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얼굴의 미국과 리더십의 위기 [정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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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얼굴의 미국과 리더십의 위기

2017.06.22

지난 5월 31일~6월 2일에 열린 제 12회 제주포럼(Jeju Forum for Peace and Prosperity 2017)의 하이라이트는 앨 고어 전 미국 부통령의 특별 연설이었습니다. 그는 '기후변화의 도전과 기회: 더 나은 성장은 가능한가?' 라는 제목으로 비관적인 통계 수치와 압도적인 현장 사진들을 바탕으로 기후변화의 위기를 조목조목 설명하고 인류는 신재생에너지를 주로 하는 신에너지 정책으로 기후변화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으며 그 과정에서 더 나은 성장을 할 수 있다고 열정적으로 말하였습니다. 신에너지 정책의 전도사처럼 열변을 토하는 앨 고어 부통령의 리더십에서 머지않아 닥쳐올 재앙을 피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감지해 볼 수 있었습니다. 그가 연설을 마치자 청중은 열광적인 박수를 보냈으며 그 자리에 참석한 아시아, 유럽의 전직 대통령과 우리나라 전직 국무총리와 장관들까지 자리에서 일어나 긴 박수로 응대했습니다. 매우 감격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저도 기후변화의 위기에 대해 조금은 안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연설을 듣고 기후변화로 인류가 처한 위기의 적나라한 실상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거의 같은 시간에 그 반대의 현상이 미국에서 일어났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2015년 채택된 파리기후협약에서 탈퇴한다고 발표함으로써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렸습니다. 그는 동시에 인천 송도에 본부를 두고 있는 녹색기후기금(Global Climate Fund) 분단금 납부도 중단한다고 천명했습니다. 파리협약은 세계 거의 모든 국가가 참여하여 지구온난화의 주범인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이기로 합의한 협약으로, 지구 평균 온도가 산업혁명 이전보다 섭씨 2도 이상 상승하지 않도록 온실가스 배출량을 단계적으로 감축하는 것을 핵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중국 다음으로 많은 온실가스를 배출하는 나라일 뿐 아니라 세계 경제를 이끌어가는 최대의 경제대국이므로 미국이 이 협약에 참여하지 않으면 협약 자체가 동력을 잃게 될 것으로 우려됩니다. 뿐만 아니라 트럼프 행정부는 유엔 분담금을 비롯한 국제개발 원조를 축소하겠다는 방침을 발표하여 국제사회로부터 큰 비판에 직면해 있기도 합니다. 

파리협약은 기후변화에 대처하는 인류의 노력이 전례 없이 결집된 금자탑과도 같은 협약으로서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이 UN지속가능개발목표 채택과 함께 그의 재직 중 최대의 업적으로 꼽은 사안이기도 합니다. 그가 2015년 교섭 당시 핵심 당사국인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 및 중국 시진핑 주석과의 몇 차례 숨가쁜 회담과 설득을 통해 이루어 낸 결과물인 것입니다. 고어 부통령이 주장하는 대로 신재생에너지로의 전환을 통한 기후변화 위기 극복도 파리협약이 밑받침이 되지 않으면 현실성이 없어집니다. 고어 부통령은 연설 후 청중의 질문에 답하며, 트럼프 대통령이 파리협약을 탈퇴하더라도 미국의 기후변화 대처 노력은 계속될 것이라 하면서, 미국은 연방정부만 있는 것이 아니라 독립적인 주(state) 정부들이 있어 트럼프의 정책을 따르지 않고 독자적으로 기후변화 위기에 대처하는 정책을 실행해 나갈 것이며 기업과 소비자 등 민간에서도 연방정부를 따르지 않고 온실가스 감축을 계속하여 세계적인 기후변화 위기 대처 노력에 부응할 것이라면서 결연한 표정을 짓기도 했습니다. 

그는 이 말에 이어 “미국의 시민으로서 말한다. 미국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무엇을 하든 기후변화 저지를 이끌어 나갈 것이다”고 했는데 그때 저는 진정한 정치지도자란 저런 사람을 말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그에 대한 존경심이 일었습니다. 빌 클린턴 정부에서 부통령을 지내면서 임기 끝에 대선에 도전했다가 조지 W. 부시에게 석패(민주당의 고어가 54만 표를 더 얻고도 선거인단 수에서 공화당의 부시에 뒤졌음) 했지만 인류를 위한 올바른 비전을 가지고 세계적인 환경운동가로 동분서주 활약해왔습니다. 그는 자신의 저서 ‘불편한 진실(2006)’에 반영된 환경운동가로서의 열정적인 노력을 인정받아 2007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합니다. 같은 민주당 출신으로서 39대 대통령을 지낸 후 가난한 자와 약자의 편에 서서 국제적으로 HABITAT (무주택 서민의 주거 문제 해결을 목적으로 1976년 미국에서 창설된 국제적인 민간 기독교 운동단체)활동을 적극 전개하는 한편 세계 각지의 분쟁해결을 위해 활동한 공로로 2002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지미 카터 전 대통령과 궤를 같이하는 리더라고 하겠습니다.

지난 미국 대선에서도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 후보에게 투표수로 2백만 표 이상 뒤지면서도 선거인단 수에서 우세를 점해 45대 대통령이 된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직후부터 온갖 불가측성과 정치적 미숙을 드러내면서 미국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이단아(異端兒)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이번 조치와 관련해서는 “미국이 파리협약을 버리는 것은 문명사회를 버리는 것”이라는 지적이 있을 정도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기후변화의 과학 자체를 신뢰하지 않는 사람으로서 대선 과정에서 이미 파리협약 탈퇴를 공약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미국의 이번 파리협약 탈퇴는 트럼프 대통령의 독단적인 결정이 아니라고 합니다. 하버드대 경제학자이자 세계적인 석학으로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 특별자문관을 지내기도 한 제프리 삭스(Jeffrey Sachs) 교수에 의하면 이번 결정 이전에 미 공화당 상원의원 22인이 협약 탈퇴를 강력히 권고하는 서한을 트럼프 대통령에게 보냈으며 이들은 미국 국민 전체의 이익보다 미국의 석유 및 가스 산업계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치인들로서, 결국 트럼프의 이번 결정 배후에는 미국의 정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삭스 교수는 “워싱턴 정치가 미국 국민의 필요와 이익, 견해를 반영한다던 시기가 있었지만 그러한 민주주의적 비전은 오래전에 버려졌으며 암울한 대안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오늘날 미국의 정치는 강력한 기업의 로비, 특히 석유산업, 금융산업, 군산복합체, 건강보험산업 등 4개 산업의 로비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고 갈파합니다. 그 한 증거로서 석유산업이 2016 미국 대선 캠페인에서 1억 불을 정치권에 제공했는데 그중 90퍼센트가 공화당으로 갔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번 탈퇴 결정은 미국 유권자나 시민들의 입장이 아니라 석유산업(Big Oil)의 입장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비판합니다. 실제 많은 여론조사에서 미국 국민은 미국이 파리협약에 남아 있기를 원하는 것으로 파악되었다고 합니다. 

트럼프 대통령 등장 이후 미국은 기후변화 문제뿐 아니라 이민 문제를 비롯한 여러 국내외 문제에서도 갈등과 내홍(內訌)을 겪고 있습니다. 특히 러시아의 2016 미국 대선 개입 문제를 둘러싼 연방수사국의 수사와 그 와중에 트럼프 대통령의 제임스 코미(James Comey) 국장 전격 해임 등의 여파로 워싱턴 정국이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울 정도로 빠르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러시아의 대선 개입을 조사하기 위한 특별검사가 임명되었으므로 그 조사 결과에 따라 사법방해(obstruction of justice)로 인한 트럼프 대통령 탄핵 문제가 불거질지도 모를 판국입니다. 

앨 고어 전 부통령이 대변하는 미국과 트럼프 현 대통령이 대변하는 미국은 이처럼 천양지차입니다. 민주당과 공화당이라는 전통적인 양대 정당이 주창하는 가치의 차이를 넘어서는 차이입니다. 지난 미국 대선 과정을 지켜보면서 미국 사회의 갈등 증폭과 함께 미국의 정치가 타락하고 있으며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더 이상 국제사회에서 설득력 있는 리더십을 발휘하기 어려울 것이란 인상을 받았습니다. 어쩌면 정상을 넘어서는 행보를 연속적으로 보이고 있는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 자체가 미국 정치의 퇴보를 의미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는 강권정치와 인권 문제로 비판받는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 대한 친밀감을 표시하고 역시 독재로 낙인찍힌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을 두둔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민주정치의 제도적 틀보다는 즉각적인 개인 트위터로 국민과 직접 소통하기를 선호하는, 기업인 출신 정치인으로서 그의 스타일을 보면 그의 내면에 자유와 인권보다는 권력의 만능을 믿는 어떤 독재성이 잠재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듭니다. 

미국이 세계의 자유와 인권을 높이는 자유민주적 리더십에서 벗어나 독재 세력들을 용인하는 모습은 역사의 발전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줄 것입니다. 미국이 이런 부정적인 모습에서 하루빨리 벗어나 미국 내외에서 신뢰받을 수 있는 정상적 리더십으로 돌아와 온갖 위기 상황에 놓인 오늘날 세계의 진정한 지도자로 다시 나서게 되기를 희망하는 마음입니다. 한편, 미국의 정치와 리더십 문제는 미국 스스로 해결해야 할 문제이지만 안보를 한미동맹에 의존하는 우리로서는 국제사회에서 신뢰받지 못하는 미국의 리더십이 야기할지도 모를 한반도의 안보 불안이 걱정되는 것입니다. 안보 문제를 둘러싼 한미 간 갈등에 더해 요동치는 미국의 리더십으로 인해 북한이 모험적 도발을 할 가능성이 더 커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제주포럼은 2001년에 시작되어 계속 성장해오고 있으며 12회째를 맞은 금년 포럼은 ‘아시아의 미래 비전 공유’란 주제로 개최되어 전 세계 81개국에서 지도자와 각계 전문가 등 총 5,500명이 참가하였음. (제주평화연구원)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자유칼럼그룹은 특정한 주의나 입장을 표방하지 않습니다.

필자소개

정달호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후 줄곧 외교관으로 일했으며 주 파나마, 이집트대사를 역임했다. 은퇴 후 제주에 일자리를 얻는 바람에 절로 귀촌을 하게 되었고, 현재 제주평화연구원 객원연구위원으로 있으면서 한라산 자락에 텃밭과 꽃나무들을 가꾸며 자연의 품에서 생활의 즐거움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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