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의 기사(はるきの 騎士)


하루키의 기사


“집에서 20분 거리에 단골 마트가 있고 

거기서 일본맥주와 새우, 게롤슈타이너 탄산수를 반드시 구입한다.

커피는 에스프레소와 핸드드립을 기분에 따라 섞어 마시며

연식이 오래된 독일차를 몰고

주말에는 김밥을 먹으며 소설책을 읽는다.


비싸지 않은 영국제 스피커로 음악을 듣고

LP와 진공관이 자아내는 따뜻한 음색에 별다른 향수(鄕愁)가 없으며

음반과 책이 일정량 이상으로 늘어나면 대개는 처분해 버린다.


늦은 밤에는 면세점에서 산 위스키나 와인을 마시며

오페라를 듣거나 보다가 잠이 든다.”


언젠가 (아마도 괜한 심술에 젖어) ‘하루키 스타일’(?)로 나의 평범한 일상을 적어본 적이 있었다. 서울에 사는 이름 없는 아저씨의 삶도 이렇게 크고 작은 세밀한 루틴과 굴곡진 기호(嗜好)로 가득 차 있거늘, 하물며 작가라는 양반이 왜 이 세상의 거의 모든 것을 – 클래식과 오페라, 재즈와 올드팝, 싱글몰트와 수동기어 자동차, 심지어 일상의 어떤 쓸모없는 불편함까지도 - 고도의 문학적 선망으로 자꾸만 승화시키는가에 대한 어떤 치기어린 짜증 같은 게 있었던 모양이다.


Mozart’s Don Giovanni in Prague in 1787. 출처 macaulay.cuny.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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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하루키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때는 아마도 독일 작가들에게 잔뜩 빠져 있었을 때였다. 일방적인 선망(羨望)이라고 불러도 좋다. 후덥지근한 여름 물안개처럼 펼쳐진 그 중문(重文)과 복문(複文)의 질식할 것 같은 두텁고 복잡한 세계 속에서 한참을 허우적거리며, 절망보다 더한 환희를 느꼈다. 절묘한 조사(助詞)의 꺾임과 여백으로 가득 찬 담백한 댄디함의 ‘하루키 월드’에 전혀 동화될 수 없었다. 귄터 그라스의 끈적함에, 하인리히 뵐의 숨 막히는 분위기에 매료되었고, 또 언젠가는 나도 토마스 만을 단숨에 읽어 내리라는 그런 희망에 들떠 있기도 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났다. 혹은 세월이 흘렀다. 하루키는 나이가 들었고, 나 또한 (다행히도) 조금은 철이 들었다. 그의 신작 <기사단장 죽이기>를 그렇게, 한없이 매료(魅了)되어서 읽었다. 


나온 지 며칠 되지 않은 따끈한 소설책이다. 아직 읽지 못하거나 읽지 않으신 분들이 더 많을 것이다. 그러니 이른바 ‘스포’는 자제하려고 한다. 그래도 뻔한 건 있다. 여러 곳의 미디어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무슨 대단한 역사 문제를 정면으로 건드리는 소설이 아니다. 애초 하루키는 그런 방식의 이야기꾼이 아니며(예전 같았으면, 하루키는 그럴 수준이 못 된다 – 라고 말했을 것이다), ‘노벨상을 노리고 과거사 문제를 건드렸다’는 천박한 인상비평에는 일종의 역겨움마저 느꼈다. 


대신 음악 이야기를 해보자. 그의 다른 소설들에서처럼 이번 작품에도 다양한 음악들에 대한 언급이 자주, 그리고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제목인 ‘기사단장’ 자체가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 조반니>의 코멘다토레(Commendatore,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기사장’으로 칭하지만)에서 따온 것이다. 돈나 안나의 아버지인 기사장이 돈 조반니와의 결투 끝에 그의 칼에 목숨을 잃는 오페라의 첫 장면은 소설 속에서 어떤 회화 작품으로 치환되어 내내 중요한 모티브로 작동한다. 


(모차르트 <돈 조반니> 중 기사장과 돈 조반니의 결투 장면. 3분 11초부터. 푸르트벵글러가 지휘하고 

지난 세기 ‘빈 앙상블’의 핵심들이 모두 출동한 귀한 연주다.)


소설 속에는 또 한 명의 ‘기사’가 언급된다. 주인공 남자들이 LP를 꺼내 수시로 즐겨듣는 작품의 제목이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장미의 기사 Der Rosenkavalier> 말이다. 책 속에서 두 번 정도 길게 언급된다.


“<장미의 기사>는 묘한 오페라입니다. 물론 오페라니까 줄거리도 중요하지만, 설령 줄거리를 모르더라도 소리의 흐름에 몸을 맡기면 그 세계에 완벽하게 감싸이는 기분이 들어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절정기에 도달했던 지복의 세계에 말이죠. 초연 당시는 회고적이다, 퇴영적이다 하는 비판도 많았지만 알고 보면 대단히 혁신적이고 분방한 작품이에요. 바그너의 영향이 느껴지면서도 그만의 불가사의한 음악세계가 펼쳐져 있습니다. 일단 마음에 들게 되면 중독성이 있죠. 저는 카라얀과 에리히 클라이버가 지휘한 버전을 즐겨 듣는데, 숄티의 지휘로는 아직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이 기회에 꼭 들어보고 싶은데요.”


“그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장미의 기사>를 턴테이블에 올리고 소파에 누워서 들었다. 할 일이 특별히 없을 때면 <장미의 기사>를 듣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 그의 말대로 그 음악에는 확실히 일종의 중독성이 있었다.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어떤 정서, 구석구석 색채를 지닌 악기 소리.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나는 한 자루의 빗자루도 음악으로 극명히 그려낼 수 있다’고 호언한 바 있다. 어쩌면 빗자루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의 음악에서는 회화적 요소가 짙게 느껴졌다.”


(<장미의 기사> 1막 마샬린과 옥타비안의 침실 2중창 장면. 소설 속 주인공들이 듣는 게오르그 숄티 지휘, 

빈 필하모닉의 레코딩이다.)


나는 하루키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개별 음악들을 찾아가며 듣는 것이 그의 작품 이해에 도움이 된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어차피 일종의 크고 작은 세팅으로 기능하는 것들이다. 음악 작품의 내적인 구조를 확장시켜 소설 속의 중요한 모티브나 형식 구조로 활용하는 독일인들(작가와 철학자들)과는 세계관 자체가 다르기도 하다. 한마디로 그 음악 몰라도 된다는 이야기다. 




소설 속에서 수 차례 언급되는 8기통 엔진의 재규어 F타입 스포츠 쿠페를 몰라도(어차피 이 세상 열 중 아홉은 근처에도 못 갈 가격의 자동차다) 소설 읽는데 별로 문제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아니, 오히려 그 음악과 그 자동차의 실체와 물상을 모르는 게 하루키를 읽는데 훨씬 더 도움이 된다는 생각이다. 이 작가는 미지의 존재에 대한 우리의 어떤 선망을 각인시키는 데 있어서만은 얄미울 정도로 가장 뛰어나기 때문이다. 


하루키의 소설을 읽으면 소리가 들리고, 냄새가 풍겨나고, 대상의 촉감이 느껴진다. 그 어떤 세계를 – 심지어 실재하지 않는 환상과 이질의 세계조차 - 묘사하더라도 독자로 하여금 그 공간감을 전인격적으로 추체험(追體驗)하게 만드는 경이적인 작가인 것이다. 하루키를 향한 수많은 크고 작은 애호의 기저에는 독자들의 이런 기묘한 개인적 충족감과 기대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 또한 이번 소설에서 하나의 세계를 몹시도 갈망하였다. 그건 작품 속 아마다 도모히코가 겪은 세상이었다. 위험하고 불온했을 1930년대의 오스트리아 빈에 체재했던 그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직접 지휘봉을 든 ‘비너 필하모니커’의 연주로 베토벤을 들었다고 한다. 


(1930년대의 오스트리아 빈)


남독일 바이에른 주의 산간마을 태생이었던 슈트라우스는 원래 문화적 정체성 자체가 오스트리아와 매우 가까웠다. 그러나 그도 한때는 베를린을, 그 프로이센적인 강력함의 세계를, 혹은 20세기 첨단 아방가르드 도시로써의 베를린을 마음깊이 탐미하였다고 고백한 바 있다. 육중한 전차가 시내 한복판을 가로지르고, 그들이 직접 발명해낸 첨단의 영사기로 영화를 찍어 돌리고, 밤마다 클럽과 카바레에서 번쩍이는 네온싸인이 명멸했던 독일 최고의 모던 시티 베를린 말이다. 그러나 슈트라우스는 다시 빈으로 돌아온다. 첨단의 기계화된 현대 도시보다는 옛 제국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대리석의 로코코 건물로 가득 찬 그 고아한 빈이 훨씬 더 자신에게 어울리는 세계임을 발견하고서 말이다.


그리고 소설 속의 인물은 슈트라우스가 지휘한 빈 필의 베토벤을 기어이 들었다. 천 페이지가 넘어가는 이야기의 바다 속을 긴장감 속에 따라가면서도 머리 속으로는 내내 그 황홀한 심상을 반복해서 탐미하곤 했다. 오늘 밤은 아마도 오페라 대신 슈트라우스의 가곡을 들으며 그 이유 없는 갈망의 목마름을 달래야 할런지도 모른다. 이럴 때는 제시 노만의 목소리가 가장 좋을 것이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가곡 ‘황혼에서 Im Abendrot’ 소프라노 제시 노먼. 쿠르트 마주어 지휘,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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