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기관 설계공모, 미리 정해져 있나?


“심사위원 9명 중 8명은 아예 발표를 안 듣더군요. 

나머지 1명은 꾸벅꾸벅 졸았고….”


   지난 5월 서울 한 공공기관이 발주한 설계 공모 심사 현장. 프레젠테이션(PT)을 마친 국내 건축설계사무소 대표 A씨는 “낙점자를 정해놓고 들러리를 세우는 기분이었다”고 말했다. 당시 공모에 참가한 업체는 8곳. 심사위원 명단은 발표 5분 전 공개됐고, 심사위원 자리는 칸막이가 쳐져 있어 ‘공정성’을 확보하려는 듯 보였다.



하지만 심사가 끝나자 건축·설계업계에선 “3개 업체는 미리 심사위원 명단을 확보했다” “경쟁업체에 낮은 점수를 주도록 로비를 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전문가들은 “정부·지방자치단체·공기업 등 공공(公共)기관 설계 사업 발주 과정에서 일부 업체가 심사위원을 상대로 로비를 벌이고, 금품까지 오가는 ‘구태(舊態)’가 여전하다”고 지적한다.


배병길 한국건축가협회 회장은 “설계 공모 심사위원 선정 때부터 공정한 경쟁의 틀을 만들어야 한국 설계업체가 국제무대에서 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고 말했다.


심사위원 사전 접촉에 ‘사활’

국내 공공기관 발주 설계 시장은 연간 5000억원 정도로 추산된다. 설계 디자인과 기술력을 내세워 프레젠테이션에 역량을 쏟아붓는 업체도 있지만, 일부 업체는 심사위원을 만나는 데 공을 들인다. 건축업계에서는 작품 접수 일주일 전쯤 조감도가 완성됐을 때가 본격적인 ‘로비 시점’으로 통한다.


설계 공모 심사위원은 관련 분야의 교수 등 전문가로 구성된다. 심사 당일까지 심사위원이 정해지지 않을 경우에는 지연·학연 등을 통해 발주 기관 등에서 ‘심사위원 후보’ 명단을 확보, 로비를 한다. 몇몇 설계업체끼리 협력해 ‘심사위원 후보’를 ‘공동 관리’하고, 설계 공모에 응할 때도 순번을 정해 들어가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설계 공모 과정에서 비리가 드러나 수사를 받는 경우도 적지 않다.


대전지방경찰청은 세종시에 조성되는 대규모 상가인 ‘어반아트리움’에 대한 수사를 벌이고 있다. 2015년 설계 공모 과정에서 심사위원들이 금품 로비를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지난 5월 광주도시공사 사장 공모 때는 한 후보자가 과거 건설사 재직 시절 설계 심사위원인 대학교수에게 2000만원을 전달한 사실이 드러나 자진해서 사퇴했다.


‘쥐약’ ‘애프터서비스’ 은어 등장

설계 공모 로비와 관련된 업계 ‘은어’도 있다. 심사위원에게 주는 금품은 ‘쥐약’이라고 한다. 대다수 심사위원은 공정하게 심사에 임하지만, 일부는 금품을 받고 ‘쥐약 먹은 쥐’처럼 정신을 못 차린다고 꼬집는 말이다. 심사 전에 예비 심사위원들에게 지급되는 돈은 ‘비포 서비스(BS)’, 심사 결과에 따라 제공되는 금품은 ‘애프터 서비스(AS)’라고 부른다.


AS는 일종의 성공 보수금으로 사전 로비 자금의 3배 정도 된다고 한다. 한 건축가는 “설계비 100억원짜리 프로젝트라면 30억원 정도를 로비 자금으로 뿌리는 업체도 있다”고 말했다. 심사위원이 결정되는 날 새벽 예비 심사위원 집 앞에서 대기하는 직원은 ‘불침번’으로 통한다.


정부도 이런 관행을 알고 설계 공모 때 의무적으로 심사위원 명단을 공개하는 등 수차례 제도를 개선했지만, 여전히 로비 관행이 남아 있다. 업계 관계자는 “심사위원과 업체 간에 유착 관계가 생기면, 먼저 ‘이번에 심사위원이 됐다’며 연락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로비 관행 없애고, 설계 경쟁력 높여야”

설계 공모 결과를 놓고 업체 간 불만이 끊이지 않자 정부는 공정성과 투명성을 높이기 위해 ‘건축 설계공모 운영 지침’ 개정을 추진 중이다. 발주기관은 심사위원으로부터 업체와의 사전 접촉 금지서약서를 의무적으로 받고, 입상작에 대한 평가사유서를 심사위원 실명으로 공개하도록 하는 내용 등을 담을 예정이다.




로비 관행이 국내 설계업체들의 경쟁력을 약화시킨다는 지적도 나온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우리나라 설계 경쟁력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27개국 중 20위권 수준이다.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등 상징적인 건축물을 지을 때 외국 건축가가 설계를 맡는 것이 당연시되는 상황이다. 한 건축가는 “해외에서 우리의 건설 기술은 인정받는 데 비해 설계 기술은 그렇지 못하다”며 “중국과 동남아시아에서 건물 신축이 늘어나면서 설계 부문 시장도 크게 열렸는데 이를 놓치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송원형 기자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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