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벌백계 ’는 反 민주적이다 [이성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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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벌백계 ’는 反 민주적이다

2017.06.01

우리 사회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사자성어 중에 ‘일벌백계 (一罰百戒 )’라는 것이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어린 시절부터 이런 말을 듣고 성장했으니 매우 오래된 생활 단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사회인으로서 알게 모르게 교통 규칙을 비롯해 다양한 일반 생활 관련 법규에 노출되며, 법의 공익 정신에 대해서도 자연스레 ‘공부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은 독일 유학 시절에 본 TV 드라마의 내용이니 꽤나 오래전 이야기입니다. 피고 측 변호사와 검찰이 증거물을 놓고 열띤 법정 공방을 펼칩니다. 그런데 검찰이 제시한 ‘결정적’ 증거가 함정 수사의 결과물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재판장은 단호하게 그걸 증거 자료로 인정할 수 없다며 피고인 측에 무혐의판결을 내린다는 스토리였습니다. 그 드라마를 보던 필자는 피고인이 반드시 무거운 유죄 판결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재판장이 내린 무혐의 판결은 놀라움 그 자체였습니다. 

수사관들이 어려운 환경에서 잠복 활동을 통해 현행범을 덮쳐 체포하는 함정 수사와 그 함정 수사로 얻은 자료에 대한 개념 차이가 명료하게 다가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필자는 ‘증거 자료’의 법철학적 의미를 전혀 몰랐던 것입니다 . 

그 무렵 어떤 책을 읽다가 같은 맥락의 에피소드를 보았습니다. 그 책에서도 여러 명의 피의자가 중형을 받을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판사는 피의자 전원에게 ‘혐의 없음’으로 판결했습니다. 거기엔 용의자 중 한 명이라도 죄가 없다면 억울하게 형벌을 받아서는 아니 되기 때문이라는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재판은 공정하고 정의로워야지 ‘분풀이’여서는 안 된다는 교훈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필자는 법원이 약자의 마지막 보루임을 ‘공부’한 셈입니다.

1965 년 독일 사회는 ‘소멸시효(Verjaehrung) 기간’을 놓고 법리 공방 문제가 엄청난 이슈로 떠올랐습니다. 당시 독일 형법 (刑法 )에 따르면 살인 범죄도 공소시효가 20 년이면 소멸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종전 (終戰 ) 20 년인 1965 년이면 나치 범죄자도 ‘소멸시효’로 더 이상 처벌이 불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격렬한 논의 끝에 결국 당시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Ludwig Erhard,1897~1977, 재임 1963~66) 총리가 이끄는 보수-진보 , 일명 흑황연정(黑黃聯政, Schwarz-gelbe Koalition) 정부 하에서 연방국회는 나치 범죄자에게는 ‘소멸 시효’를 적용하지 아니한다.(Nichtverjaehrbarkeit von NS-Verbrechen)는 역사적 결정을 하기에 이릅니다. 필자는 이때 법철학적 윤리성이 무엇인지 ‘공부’하였습니다 .

주해 1.: 黑, 기독민주당 (CDU)/기독사회당 (CSU)과 黃, 자유당 (FDP). 
주해 2.: 1969년 다시 연방국회에서 논의 끝에 ‘민족학살 (Voelkermord)'인 경우 
‘소멸시효’를 적용하지 않으며, 그리고 1979년 이후 독일연방공화국에서는 
살인범죄에 한하여 ‘소멸시효’를 적용하지 아니하기로 하였다. 

요컨대 이런 사례를 통해 함정 수사로 얻은 증거 자료의 윤리적 문제, 혹시라도 있을 수 있는 약자의 인권 유린 등이 발생해서는 안 된다는 굳은 의지와 더불어 나치 범죄자에게는 ‘소멸시효기간’에 따른 문제를 엄격하게 적용해야 한다는 법리정신을 필자 같은 非 법조인도 ‘공부’하였던 것입니다.

필자는 ‘법리 정신 위에 윤리 정신’이 있다는 것을 몸과 마음으로 터득하였습니다. 즉 일상생활에서 윤리 규범은 반드시 지켜야 할 사회적 법규라는 점을 강하게 인식하였던 것입니다. 결코 ‘윤리 따로 법 따로’가 아니라는 ‘공부’를 하였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우리 사회에서 거침없이 사용하는 일벌백계라는 사자성어를 다시 한 번 생각해봅니다. 이는 한 명의 죄인을 엄하게 벌하면서 다른 100 명에게 ‘간이 서늘한’ 경고(警告)를 보내겠다는 뜻으로 나름 풀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엔 문제가 있습니다. 강하고 엄한 경고는 그럴듯합니다. 하지만 느닷없이 일벌(一罰)을 당하는 사람은 나머지 100 명 때문에 억울할 수도 있습니다. 이는 엄연한 인권 침해입니다. 이 엄청난 논리적 결함을 어떻게 설명할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벌을 당하는 소수인 약자는 왜 전혀 모르는 다른 사람 때문에 필요 이상의 벌을 억울하게 받아야 하는 것입니까? 이는 논리적으로도, 법리적으로도 옳지 않은 일입니다. 

염려스러운 것은 ‘일벌백계적 사고’는 反 민주주의적이며 민주주의 정신의 근간인 평등 정신 (galit)과는 멀어도 너무 먼 의식의 발현이라는 사실입니다. 아주 먼 옛날부터 내려오는 前 근대적 사고의 소산이라는 점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또한 이 ‘일벌백계’라는 표현을 크게 경계해야 하는 것은 ‘마녀사냥’이란 음침한 기류와 맥을 같이하기 때문입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이 칼럼을 필자와 자유칼럼그룹의 동의 없이 상업적 매체에 전재하거나, 영리적 목적으로 이용할 수 없습니다.

필자소개

이성낙

뮌헨의과대 졸업. 프랑크푸르트대 피부과학 교수, 연세대 의대 교수, 아주대 의무부총장 역임.
현재 가천대 명예총장, 의ㆍ약사평론가회 회장, (사)현대미술관회 회장, (재)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

박대문의 야생초사랑

노랑무늬붓꽃 (붓꽃과)  Iris odaesanensis Y. N. Lee

바람 찬 태백산 천제단 능선에서 모진 겨울바람 이겨내고 
순백의 꽃을 피워 올린 노랑무늬붓꽃입니다.
밝은 햇살 아래 하얀 꽃 이파리가 눈이 부십니다. 
   
노랑무늬붓꽃은 오대산, 대관령, 태백산과 
경상북도 일원의 높은 산에서 자라는 희귀식물입니다. 
그 서식지가 대체로 백두대간과 낙동정맥으로 보입니다.
순백의 바탕에 황금빛 무늬가 있어
화사함과 순박함이 함께 어우러진 우리나라 특산식물입니다.
   
1970년대에 이영노(1920~2008) 박사에 의해 오대산에서 처음 발견되어 
학명과 국명이 우리 이름으로 등록된 우리 꽃으로 여러해살이풀입니다.
개체 수가 적어 멸종위기종 2급으로 지정, 관리해 오다가 
최근 경북 운문산 등지에서 대량으로 자생하는 것이 발견되어 
멸종위기종에서 제외되었으나 여전히 보호가 필요한 우리 꽃입니다.
   
키는 20㎝ 정도로 큰 편은 아니며 잎은 칼 모양으로 
아랫부분은 가늘고 중간 부위가 넓었다가 위로 갈수록 좁아집니다. 
꽃은 꽃줄기에 두 송이씩 달리는데, 지름이 약 3.5㎝ 정도로 큰 편이며
큰 꽃잎 세 개가 바깥으로 젖혀져 있습니다.
젖혀진 꽃잎에 황금빛 노란 줄무늬가 나 있어
노랑무늬붓꽃이라 이름 지었으며 꽃말은 ‘기쁜 소식’입니다.
   
(2017. 5. 13 태백산 천제단 능선에서)

필자소개

박대문

환경부에서 공직생활을 하는 동안 과장, 국장, 청와대 환경비서관을 역임했다. 우리꽃 자생지 탐사와 사진 촬영을 취미로 삼고 있으며, 시집 『꽃벌판 저 너머로』, 『꽃 사진 한 장』, 『꽃 따라 구름 따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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