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인종주의 역사에 대한 반성 [허찬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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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인종주의 역사에 대한 반성

2017.06.05

중국의 부상과 함께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 정치·경제 질서를 의미하는 팍스 아메리카나의 쇠퇴가 자주 언급되었습니다. 그런데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의 45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후 반년도 안 된 기간에 보인 럭비공 행보에 휘청거리는 세계의 모습을 보면 아직도 미국의 영향력이 큰 것을 실감합니다. 지난주에는 지구 온난화를 완화하기 위한 파리기후협약을 탈퇴한다고 발표하여 세계를 경악케 하며 미친 존재감을 과시했습니다. 

러시아의 푸틴을 제외한 세계 주요국 지도자들이 트럼프 대통령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비판적인 미국 내 정치·사회적 분위기도 점점 험해지고 있습니다. 대선 때 트럼프 후보 진영이 러시아와 내통했다는 혐의에 대해 FBI와 의회의 공식 조사가 진행되고 있고 사법절차가 뒤따를지 모릅니다. 의료보험제도 개편, 세제 개편 등과 같은 구체적인 정책 공약은 표류 또는 실종 상태입니다. 

트럼프 후보는 선거 기간 불법 이민자들의 위협을 침소봉대하고 여기에 저급한 인종주의적 양념을 넉넉히 뿌리며 저소득 백인층 지지를 포획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인종주의적 정서의 부활에 대한 반발도 더 뚜렷해지고 있습니다. 약 160년 전 16대 링컨 대통령의 흑인노예 해방조치에 반발하여 남부 주들이 남부동맹(Confederacy)을 결성하여 독립하려고 하자 남북전쟁이 발발했던 역사로 인해 인종주의 문제는 남부 지방에서 더 심각했습니다. 지금도 그 지역에서는 남부동맹이 4년간 사용했던 국기를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근래 이런 과거사를 정리하려는 노력에 더 힘이 실리고 있어 여기 소개합니다.

남부동맹의 출범에 참여했던 루이지애나주에 있는 뉴올리언스(New Orleans) 시의 이야기입니다. 뉴올리언스는 역사적으로 프랑스와 스페인의 직·간접 영향권에 있었기 때문에 다양한 문화가 뒤섞인 독특한 도시입니다. 재즈의 발상지, 그리고 미시시피 강이 멕시코 만 바다를 만나는 하구라는 지역적 특성 때문에 큰 수해를 겪기도 했던 곳입니다. 오랜 기간에 걸쳐 주요 공공장소에 세워져 있던 남부동맹의 주요 인물들 동상이 적절한가에 대한 갑론을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2015년 6월 찰스턴 시의 한 흑인 교회에서 21세의 남부 인종주의자 백인 청년이 목사와 신도 9명을 살해하는 충격적인 일이 발생합니다. 바로 뒤 뉴올리언스의 미치 랜드리우(Mitch Landrieu) 시장은 동상 철거를 본격적으로 추진하였고 올봄 법적 공방이 마무리되며 동상들이 실제로 철거되었습니다. 다음은 마지막 동상 철거를 기념하는 랜드리우의 5월 23일 연설 가운데 몇 부분을 발췌한 것입니다. 이 연설은 미국의 불행했던 인종주의 역사와 이를 극복하려는 노력을 생생히 아우르는 훌륭한 연설로 미국 주요 언론의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뉴올리언스는 진정으로 여러 종족, 다양한 문화가 섞여 끓고 있는 냄비와 같은 도시입니다. 이 도시 이상 ‘여럿이 모여 이루는 하나(e pluribus unum)’라는 미국의 모토를 잘 보여주는 곳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직시해야 할 역사가 있습니다. 항도(港都) 뉴올리언스에는 미국 최대 노예시장이 있었습니다. 수십만 명의 영혼들이 여기에서 팔린 후 미시시피 강 상류로 끌려가 강제노역, 강간과 고문의 삶을 겪어야 했습니다. 미국에서 약 4천명이 사형(私刑. 여기에서 lynching은 다수의 백인이 흑인을 불법적으로 처형하는 행위)으로 죽었는데, 루이지아나주에서만 약 540명이 이런 일을 당했습니다. 주(州)법원은 판결을 통해 인종분리와 평등의 양립을 존치시켰습니다. 또 이 도시는 (1960년대 흑인인권회복을 주창하며) 외지에서 온 인권운동가들을 선혈이 낭자하게 두들겨 팬 곳입니다. 누가 문제의 동상들이 역사의 일부라고 주장한다면 제가 방금 말씀드린 것들도 깊이 낙인(烙印)된 역사입니다. 

아울러 노예선, 사형(私刑)의 기억, 그리고 노예 거래소를 상기시킬 기념 조형물이 왜 공공장소에 없는지, 뉴올리언스 땅에서 오랜 기간 벌어진 고통, 희생, 그리고 오욕의 역사를 상기시킬 표지석은 왜 없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직까지도 남부 역사와 기념비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역사적인 불의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것은 선택적 지우기를 통해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역사를 기억하는 것과 그것을 호도하는 것은 다릅니다. 

미국과 뉴올리언스 모두 과거는 큰 승리와 비극이 혼재한 굴곡진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진실을 두려워해선 안 됩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국립 흑인 역사·문화박물관 개관 때 ‘위대한 국가는 역사를 숨기지 않고, 흠결을 직시하고 이를 고친다’라고 했습니다.” 

연설은 남부동맹과 동상을 세운 사람들의 진정한 의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석합니다. 

“역사적 기록은 명확합니다. 이 동상들은 단순히 (남부동맹의 지도자) 로버트 리, 제퍼슨 데이비스, 그리고 P. G. T. 비리가드 각 개인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것이 아니라 패배한 이념을 숭배하는 운동의 일환으로 세워진 것입니다. 이 운동의 목적은 하나였습니다. 기념물 건설 등 다양한 수단을 통하여 남부동맹이 인류 역사의 옳지 않은 편에 서 있었다는 사실을 숨기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오늘 철거하는 동상들은 시 건립 후 166년, 그리고 남북전쟁 종식 후 19년 후에 세워졌고, 이는 패배한 이념과 시의 역사를 왜곡하려는 시도였습니다.” 

“남북전쟁 이후 세워진 여기의 동상들은 (흑인들을 겁박하기 위해 백인 인종주의자들이 밤에 흑인) 주택 앞에 세워 놓곤 했던 불타는 십자가와 다를 바 없는 테러 수단입니다. 동상들은 지나가는 모든 이들에게 누가 아직도 이 도시의 진정한 주인인지를 일깨우기 위해 세워진 것입니다. 만약 남부동맹의 진정한 목표가 무엇이었는지 확실히 모르겠다면 전쟁 발발 몇 주 전 남부동맹의 부통령 알렉산더 스티븐이 노예제도와 백인우월제도의 보존이 목표라고 천명했던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는 초석연설(cornerstone speech)로 알려진 연설에서 ‘남부의 초석은 다음의 엄연한 진실이다. 흑인(negro)이 백인과 동등하지 않기 때문에, 흑인이 우월한 인종집단에 굴종하는 노예제도는 자연적 정상 상태이다. 이런 위대한 물리적, 철학적, 도덕적 진실을 바탕으로 하는 우리의 새 정부는 인류 역사상 최초’임을 주장했습니다” 

랜드리우는 사려깊은 명연설가로 정평이 난 전임 오바마 대통령을 인용합니다.

“작년 오바마 대통령이 역사적 사실들을 배경과 함께 전체로 이해해야 할 필요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그는 오랜 기간 노예매매대로 쓰였던 석대(石臺)의 예를 들었습니다. 그 돌에 붙여진 기념비 표지판에는 1830년에 (7대 대통령) 앤드루 잭슨과 (저명 정치인) 헨리 클레이가 그 위에서 연설을 했었다는 사실만 적혀 있다는 것입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 기념물이 역사에 관해 주는 시사점을 생각해 봅시다. 그 석대는 오랫동안 매일 포박된 남녀 노예가 가축처럼 경매되어 팔려가며 디디었던, 천개의 맨 발의 비극이 서려 있는 그런 돌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념패를 부착해 역사로 기억하고자 했던 것은 오래전 두 유력인사가 그 위에서 허접한 연설을 했었다는 사실'이었다고 개탄했습니다.” 

연설은 인종주의 종식의 역사적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남아공의 넬슨 만델라와 미국의 링컨 대통령을 인용하며 끌을 맺습니다.

“오랜 기간 수감자였으나 이제는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넬슨 만델라가 인종차별제도(apartheid) 종식 이후 했던 말을 상기합시다. ‘(과거) 어떤 일이 있었는가를 알게 되면서 너무 고통스럽고, 엄청난 충격을 느끼겠지만 이를 통해서 국가가 점차 인간성을 회복하는 과정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흩어져 각자의 길로 가기 전에 진실을 분명히 확인합시다. 

남부동맹은 인류역사의 옳지 않은 편에 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분열시키고 동포 미국인을 노예로 굴종시키려 했습니다. 이를 절대 잊지 말아야 하며, 다시는 이런 역사가 높은 받침대에 올려져 추앙받아서는 안 됩니다. 뉴올리언스 공동체 모두는 남부동맹의 기념비를 철거하는 행동의 심각한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이제 우리가 고통스러운 과거를 확인했으며, 이제 이를 뒤로하고 전진하겠다는 다짐입니다. 

우리의 결의가 약해지면 그동안 여러 세대의 용기 있는 투쟁과 성찰이 무위로 돌아갑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열린 마음과 명확한 목표의식을 갖고 단결하도록 촉구했던 위대한 링컨 대통령의 다음과 같은 영원한 당부를 실행하지 못할 것입니다. ‘누구에게도 원한을 품지 않고, 모든 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신이 우리에게 보게 한 정의로움에 대한 굳은 확신을 가지고 이 나라의 상처를 감싸고, ... 우리들 사이의, 그리고 모든 나라들과의 정의롭고 영원한 평화를 이루기 위해 우리가 시작한 과업을 마칠 수 있도록 모두 매진합시다.'” 

마지막 인용된 내용은 링컨 대통령이 재선되어 1865년 3월 초 취임식에서 행한 연설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이 연설 한달 후 남부동맹이 항복했고, 그 며칠 후 링컨은 암살범의 총격으로 사망합니다. 


※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필자가 일부 내용에 부연 설명을 괄호 안에 추가했음. 마지막 링컨 연설의 번역은 기존 자료를 참고했음. 미국 주요 언론사 웹에 연설문이 있으나 인용구에 대한 주석이 자세히 달린 연설문은 다음 주소에서 볼 수 있음. 
https://www.nola.gov/getattachment/Mayor/Press-Conferences/5-19-17-Speech-Truth_Removing-Confederate-Monuments-in-New-Orleans_Mayor-Mitch-Landrieu.pdf/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이 칼럼을 필자와 자유칼럼그룹의 동의 없이 상업적 매체에 전재하거나, 영리적 목적으로 이용할 수 없습니다.

필자소개

허찬국

1989년 미국에서 경제학 박사학위 취득 후 미국 연지준과 국내 민간경제연구소에서 각각 십년 넘게 근무했고, 2010년부터 충남대 무역학과 교수로 재직 중. 개방 경제의 통화, 금융, 거시경제 현상이 주요 연구 대상.

게스트칼럼 / 유능화

아버지의 고종명(考終命)

누구나 이 세상에 태어나 한평생을 살아가는 삶의 가치와 목표는 오복(五福)이 아닌가 싶습니다. 오복은 천수를 누리며 사는 수(壽), 몸과 마음이 건강하고 평안하게 사는 강녕(康寧), 어느 정도 경제적 여유를 누리며 사는 부(富), 덕을 베풀며 사는 유호덕(攸好德), 천수를 누리고 자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편안히 눈을 감는 고종명(考終命)입니다.

오복 중에 일생을 마무리하는 고종명은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세상과 하직하는 복으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날씨와 계절의 운도 따라야 이루어지기에 가장 힘들며 또 한편 두려운 것이기도 합니다. 아버지(97세)께서 늘 하시던 말씀이 있습니다. “5복 중 4복은 어느 정도 누렸는데 고종명의 복은 어떨는지…”

지난 21일(일) 아버지가 기거하시는 실버 아파트에서 함께 점심식사를 했습니다. 식사 후에는 강당에서 영화 ‘노팅 힐’도 함께 관람했습니다. 영화를 본 후 간호과에서 혈압을 재어보니 완전 정상이었습니다. 산책을 하자고 하셔서 아파트 정원을 같이 거닐었습니다. 그런데 4시 반경 아버지는 갑자기 중심을 잃으면서 바닥에 주저앉으셨습니다. 혼자서는 부축하기 어려워 간호 직원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방으로 모셨습니다.

“큰애야, 나 골절이냐?”
“아버님, 골절은 절대로 아닙니다.”
“왼쪽 다리에 힘이 없구나.”

지금 생각해보니 뇌졸중이 온 것이었습니다.

“다리에 힘이 없구나.”
“아버님, 다리 좀 움직여 보세요.”

오른쪽 다리는 움직이는데 왼쪽 다리는 전혀 못 움직이셨습니다. 아버지의 안색이 안 좋아졌습니다. 불길한 생각이 들어 119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119 구조팀이 아버지를 모시고 목동병원 응급실로 도착한 시각이 5시 30분. 아버지가 쓰러지고 불과 1시간 만이었습니다.

의료진은 아무리 애를 써도 시시각각으로 상태가 안 좋아지니 가족들에게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습니다. 연명 치료를 거부하신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특별히 더 할 치료는 없었습니다. 모든 가족들에게 응급상황을 알리니 다들 달려왔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7시 반쯤 호흡을 멈추셨습니다. 그야말로 누구나 원하는 고종명을 이루신 것입니다. 이삼일 앓으신 것도 아니고 세 시간 만에 운명하신 것이니 최고의 고종명을 맞이한 셈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일제시대에 의사의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아버지뿐만 아니라 삼 형제가 의도(醫道)를 걸었습니다. 삼 형제가 힘을 합쳐 병원을 세우셨으니, 바로 삼일병원입니다.

아버지께서 일찍 의업의 길을 걸으셨기에 우리 형제들은 비교적 순탄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말년에는 장학재단을 세우시고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도움을 주셨습니다. 실버 아파트에 들어오신 후로는 근무하는 직원 자녀들에게도 장학금을 주어 직원들도 대단히 고마워했습니다. “요새는 학생들에게 장학금 주는 재미로 산다.”고 말씀하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오복(五福)을 요샛말로 표현하자면 웰 리빙(Well living)과 웰 다잉(Well dying)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아버지께서는 고종명의 복까지 누리셨으니 여한이 없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입관하는 날 아버지의 시신 앞에서는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아버님,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고마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달리 생각나는 말이 없었습니다.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나, 집안의 어른으로서나, 의료인으로서나 아버지는 정말 큰 나무였습니다.

“아버님, 그토록 그리워하시던 어머님 곁으로 가셨으니 얼마나 좋으세요? 저희들 사는 모습을 보시면서 흐뭇한 표정을 지으실 수 있도록 저희들도 노력하겠습니다. 아버님, 감사했습니다. 아버님, 사랑합니다.”

필자소개

유능화

경복고, 연세의대 졸업. 미국 보스톤 의대에서 유전학을 연구했다. 순천향의대 조교수, 연세의대 외래교수를 지냈으며 현재 서울시 구로구 온수동에서 연세필 의원 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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