메탈 철강노조가 매년 파업을 이끌곤 했습니다. 심할 경우 3년 후의 임금인상문제를 두고도 파업을 단행했습니다. 노조 파업에 질린 기업들은 해외로 몰려 나갔고, 실업자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로 증가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은 더 많은 임금, 연금 그리고 후생비를 요구했습니다.

함부르크의 조선소들은 한국 때문에, 자동차, 전자 업종 등은 일본 때문에 망해간다는 기사가 나던 때입니다. 이들은 해외에서 상품을 생산해 독일로 들여왔습니다. 지나친 보조금 때문에 경제성장이 둔화된다는 지적이 일 때 축산농은 돼지 사육두수 이상증가와 우유 과잉생산을, 농민들은 밀 재고량 증가를 정부의 잘못으로 몰아붙였습니다. 

제과회사는 이를 기회로 삼아 쌀강정에 초콜릿을 덮어씌운 과자 이름을 ‘야판’(Japan의 독일어 발음)이라고 했습니다. 독일인들은 쌀 과자를 씹으면서 노조를 원망했습니다.

강성노조에 반대하는 국민들은 자본가들이 점잖게 앉아서 두 엄지로 돈을 세는 모습을 따라 했습니다. 해외로 나간 자본가는 아무런 손해가 없는데 국민들만 고통을 겪는다는 가슴 아픈 몸짓이었습니다. 

실업률이 치솟는 와중에도 힘들고 더럽고 어려운 일을 할 근로자는 외국에서 계속 불러들였습니다. 많은 외국인들이 독일 산업현장을 받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거리 곳곳엔 ‘외국인 나가라’는 낙서가 스프레이로 그려졌습니다. 어느 거리에는 역으로 ‘독일에서 독일인 나가라’는 웃지 못할 낙서도 있었습니다.

출산율까지 내려갔습니다. 향후 30년 이내에 독일 인구가 준다는 조사결과가 연일 발표되었습니다. 국가는 광고판에다 아이를 더 낳아야 한다고 포스터를 붙였습니다. 버스정류장 광고판에는 ‘아이 많이 낳으면 가난뱅이가 된다’는 조롱에 찬 낙서도 있었습니다. 엄마들은 첫 아이에게 50마르크, 둘째에게 75마르크, 셋째에게 125마르크를 지원하던 양육비(킨더 겔트)를 대폭 인상하고, 탁아소와 유치원을 늘리라고 들고 일어났습니다.

대학 문제도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일자리가 없자 대학에 10년 이상 적을 둔 학생들이 크게 늘었습니다. 특히 사범계는 취업 안 된 졸업자수가 엄청나 독일 전체 대학의 사범계를 폐지해야 한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대학 입학 정원을 통제하던 정부의 미래예측이 실패했다고 강하게 비난했습니다.(독일의 대학 입학 정원은 국가가 관리하던 학과와 대학이 자유롭게 관리하던 전공으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대학은 학생들의 학교 재학 기간을 축소하고, 정원을 제한하기 시작했습니다.

연금과 건강보험 재정도 문제가 생겼습니다. 실업수당과 조기연금 수급자 증가로 연금재정이 동나게 되었습니다. 진료의 대부분이 무료여서 보험재정도 위태로워졌습니다. 보험료를 올렸고, 공짜였던 약값을 2마르크씩 받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근면하며, 절약, 검소하다던 독일인들이 위에 열거한 것들을 ‘독일병’이라며 두려워했습니다.  미래를 암울하게 생각한 많은 전문직들이 해외로 이민을 떠났습니다.

해결책이 없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동독을 흡수 통일하면서 독일인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독일병이 많이 해결되었고, 20세기 말에는 노동자들을 지지기반으로 하던 슈뢰더 정부가 등장, 노동 연금 복지제도 등을 강하게 개혁하면서 21세기 세계에서 가장 강한 경제 강국이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모든 갈등의 해결책도 조만간 찾아지면 좋겠습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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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신현덕

서울대학교, 서독 Georg-August-Universitaet, 한양대학교 행정대학원, 몽골 국립아카데미에서 수업. 몽골에서 한국인 최초로 박사학위 방어. 국민일보 국제문제대기자, 한국산업기술대학교 교수, 경인방송 사장 역임. 현재는 국민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서독은 독일보다 더 크다, 아내를 빌려 주는 나라, 몽골 풍속기, 몽골, 가장 간편한 글쓰기 등의 저서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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