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전쟁이다…현충일 단상 [김홍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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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전쟁이다…현충일 단상

2017.06.06

오늘은 62번째 맞는 현충일(顯忠日)입니다.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국군장병과 호국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해 지정한 기념일입니다. 1956년 법정공휴일로 정한 이후 우리 국민은 모두 이날 조기를 걸고 국립현충원의 추념식과 참배행사로 선열의 넋을 위로하고 기립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참혹한 전쟁의 공포와 전율(戰慄) 질곡(桎梏)을 잊어가고 있습니다. 6·25 참화를 겪은 지 두 세대를 넘긴 세월 탓도 있겠지만, 우리나라를 둘러싼 위기에 너무 무관심한 세태 탓은 아닌지 걱정스럽기도 합니다. 

김정은의 북한은 문재인 정부의 화해 제스처에도 아랑곳없이 일주일이 멀다 하고 탄도미사일을 쏘아 올렸습니다. 미사일에 소형 핵탄두를 실으면 한방에 서울시민 30만 명이 희생된다는 가상 시나리오가 인터넷 공간을 덮어도 덤덤합니다. 한반도 주변도 사면초가입니다. 중국은 남중국해에 군사기지를 만들어 놓고 러시아제 항공모함과 전투기 폭격기 시위를 벌이고 있습니다. 미국은 중국의 태평양 진출을 막기 위해 태평양함대를 강화하며 일본의 재무장을 부추깁니다. 그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에 태평양전쟁 와중의 참화 몇 토막을 들춰 보았습니다. 두 번 다시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되겠기에.

# 패망을 앞당긴 사이판의 일본군 옥쇄

1944년 6월 15일 사이판 상륙 작전을 개시한 미군은 24일 만인 7월 9일 타포쵸 산 정상에 성조기를 올렸습니다. 이 작전에 투입된 병력은 상륙부대 6만7,000명을 포함한 7만1,000여 명. 면적 115평방킬로미터의 작은 섬에 퍼부은 폭격기·함포·야포 등 포탄만 8,500톤. 섬 전체를 초토화한 전투에서 희생자는 일본군 전사자 2만3,811명, 포로 921명, 민간인 사망자 1만여 명(현지인, 징용 조선인 포함)에 이릅니다. 미군도 일본군의 야습으로 1만7,000명의 사상자를 냈습니다. 처음으로 일본군 전원에 옥쇄(玉碎) 명령이 내려진 이곳 타포쵸 산을 미군은 ‘피의 산’, 그 계곡을 ‘죽음의 골짜기’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미군이 장악한 이후 타포쵸 산언저리 동굴에 피신했다 산화한 18살 여고생 스가노 시즈코(菅野靜子; 야전병원 간호사)의 수기는 섬뜩한 참상을 생생하게 전해줍니다.
“모두 산의 수림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어둡다. 순간 얼굴에 뭔가가 부딪혔다. 목매 죽은 여자 시체다. 정신을 차려 보니 산 전체에 이상한 냄새가 진동했다. 자세히 보니 곳곳에 목을 매어 죽은 시체가 나무에 매달려 있었다. 그러나 나의 정신은 이제 마비되어 있는지 그것을 당연한 일로 치부하고 한쪽으로 밀치며 지나갔다.……동굴을 찾아 떠나는 우리의 등 뒤에서 부상으로 쳐진 군인들이 터뜨린 수류탄 작렬음에 나는 그냥 주저앉고 말았다.”

민간인과 함께 동굴에 피신했던 아오키 다카시(靑木隆) 해군 병조의 일기는 더 처참합니다.
“갓난아기가 울기 시작했다. 배가 고파서 그러는지 까무러칠 정도로 울어댄다.
-이봐, 애 울리지 마! 함포 사격 당하잖아.
-정말 죄송합니다. 젖이 안 나와서…. (어제 군인에게 쌀을 달라고 조르던 그 여자다)
-아기 하나 때문에 모두가 죽게 되잖아. 밖으로 나가!
-미안합니다. 날이 밝으면 나가겠습니다.
-당장 나가!

어린애는 작은 손을 꼭 쥐고 몸을 떨면서 계속 울어대지만 어딘가 힘이 없다.
-어떻게 해요?
-때려 죽여!
여자는 발밑에서 흐느껴 운다. 이윽고 어린애가 울음을 그쳤다. 다음날 새벽 간밤의 여자가 뜻 모를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아기를 자기 손으로 목 졸라 죽인 모양이다. 미쳐버렸는지 죽은 아기를 안고 동굴을 나간 여자는 크게 울부짖으며 바다에 뛰어들었다." 

사이판 옥쇄를 계기로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내각(1941년 10월 18일~1944년 7월 18일)은 막을 내렸습니다. 전쟁 초기 하와이 진주만 공습에 이어 동남아 지역에 대한 전광석화 진격으로 승승장구하던 일본은 병력과 무력이 절대 우세한 미국의 반격에 밀리기 시작했습니다. 
아투 섬(1943년 5월, 2,650명 전사)을 시작으로 타라와(43년 11월, 4,836명) 콰잘란(44년 2월, 7,850명) 티니안(44년 8월, 8,000명) 괌(44년 8월, 18,000명) 페릴류(45년 1월, 3,200명) 이오지마(유황도 45년 3월, 28,000명)에서 일본군은 옥쇄라는 이름으로 항복이나 포로를 거부한 채 전멸했습니다. 1억 일본인의 본토 결전을 부르짖었으나 미국의 원폭 투하로 끝내 ‘무조건 항복’을 수락했습니다. (이상 야마오카 소하치의 <태평양전쟁>에서)

그러나 일본인은 그 뼈아픈 패전을 지금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종전기념일’을 전후해 구민회관 등에서 유치원생들에게 원자폭탄이 떨어진 히로시마의 비참한 모습을 담은 홍보영화를 보여 줍니다. 죽은 어머니의 시체를 껴안고 우는 어린이, 처참하게 죽은 어린아이들의 모습을 담은 내용입니다. 영화를 보고 나오는 아이들은 이구동성으로 “미국 사람 싫어” “꼭 원수를 갚을 거야” 하며 떠듭니다. 전후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미국에 복수를 해야겠다는 각오를, 아이들에게는 적개심을 부추기는 교육의 일환입니다. 일본이 최근 다시 군국주의 회귀를 외쳐대는 속내의 근원이 아닌가 싶습니다. (김현구의 <일본이야기>에서)

# 나라도 국민도 잃은 장개석 군대의 부패

1937년 7월부터 1945년 9월까지 8년에 걸친 중일전쟁에서 중국은 미국의 전폭적 지원을 받고 있었습니다. 연합국 중 유일한 아시아 나라인 중국은 겉으로는 국공(國共; 국민당과 공산당) 합작으로 일본의 침략에 맞서고 있었지만, 안으로는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과 마오쩌둥(毛澤東)의 공산당이 극단적 대립과 혈투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미국은 중국군을 지원하기 위해 ‘버마(지금의 미얀마) 루트’를 개설하는 한편, 1942년 조셉 스틸웰 중장을 장제스의 중화민국군 참모장으로 파견했습니다. 스틸웰은 그밖에도 동남아시아 연합군 부사령관, 미 육군 CBI(중국, 버마, 인도)방면 항공사령관, 대여물자통제관 직을 겸했습니다.

그는 18세기 수준의 중국군을 현대화하려고 심혈을 기울였으나 중국군의 부패와 나태에 판정패하고 말았습니다. 스틸웰은 일기에서 대여물자통제관 일이 가장 힘들었다고 회고했습니다. 그 자리는 미국의 무기 대여법(貸與法)에 따라 연합국에 지원한 군수물자를 감독하는 것입니다. 일부 고위 간부가 옆(공산군 등)으로 빼돌리지 않는가, 순조롭게 말단까지 분배되는가, 효과적으로 쓰이고 있는가, 무엇이 부족하고 무엇이 남아도는가 등을 조사하여 작전계획에 차질이 없도록 하는 일입니다. 장제스는 스틸웰의 계획과 노력을 적극 지지하는 척했지만 부하 간부들은 몸에 밴 타성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버마로부터 윈난(雲南)성을 거쳐 중국군에 원조물자를 수송하는 버마 루트는 미국의 돈으로 완성되어 트럭으로 운반되는 무기와 장비는 빠짐없이 중국군 부대에 배급되었다. 그런데 의외의 사실을 발견했다. 어느 틈엔가 장제스의 심복이자 처남(쑹메이링 宋美齡의 오빠) 쑹쯔원(宋子文)이 사장인 사우스 웨스트 컴퍼니(南西公司)라는 회사가 설립되어 중국으로 들어오는 원조물자 트럭으로부터 통행세를 걷고 있었다. 길도 트럭도 화물도 미국이 만들어 중국군을 지원하는 원조일 뿐 장사를 하자는 것이 아니었다. 모두 외국 상품이니만큼 자기 나라에 들어올 때는 세금을 내야 한다는 논리다. 어안이 벙벙하여 할 말을 잃어버렸다.”

스틸웰은 일 년 뒤의 일기에서 더욱 참담한 감상을 적었습니다.
“피너츠(장제스의 뾰족한 머리 모양을 빗댄 별명)는 은혜를 모르는 작은 독사다. (중국 정부는)자기들 자신밖에는 모르는 불한당 집단이다. 지도자들의 흥미는 오직 돈, 권력, 그리고 지위뿐이다. 인텔리와 부자는 자식들을 미국에 보내고 농민의 아들들만이 전쟁에 동원된다. 우리는 그 위대한 애국투사인 피너츠의 영광을 위해 전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오 신이여!” 
참모장인 자신이 제안한 군 현대화에 장제스가 흔쾌히 동의하고 다른 참모와 지휘관들도 박수를 쳐댔지만 거의 실행된 것이 없는 상황에 대한 회한과 실망의 표현입니다.

1944년 스틸웰 중장의 뒤를 이어 참모장이 된 앨버트 웨드마이어 소장도 군 개혁을 적극 강조했습니다. 그는 군 내부의 극심한 빈부격차를 발견하고 장제스 총통에게 제의했습니다. ‘전쟁 중엔 군 간부의 연회 때 요리 접시를 네 개로 제한해 달라’고. 장 총통도 선뜻 동의했습니다. 그는 자주 중국군 간부의 식사 초대를 받았는데, 장군들이 제공하는 식사는 예외 없이 열 접시 이상의 호화판이었습니다. 반면 하급 병사는 급여도 식사도 형편없어 민가에 나가 식량 노략질을 일삼는 바람에 엄청난 민중의 불평을 샀습니다. 이른바 ‘장개석 군대’라는 악명을 얻게 된 연유입니다.

웨드마이어는 학교도 세웠습니다. 보병·포병·자동차·전차학교 등입니다. 그는 장 총통이 근대전에 대한 안목은 삼류 정도밖에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중국의 통일과 독립에 대한 의지는 높이 사, 공산 세력 말살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45년 중장으로 진급한 그는 중국공산당은 국민당의 궤멸을 바랄 뿐 타협은 않을 것이라며 미국 정부의 국공타협책을 정면으로 반박했습니다. 이 때문에 뒷날 그의 주중 대사 취임도 공산당의 결사반대로 무산됐습니다.
장제스 국민당은 나태하고 부패한 ‘장개석 군대’는 1949년 중공군에 밀려 타이완 섬으로 망명했습니다. 나라도 백성도 모두 잃어버리고.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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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김홍묵

경북고, 서울대 사회학과 졸업.  동아일보 기자, 대구방송 이사로 24년간 언론계종사.  ㈜청구상무, 서울시 사회복지협의회 사무총장, ㈜화진 전무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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