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자도는 부른다 [정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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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자도는 부른다

2017.08.14

제주에 와 산 지 7년 반을 넘기고 있는데도 섬 바깥 주변을 살펴볼 겨를이 없었다고 하면 한가한 변명에 지나지 않겠지요. 기껏해야, 꽃나무와 블루베리 밭 돌보는 일이 먼 발품을 파는 데 조금 장애가 되었을 뿐이지, 결국은 의지가 부족했던 게지요. 그렇게 미루다가 실행한 이번 추자도(楸子島) 탐방도 실은 서울에서 온 지인의 추동이 있었기에 가능하였습니다. 얼마전 국토 최남단의 마라도 방문 역시 해외에서 온 지인이 아니었더라면 여전히 마음의 숙제로만 남아 있었을 성싶네요.

그러니 삶에서는 아는 것 못지않게 아는 사람 즉 지인이 있다는 것이 중요함을 새삼 깨닫습니다. 추자도가 오랫동안 마음 한 구석에 자리했던 것은 전해오는 입소문과 제주도 권역에 속한다는 친밀감에 더하여 오래전 해군에 몸 담던 시절의 희미한 기억이 남아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진해에서 출항하여 가덕도(加德島)니 매물도(每勿島)니 하는 남해상의 기점(基點)들을 확인하고 제주도를 지나면 곧바로 나타나는 새로운 위치 기점이 추자도였습니다. 제주도에 살면서 새삼 추자도에 정감이 갔으며 이름부터가 왠지 스토리가 있을 듯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한반도 서남단과 제주도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추자도는 원래 전남 완도군에 소속돼 있다가 100여 년 전 제주도로 편입됐는데 사람들의 말씨로 보면 여전히 전라도처럼 느껴집니다. 조선시대 한양에서 제주도로 유배 가는 길에 유배인들을 태운 배가 식수 등 보급을 위해 경유하던 지점이기도 하지요. 본토에서 출발한 배가 강풍을 만날 때 피난하기에 좋은 위치, 좋은 지형을 갖추고 있기도 합니다. 고려 때인 1374년 탐라에 머물던 몽고군을 격퇴하러 출전한 최영 장군의 300여 선단도 가는 뱃길에 추자도에서 며칠을 머물렀으며 돌아오는 길에도 보름 정도 머물렀다고 하지요. 그런 연고로 옛 부대 주둔지에 아담하게 지은 최영사당(祠堂)이 바다를 내려다보며 묵묵히 서 있습니다.

상하 추자도에 더하여 횡간도(橫干島)와 추포도(秋浦島) 등 네 개의 유인도와 서른여덟의 작은 무인도들이 추자도를 구성하는데 바다 위에 섬들이 흩어져 있는 모습이 추자(가래나무의 열매)의 속과 같다고 해서 추자도란 이름이 생겼다는 설이 있는 한편, 섬에 추자나무가 많아서 그렇게 이름지어졌다는 설이 있지요. 어느 설이 맞는지 한갓 여행자로서 말하기는 주제넘은 일이지만 저는 전자에 힘을 실어 주고 싶습니다. 오늘날 추자도에서 추자나무를 거의 볼 수 없기도 하지만 추자의 형상으로 돼 있다는 발상이 더 멋스럽게 다가오기 때문이지요.

우리 일행이 방문한 날은 하지 바로 다음 날로 안개가 제법 낀 날씨였습니다. 하추자도에 마련한 숙소가 높은 지대라 그곳에서 엷은 안개 속으로 내려다보이는 바다와 섬들의 모습이 한 폭의 그림처럼 담담하였습니다. 발 가는 대로 올레길을 걷다가 최영사당에서 멀지 않은 상추자 등대공원에 앉아 쉬면서 희뿌연 안개 너머로 크고 작은 섬들이 퍼져 있는 모습에서 추자 속을 그려 보았습니다. 멀지 않게 보길도가 보일 듯 말 듯, 가물가물한 섬들의 풍광이 아득하였습니다.

상하 추자도 해변과 포구 어디를 가도 정말 청정 바다임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답니다. 선착장까지도 쓰레기나 유류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고 해안 아무 데서나 사람들이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는 모습 또한 특별한 풍경이죠. 추자도는 낚시 천국으로 알려져 있는데 아닌 게 아니라 제주를 왕래하는 배에서 수많은 태공들이 묵직한 장비를 들고 오르내리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완도에서 오는 배들도 그럴 테지요. 낚시질이 서툰 필자로서는 낚싯대를 사 놓고도 못 잡고 돌아오면 웃음거리가 될 것 같아 제주에선 좀처럼 낚시하러 가지 않지만 추자도라면 다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도미류와 농어가 많이 잡힌다고 하지요.

사실 추자도의 물고기에 관해 얘기하려면 이런 어종보다는 참조기를 말해야 합니다. 어업이 인구의 80%를 차지하는 추자도는 조기잡이로 오래 이름을 떨쳐 오다가 근래에 와서 그 명성이 빛을 잃었죠. 회유성인 조기 떼가 남쪽에서 추자도 근해로 몰려와서 흑산도를 거쳐 북쪽으로 이동하다가 산란을 위해 연평도로 올라갑니다. 지금은 아니지만 한때 우리나라에서 조기철에는 추자도에서 잡는 참조기들이 영광으로 가서 볕에 잘 말려져 영광굴비란 이름으로 전국 각지로 팔려 나갔다고 합니다. 한창 때인 1980년대에는 인구가 8천명 가까이 되었는데 지금은 점차 줄어들어 1,800여 명 수준이지요. 조기잡이 주 어장이 형편이 더 좋은 제주로 내려간 것이 주된 이유라 합니다.
 
지금도 멸치잡이는 성업인데 추자십경(楸子十景) 중 추포어화(秋浦漁火)가 멸치와 관련된 사연을 담고 있지요. 멸치 철 추포도 주위에 멸치 떼가 모이는데 어두운 밤 멸치잡이 뜰망을 내리는 수많은 어선들의 불빛이 장관을 이루곤 한답니다. 어화(漁火)라! 검푸른 밤 바다에 멸치 떼를 유인하려 밝힌 휘황한 불빛들일 뿐이지만 나름 낭만이 밴 멋진 말이죠. 멸치잡이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어획 작업은 밤에서 다음 날 새벽까지 이어지는 게 보통이어서 어민들의 삶은 참으로 고단할 터입니다. 그래도 추포어화처럼 멋과 여유가 있는 말을 만들어낸 추자인들이 살갑게 느껴 집니다.멸치 떼는 산란기에 추자도로 몰려드는데 통통하게 알이 잘 밴 멸치를 액젓으로 담그면 포도주처럼 붉은 빛이 돈다고 자랑을 하기도 한답니다.

추자십경 중 또 하나는 고도창파(孤島蒼波)로, 관탈섬 부근의 푸른 물결이 세상 인연을 지워버릴 듯 무심히 너울거리며 흐르는 모습을 일컫는 말입니다. 관탈섬은 추자도와 제주도 사이에 있는 섬으로 그 이름의 유래에 역사가 배어 있습니다. 모자 관(冠)에 벗을 탈(脫), 말 그대로 모자를 벗는다는 뜻인데 유배 오는 고관들이 이 지점을 지나면서 과거의 영화를 잊고 평범한 사람으로 돌아온다는 것이지요. 관탈섬의 너울거리는 푸른 물결을 보면서 세상과의 인연을 지워버리고 유배 생활을 감내할 각오를 했을 법합니다.

추자도 올레 코스(제주 올레 18-1)를 걷다 보면 바닷가 언덕으로 향하는 길목에 ‘황경한의 묘’라는 안내 팻말을 만나게 됩니다. 황경한(黃景漢)이란 생소한 이름은 다름 아닌 황사영(黃嗣永, 1775~1801)의 아들을 말하죠. 1801년 황사영의 백서(帛書) 사건으로 인한 신유박해(辛酉迫害, 또는 辛酉邪獄) 때 황사영 본인은 순교하고 부인이자 정약현(丁若鉉)의 맏딸인 정난주(丁蘭珠, 마리아)는 제주 대정현 관노로 떠납니다.

정난주는 두 살배기 아들을 데리고 가는데 어미를 따라 노비의 멍에를 질 아들에게만은 양민의 신분을 지켜주려고, 타고 있던 배가 추자도에 머무는 동안 섬에 내려서 이름, 생년월일과 함께 아이를 갯바위 한켠에 놓아두고 옵니다. 배에 돌아와서는 아이가 죽은 것으로 하여 관원들의 이해를 구했다고 합니다. 마침 그 부근을 지나던 어부 오씨 부부가 멀리서 우는 아이 소리를 듣고 와서 젖을 먹여 울음을 달랜 후 데려가서 키웠다고 합니다. (오씨 부인은 아이가 없어 젖이 마른 상태지만 아이를 보고 젖이 나왔다고 전함)

그 갯바위 자리에 지금은 커다란 철제 십자가가 세워져 있는데 ‘눈물의 십자가’로 불립니다. 황경한은 자라면서 어머니를 잊지 못해 제주에서 들어오는 배편마다 어머니의 안부를 전해 듣기도 하고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는데 이 모든 것을 아무도 모르게 숨겨야 했던 모자의 사연은 애절하기만 합니다. 황경한의 삶에 대해서는 그다지 특별한 이야기가 전해 오진 않지만 그는 오씨 부부의 다른 자녀들과 함께 자랐기에 그 이후부터 추자도에서 황씨와 오씨는 서로 혼인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모자가 겪은 비극이 당시 숨 막힐 만큼 서슬 퍼렇던 기독교 박해로 인한 것이니 굴곡진 우리 역사의 한 가닥이라 할 만합니다. 황경한의 묘는 오늘날 가톨릭인들의 순례지가 돼 있으며 아버지 황사영의 순교를 기리는 제천의 배론(排論) 성지, 제주 대정현의 어머니 정난주의 묘와 함께 황씨 3대 성지로 알려져 있기도 하죠.

추자도 여기저기서 뜻밖의 사연들을 만나기도 하면서 무턱대고 걸어다니다가 만난 예초리 마을 해안 둑에서 두 개의 긴 밧줄에 계류되어 등대 쪽을 향해 서 있는 작은 어선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습니다.외로워 보였지만 얕은 바다에 홀로 떠 있는 모습이 고즈넉하였습니다. 맑디맑은 바닷물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1박 2일의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여객선에서 보니 옅은 안개로 덮인 바다에 신비롭게 서 있는 섬들이 우리에게 다시 오라고 무언의 몸짓을 하는 듯했습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이 칼럼을 필자와 자유칼럼그룹의 동의 없이 상업적 매체에 전재하거나, 영리적 목적으로 이용할 수 없습니다.

필자소개

정달호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후 줄곧 외교관으로 일했으며 주 파나마, 이집트대사를 역임했다. 은퇴 후 제주에 일자리를 얻는 바람에 절로 귀촌을 하게 되었고, 현재 제주평화연구원 객원연구위원으로 있으면서 한라산 자락에 텃밭과 꽃나무들을 가꾸며 자연의 품에서 생활의 즐거움을 찾는다.

게스트칼럼/박대문

아시나요, 사할린의 망향탑을.

일제 강점기에서 벗어나 해방을 맞이한 지 72주년이 되는 8·15 광복절이 다가옵니다. 광복절은 기쁨과 동시에 남북 분단의 시점이 되는 슬픔도 함께 기억하지 않을 수 없는 날입니다. 말할 것도 없이 남북 분단이라는 역사적 사건은 정치, 경제, 문화 등 사회 전반에 걸친 국가적 문제입니다. 더불어 이산가족 간의 슬픔과 한스러움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지울 수 없는 마음의 상처이기도 합니다. 우리 꽃을 사랑하고 보고 싶어서 우리 산들꽃을 찾는 꽃쟁이들에게도 커다란 아쉬움이 있습니다. 우리 식물도감에 실려 있는 우리 꽃이지만 만나볼 수 없는 꽃이 있습니다. 북한에서만 자생하는 우리 꽃들입니다. 우리 땅이지만 가볼 수 없는 북한 땅이기에 우리 꽃을 만나 볼 수 없습니다. 고향에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고,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는 월남 이산가족과 같은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가볼 수 없는 북한에만 자생하는 우리 꽃을 만나보기 위해서는 연변, 연해주 또는 사할린 등 북한 주변국을 찾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북한에 자생하는 우리 꽃을 찾아 사할린과 쿠릴열도에 다녀왔습니다. 오는 길에 유즈노사할린스크 남쪽 항구에 있는 코르사코프의 망향탑을 들렀습니다. 재작년 꽃 탐방 와서 사할린 이중징용 광부의 한 서린 역사적 사실을 들어 알게 되었습니다만 그때 바로 코르사코프 망향의 동산에 들러 망향탑을 참배할 수가 없어 무척 마음 아팠습니다. 이번에는 꼭 들르겠다고 처음부터 탐방 일정에 포함했지만, 쿠릴열도에 가서 기상 관계로 비행기가 결항한 탓에 일정이 흐트러졌습니다. 하는 수 없이 한국으로 돌아오는 날 원하는 네 명이 탐사대 일행에서 빠져나와 다른 일정을 제치고 부랴부랴 사할린의 망향탑을 급히 다녀왔습니다.

코르사코프 항구를 내려다보는 나지막한 언덕에 조그만 나룻배를 본뜬 파이프 조형물이 외롭게 서 있었습니다. 언덕에서 바라보니 오호츠크 해의 탁 트인 너른 바다가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멀리 수평선 너머가 바로 동해입니다. 기념탑이 서 있는 곳은 썰렁한 도로와 아파트 몇 채만이 있는 한적한 동산 언덕이었습니다. 기념탑 주변에는 아무런 시설도 없었습니다. 다만 기념탑 양옆 땅바닥에 비문이 새겨진 돌판이 놓여 있을 뿐이었습니다. 비문에는 하늘도 슬픔을 아는 양 잔뜩 흐린 날씨에 비가 내려 임들의 눈물처럼 빗방울이 방울방울 맺혀 있었습니다. 손수건을 꺼내어 비문에 맺힌 빗물을 닦아내고 비문을 읽어가다가 울컥 목이 메 끝까지 소리 내어 읽지를 못했습니다. 

이 망향의 언덕은 사할린 동포에게 통곡의 땅이요 한 서린 죽음의 언덕입니다. 일제 강점기에 징용으로 사할린에 끌려온 동포들이 1946년 통계에 따르면 4만 3천 명이었다고 합니다. 일본의 항복으로 전쟁이 끝났고 대한민국은 해방되었습니다. 멀리 사할린에 끌려간 동포들은 패전국 전범의 국민인 일본인들보다 앞서 고향으로 돌아갈 것으로 굳게 믿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1946년 ‘미소 귀환 협정’으로 일본인 30만 명의 귀국이 개시되었지만 사할린 한인들은 일본인이 아니라서 귀국 대상에서 제외되었습니다. 다음 해 1947년, 중국인(대만인)도 조국이 보낸 귀환선을 타고 모두 돌아갔습니다. 먼저 귀국하리라는 희망에 부풀어 있던 사할린 한인의 귀국의 꿈은 한낱 희망일 뿐이었습니다. 소련과 국교가 없고 반공 이념에 몰입된 대한민국은 이들을 찾을 여건과 경황이 없었고 강제로 끌어간 일본은 나 몰라라 팽개쳤습니다. 일본으로부터 사할린을 양도받아 노동력이 필요한 소련은 한인의 억류가 오히려 필요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들은 누구의 도움도 없이 버림받은 국적 미아가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귀국의 꿈에 부푼 징용 한인들은 사할린 전역에서 물밀 듯이 모여들어 망향의 언덕을 가득 메웠다고 합니다. 해방된 조국이 반드시 찾아 주리라는 굳은 믿음으로 끝내 오지도 않는 귀국선을 무작정 기다리기만 했다고 합니다. 8월이 지나면 차가운 얼음 땅으로 변하는 사할린 땅에서 하릴없이 수평선 너머 까만 배 한 척만 보면 행여 조국이 보낸 귀국선일까? 까치발, 모둠발 치켜세워 눈 비비며 언덕으로 올라가 하염없이 지나가는 배만 쳐다보다가 얼어 죽고 굶어 죽고 미쳐 죽은 한 맺힌 망향의 동산입니다. 이곳에 초라하나마 망향탑이 세워진 것도 불과 10년 전인 2007년 10월 1일이었습니다. 국가도 아닌 가스 플랜트 공장을 짓기 위해 사할린에 진출한 대우건설의 지원으로 세워졌다고 합니다. 

끝내 목이 메어 다 읽어내지 못한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배를 세우는 뜻은/1945년 8월 애타게 그리던 광복을 맞아/동토 사할린에서 강제 노역하던 4만여 동포들은/고국으로 돌아가기 위해/이 코르사코프 항구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이제는 일본 국적이 아니라는 이유로/이분들을 내 버린 채 떠나가 버렸습니다./소련 당국도/혼란 상태에 있던 조국도/이들을 돌보지 못했습니다.// 짧은 여름이 지나 몰아치는 추위 속에서/이분들은 굶주림을 견디며/고국으로 갈 배를/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이윽고/혹은 굶어 죽고/혹은 얼어 죽고/혹은 미쳐 죽는 이들이 언덕을 메우건만/배는 오지 않아/하릴없이 빈손 들고/민들레 꽃씨 마냥 흩날려/그 후손들은 오늘까지 이 땅에서/삶을 가꾸고 있습니다.//조국이 해방되었어도/돌아갈 길이 없어 /아직도 서성이는 희생 동포들의 넋을 /조국으로, 세계로 자유롭게 /모시려는 뜻을 모아/이 “망향의 언덕”에 /단절을 끝낼 파이프 배를 하늘 높이 세웁니다. // 글 : 김 문환

정부도 하지 못한 사할린 동포와 교민의 눈물을 씻어주고 숙원사업을 해낸 대우건설이 참으로 고맙게 여겨졌습니다. 국내의 대기업이 해외에서 영업 활동을 하고 이름을 떨치는 것이 바로 국위를 선양하는 일이라는 것을 새삼 느꼈습니다. 남북 이산가족의 재회의 기쁨과 설움의 격정이 고스란히 드러났던 2000년 8·15 광복절의 첫 남북 이산가족 상봉 행사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남북 간의 사이는 갈수록 멀어져 가는데 올해도 어김없이 8·15는 다가옵니다. 우리에게 잊혀 가는 사할린 동포의 애환과 서러운 과거사를 누가 기억이나 해 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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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나요, 사할린의 망향탑을 

   
가련다.
나는 가야 한다.
해방된 조국 찾아 
고향 땅 부모, 형제 찾아
머나먼 얼음 땅 
앞길 막힌 탄광 막장 
눈물 빵에 목멘 징용 생활 끝내고.


복음 같은 해방 소식에
미치도록 기뻐했던 사할린 징용 광부
조국 가자, 고향 가자.
사할린 전역에서
물밀 듯이 찾아온 남쪽 항구 코르사코프,


패전국 일본 거주민, 귀환선 타고 떠나고
함께 끌려온 중국인, 고향 찾아 떠났는데
해방 맞은 한국인만 귀국선 소식 깜깜했네.
러시아도 일본도 알 바 없다 손사래 치고
조국 대한민국은 나 몰라라 손 놓고.


하릴없이 눈 빠지게 귀국선 기다리던 
오갈 데 없는 사할린 징용 동포들
바다 끝에 까만 배 한 척 보일 적마다 
행여 우릴 찾는 귀국선 아닐까
까치발 서다 모둠발 서다 더 높은 언덕에 올라
애타게 목메어 기다리다, 부르다
굶어 죽고, 얼어 죽고, 미쳐 죽은
한 서린 동산, 코르사코프 언덕


임들의 흔적 바람처럼 사라지고
가녀린 한 조각 파이프 배 한 척
외롭고 쓸쓸히 그 자리에 서 있네.
이국 하늘 떠도는 외로운 혼이나마
고국산천 모셔갈 나루터 쪽배처럼.


코르사코프 언덕에 높이 솟아
오늘도 외로운 원혼을 달래는 쪽배 한 척
사할린 망향의 동산, 망향탑을 아시나요.
아직도 마르지 않고 남아 있는
사할린 동포의 눈물을 아시나요.

   
(2017. 8. 5. 사할린 코르사코프 망향탑 앞에서)

필자소개

박대문

환경부에서 공직생활을 하는 동안 과장, 국장, 청와대 환경비서관을 역임했다.우리꽃 자생지 탐사와 사진 촬영을 취미로 삼고 있으며,
시집 『꽃벌판 저 너머로』, 『꽃 사진 한 장』, 『꽃 따라 구름 따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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