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스 교향곡 (An Alpine Symphony)-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전세계적으로 좀처럼 연주되기 힘든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교향곡 4번 내림 나단조 '알프스' Op.64

An Alpine Symphony, Eine Alpensinfonie


   ‘그게 어딜 봐서 독일,오스트리아의 음악이냐?’ 이른바 독일인 식자층 중의 일부는 아직도 구스타프 말러의 음악을 이렇게 말한다. 급변(急變)이 들끓고, 골조보다는 격변(激變)하는 감정이 전면에서 포효하는 그 절규의 교향악은 적어도 독일인의 정서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말러를 보헤미아의 혹은 슬라브의 교향악이라 칭한다. 대신 이들이 사랑하는 음악은 브루크너의 교향악과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관현악곡 그리고 오페라이다. 




특히 후자가 문제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유명하고 중요한 작곡가라는 것은 모두들 아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좀처럼 연주가 되지 않는다. 그건 미국에서도 마찬가지다. 말러는 몰라도 슈트라우스는 정말이지 연주가 힘들다. 이렇게 표현하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 말러식의 절규와 비통은 세계 만국의 언어가 될 수도 있지만, 수백 년의 역사와 전통에서 흘러나오는 특유의 고고한 세련미와 우아함은 그러니까 지극히 슈트라우스적인 그 음악의 아름다움은 너무도 독특하고 또 차원이 다른 고원한 경지이기도해서 전 세계인이 공감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 분명히 있다. 한마디로 그는 철저히 특정한 시대와 로컬의 정서를 노래한 지방의 음악가인데, 하필이면 그 ‘지방’이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클래식의 본고장인 독일과 오스트리아라는 게 또 문제다. 


여름철이면 생각나는 최고의 슈트라우스의 음악으로는 역시나 <알프스 교향곡>이 최고다. 독일의 최고봉인 추크슈피체가 있는 고향땅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에서의 경험이 진하게 녹아 있는 대단히, 아니 지나치게 개인적인 교향악이다. 


그 음악은 산자락 마을에서 이른 새벽에 출발한 작곡가가 1박 2일에 걸쳐 알프스의 준령(峻嶺)을 탐색하듯 등반하는 스토리를 시시콜콜 따라가고 있다. 사실 예전에는 별반 공감이 가지 않는 곡이었다. 특유의 화려하고 과포화된 음향이 있지만, 가령 해돋이 장면은 너무 작위적이고, 꽃이 피어난 들판을 묘사하는 부분에서도 별반 감정이 울림이 전해지지 않았다. 그러다 작년에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의 바이에른 알프스 산정을 올라가보고서야 알았다. 아, 이 경치, 이 산을 그대로 표현한 음악이구나. ‘빗자루 하나라도 완벽하게 음악으로 묘사할 수 있다’는 슈트라우스다웠다. 들판의 작은 디테일과 빛의 움직임, 맑지만 심심한(심지어 지루하다고도 할 수 있는) 산간마을의 분위기까지 그대로 음악으로 살렸다. 


(이른 새벽(아직은 어둠이 짙은 밤)에 마을을 떠나 어둑한 들판 길을 따라 조심스레 산행을 시작한 작곡가

는 곧 험준한 바위산 사이로 급박하게 치솟는 태양을 보고 커다란 감격을 느낀다. <알프스 교향곡> 

제1,2곡 밤(Nacht)과 일출(Sonnenaufgang). 카라얀 지휘, 베를린필)


그의 <알프스 교향곡>은 이 마을, 이 산의 크고 작은 이야기를 그대로 직접 묘파해놓은 음악이었다. 그래서 뭐, 사실 별 볼일 없는(?) 작품이다. 그냥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한 치의 뒤틀림도 없이 그대로 옮겨 놓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시에 가장 위대한 대서사시이기도 하다. 바이에른 알프스의 산정에서만 느낄 수 참으로 ‘독일적인’, 그 맑고 구김 없는, 자연의 위대함에 대한 겸허하고도 순박한 절대적 찬사를 완벽한 음악으로 노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알프스교향곡> ‘정상에서 Auf dem Gipfel’ 중 오보에 솔로. 작곡가는 산 정상의 거대한 경이를 보고 난 

후 일순간 몰려오는 평화롭고 소박한 만족감을 고적한 오보에 솔로로 절묘히 표현했다. 오보이스트 

알브레히트 마이어가 이 부분을 완벽하게 연주한다.)


슈트라우스를 듣기 위해서는 몇 가지 준비가 필요하다. 먼저 최고의 지휘자와 오케스트라다. 슈트라우스만은 그래야한다고 믿는다. 어중간한 연주로는 그 음악의 극치를 느낄 수 없다. 북받치는 감동을 주는 엄청난 연주와 그저 그런 밋밋한 연주 둘 만이 존재할 것이다 – 적어도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음악에 한해서만은. 그리고 웬만하면 콘서트홀에서 실연으로 들어야 한다. 도저히 사정이 힘들다면, 좋은 스테레오 레코딩 음반을 음장감이 훌륭한 스피커로 즐기는 게 좋다. 저 멀리서 아련히 들려오는 호른의 사운드, 첼로의 활 튕김 소리, 클라리넷의 먹먹한 버튼 사운드가 모두 들려야만, 최소한 ‘슈트라우스적인 분위기다’라고 말할 수 있다.


슈타츠카펠레 드레스덴의 수장인 크리스티안 틸레만은 말러에는 눈길 한번 주지 않는 지휘자이다. 그는 오로지 바그너, 브루크너,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에 천착한다. 그래서 독일 보수층들의 열광적인 찬사를 받고 있고, 동시에 유럽 외에서는 (특히 미국에서는) 별반 인기가 없다. 연주하는 레퍼토리도 어렵거니와, 해석이 까칠하고 디테일에 대한 집착이 지나치게 강해 한 번에 음악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 면도 있다. 해당 작품의 악보를 들고 따라가며 듣거나, 작품의 구석구석까지 미리 완벽하게 이해를 하고 있는 사람만이 그의 음악작업에 대한 호불호를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다. 이 디테일리스트가 가장 완벽하게 다루는 작품이 <알프스교향곡>이다. 빈 필과 정식 스튜디오 레코딩 음반을 남겼고,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와의 실황은 고화질의 영상으로도 나와 있다. 특히 후자의 연주는 정말 기적에 가까운 완성도를 자랑한다. 


독일인들의 그 무뚝뚝하면서도 겸허한, 대자연에 대한 찬사와 소박한 콧노래가 섞인 흡족함을 틸레만의 연주보다 더 세밀하고 날카롭게 표현한 연주도 없을 것이다. 그의 <알스프교향곡>을 들으며 힘겨운 무더위를 잊어보려고 한다. 위대한 예술이 지독한 무더위보다 한발 앞서가기를 빌면서. 


(<알프스교향곡> 크리스티안 틸레만 지휘, 빈필하모닉. 2011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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