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들다 보니 ‘낡다리’가 되었네! [정숭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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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들다 보니 ‘낡다리’가 되었네!

2017.08.02

나이는 들어가는데 말하고 싶은 충동이 갈수록 더 심해지니 이걸 어쩌지요? 어제만 해도 그랬습니다. 사무실 동료들과 점심을 먹었는데, 커피 입가심까지 하고 나서 보니까 내가 제일 떠들었더라고요. ‘늙어 존중(존경이 아닙니다!)받으려면 후배 존경(존중 아니고 존경이 맞습니다!)부터 할 것이며, 그 시작은 말은 덜 하고 듣는 척부터 하면서, 사이사이 미소를 띠는 것이려니’라는 환갑 이후 처세훈(處世訓) 제1조를 지키지 못했다는 말씀입니다.

어제 점심때 모습을 옮겨보겠습니다. 저 포함 다섯 명, 모두 신문기자로 청춘을 보낸 이들입니다. 아는 것 많고 말도 잘 하고 환갑 전후지만 나보다는 아래입니다.

메뉴가 강원도 향토식 곤드레밥이었으니 대화 첫 주제는 강원도 음식이었습니다. 강원도 산골 음식이 대체로 건강식이라는 데에 이야기가 미치자 건강이 주제가 됐습니다. 당연히 다음 주제는 운동이 됐지요. 그다음엔 만인의 운동인 등산으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그랬더니 누가 서울 서촌-누상동, 누하동, 옥인동 등-쪽에서 인왕산을 올랐더니 참 좋더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누상동의 누자가 ‘누각 루(樓)’일 텐데, 거기 무슨 루가 있었나?”라는 질문이 끼어들었습니다. 스마트폰으로 검색을 한 사람이 대답을 하려는데, 다른 동료가 “옛날에는 기사 쓸 때 동(洞) 이름 같은 지명은 전부 한자로 썼는데, 한자를 안 썼더니 다 까먹었네 …”라고 새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러자 다른 이가 “이름도 한자로 썼잖아요. 모르는 한자 나오면 한글로 써놓고 나중에 찾아 적던 기억이 나네요.”라고 했습니다.

점심을 잘 먹고 바로 옆 커피집으로 옮겼습니다. 몸이 좀 굵은 친구가 앉으면서 “너무 먹었네. 배가 왜 이리 부르냐”고 하니까 맞은편에 앉은 친구가 “저녁을 덜 먹으면 되지. 점심은 괜찮다고 하잖아?”라면서 전화기를 테이블에 꺼내놓습니다. 배가 부르다는 친구가 “전화기 손에 꼭 잡고 있으라구. 어제부터 전화를 막 시작했다는데 …”라고 했습니다. 

장·차관 인사 끝났으니 기관장, 위원장 인사가 시작됐다는 이 농담을 시작으로 대화는 저마다 주워들은 하마평에서 정치, 경제 이야기로 넘어갔다가 어느 순간 그것도 시시껄렁해지자 “자 이제 올라갑시다”라는 사무실 책임자 후배의 말로 끝났습니다.

이 모든 이야기에 모두 끼어든 건 나밖에 없습니다. 강원도 음식 이야기를 할 때는 “옹심이는 맛있지만 올챙이국수는 아니더라”고 품평했으며, 운동을 너무 많이 해서 무릎이 망가진 사람 이야기에는 “수영이나 자전거를 하면 ‘도가니’가 좋아진다던데?”라고 아는 척했고, 서촌 쪽 인왕산 이야기가 나올 때는 “자꾸 끼어들어서 미안한데”라며 처세훈을 염두에 둔 전주(前奏)까지 넣은 후 “나 중학교 때, 50년도 전이구만, 거기에 운크라(UNKRA)라고 유엔 원조기구가 쓰던 예쁜 건물이 있었어. 일제 때 친일파 갑부가 지은 고딕식 건물이었지. 언제 철거됐는지 모르겠네”라고 나섰습니다. 기자로 일할 때 어려웠던 한자는 지명에서는 부산 영주동의 ‘바다 영(瀛)’자, 사람 이름에서는 ‘떳떳할 이(彛)’자, ‘아름다울 의(懿)자’ 같은 거였다고 했지요. 

저녁을 덜 먹어야 한다는 말에는 “요 며칠은 덥고 해서 해 빠진 뒤 운동 삼아 좀 걸어서 분식집에 가서 어묵, 떡볶이, 순대, 김밥으로 때웠더니 싸고 좋더라, 위에 부담도 안 가고. 와이프도 좋아하고”라고 대꾸했고, 청와대 전화 농담으로 대화가 이어지자 “지난 대선 때 지금 대통령 캠프에서 뛰었던 사람을 아는데 말이야, 잘 안 풀리는지 마음고생이 좀 있는 것 같더군”이라며 동료들이 한 토막씩 꺼내는 하마평에 직접 들은 이야기를 한 자락 얹었습니다. 

그런데, 떠들 때는 잘 떠들었는데, 곧 후회가 시작됐습니다. 말을 하려다가 내가 먼저 나서는 바람에 입을 열다 말고 닫아버린 동료들 모습이 떠올라서였지요. 말이 '후배'이지 딴 데서는 존중도 받고 존경도 받을 사람들인데…. 

어쨌거나 나이 들면 왜 말이 많아지나요? 아시는 분 있습니까? 나는 나이 들수록 ‘아는 것과 경험한 게’ 많아진 데다, ‘좀 떠든들 어때? 평생 조용조용 남의 말 들으면서 살아왔잖아’라는 심리, ‘나도 할 말 좀 하고 살자’는 어쩌면 좀 뻔뻔해진 태도가 이유일 거라고 생각해봅니다.

내 생각이 맞다면, 앞으로도 말이 더 많아질 것 같습니다. 시간이 전보다 더 많아지고, 새로 보고 듣고 느끼는 것도 매일 늘어나는데 그걸 안 뱉어내고는 견디기 힘들 테니까요. 그런데도 모든 젊은이들은 모든 노년들이 말을 덜 하기만 바라니!

마지막으로, 나이 듦에 대한 경구(警句) 몇 개를 뱉어봅니다. 
‘나이가 들면 사람은 많은 것을 위장할 수 있지만 행복만은 그렇게 할 수 없다.’-보르헤스 
‘노년기를 좋게 보내는 비결은 다름이 아니라 고독과 명예로운 조약을 맺는 것이라는 사실을 겨우 깨달았다.’-마르케스
‘새파란 젊은이들 사이에서 그는 이미 늙다리였을 뿐만 아니라 훨씬 더 한심한 존재, 즉 '낡다리'가 되어 있었다.’-루슈디
'나일리지(마일리지-Milage-가 아닙니다)를 챙기기 시작하면 이미 낡다리이다.'-신원불상 한국 노인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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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정숭호

1978년 한국일보 입사, 사회부 경제부 기자와 여러 부서의 부장, 부국장을 지냈다. 코스카저널 논설주간, 뉴시스 논설고문, 신문윤리위원회 전문위원 등 역임. 매주 목요일 이투데이에 '금주의 키워드' 집필 중. 저서: '목사가 미웠다'(2003년), '트루먼, 진실한 대통령 진정한 리더십'(201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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