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찬미의 노래" Juan Diego Florez - Salut, demeure chaste et pure: VIDEO


Leipzig


"라이프치히는 예로부터 영주의 지배와 간섭에서 벗어난 자유도시(Freistadt)였다"

그리고 "왕과 귀족의 간섭대신 실력주의를 높이 여겼다"


  독일 동부 작센 주의 대도시 라이프치히는 예로부터 영주의 지배와 간섭에서 벗어난 자유도시(Freistadt)였다. 직물 공업과 무역업이 발달해 오래전부터 산업 자본이 빠르게 축적되었으며, 시민들은 종교와 내세에서의 구원 대신 실질과 자유를 숭상했고, 왕과 귀족의 간섭대신 실력주의를 높이 여겼다. 라이프치히 대학은 전 유럽의 깨어있는 젊은이들을 끌어 모았고, 독일 최초로 창간된 일간지는 시민들의 여론을 형성하고 주도했다. 


(라이프치히 아우어바흐스 켈러)


라이프치히 대학을 다니던 패기 넘치는 젊은 지식인 중에는 후일 독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인이자 작가로 성장할 요한 볼프강 폰 괴테도 있었다. 괴테가 창조한 파우스트 박사는 한계를 모르는 끝없는 욕망과 지배욕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는 평생을 학문에 투신하여 ‘만유 지식’을 얻었으나 청춘의 쾌락을 누리기 위해 악마에게 영혼을 저당 잡히고는 고삐 풀린 향락에의 유랑을 떠난다. 이성과 시민주의의 굴레에서 벗어나 극한의 쾌락을 추구하는 파우스트 앞에 만족이라 단어는 허용되지 않을 터였다. 그래서 그는 악마 메피스토펠레와 이렇게 약속한다. 어느 순간 스스로의 삶에 만족해 ‘멈춰라, 너는 정말 아름답구나’라고 외친다면 당장 자신의 영혼을 가져가 버려도 좋다고 말이다. 


구상에서부터 완성에 이르기까지 무려 60여년이 넘게 걸린 거대한 희곡 작품인 <파우스트>는 모두 1만행이 넘는 운문으로 이뤄진 극시(劇詩)다. 여기서 괴테는 게르만 문화의 고유 가치를 탐구하고, 고대 그리스 문명이 이룩해놓은 유럽 문화의 보편적 질서를 반추하며, 또한 기독교적 세계관에 입각해 인간 정신의 진정한 구원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고 있다. 


거대한 정신세계를 지닌 우주적 작품이지만 기본적인 틀은 괴테의 청년시절에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라이프치히 대학 법학부 학생이었던 청년 괴테는 소설과 시 쓰기에 골몰하던 문학 청년이었다. 그가 학교 인근 지하 선술집 아우어바흐스 켈러(Auerbachs Keller)에서 맥주로 목을 축이며 써내려간 습작과 메모가 후일 인류사의 거대한 저작으로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으니, <파우스트>는 라이프치히가 낳은 작품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구노 <파우스트> 중 ‘정결한 집’ 테너 후안 디에고 플로레즈)


또한 라이프치히는 깊고 성숙한 클래식 음악 전통으로도 유명하다. 대개 고전음악이란 왕이나 귀족의 후원을 받아 명맥을 유지하게 되지만 라이프치히에서는 달랐다. 상공업으로 부를 축적한 실력 있는 부르조아 시민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직접 작곡가를 후원하고, 역량 있는 음악가들을 초청해 크고 작은 음악회를 열었다. 급기야는 시민들이 주축이 되어 오케스트라를 창단하기에 이르는데, 1781년 결성된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Gewandhausorchester Leipzig)가 그것이다. 게반트하우스란 직물협회 건물을 말하는데, 원래는 선술집이나 카페 등지에서 열리던 정기연주회를 직물협회 1층으로 옮겨와 개최하던 데서 유래한 것이다.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는 세계 최초의 민간 오케스트라로, 라이프치히의 빛나는 시민정신과 진취적인 계몽의식 속에 탄생한 인류 역사의 쾌거였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펠릭스 멘델스존은 1835년부터 이 오케스트라의 카펠마이스터로 지휘봉을 잡았다.


(오늘날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의 모습)


1840년의 일이었다. 마인츠 태생으로 서유럽 최초로 금속활판 기술을 발명해 유럽의 지식 대중화 역사를 단숨에 뒤바꾼 남자, 요하네스 구텐베르크가 탄생 400주년을 맞이했다. 대주교가 있는 그의 탄생지 마인츠가 기념일을 살뜰히 챙길 줄 알았지만, 되려 열광적인 축제의 분위기 속에서 구텐베르크의 위업을 되새긴 건 라이프치히에서였다.


우선 라이프치히야말로 구텐베르크의 활판기술이 가져다 준 혜택과 축복의 가장 큰 수혜자였다. 그들은 독일 최고의 대학을 가지고 있었고, 독일 최초로 신문을 발행해 나눠 읽었다. 사분오열되고 억압적인 후진 정치체제로 신음하던 독일 내에서도 가장 앞서간 자유사상의 전진기지 역할을 하던 것이 라이프치히였다.


이에 멘델스존이 펜을 들어 장대한 규모의 교향곡, 사실은 칸타타에 가까운 교향적 합창곡을 작곡했다. 지식 대중화의 선구, 계몽사상을 널리 전파하는 데 가장 결정적인 도움을 준 구텐베르크를 찬양하는 의미도 배경에 담겨 있었고, 동시에 신에 대한 경건하고 고졸한 찬미라는 의미를 더욱 강하게 담았다. 멘델스존의 <교향곡 제2번> 롭게장(Lobgesang), 즉 ‘찬미의 노래’는 그가 남긴 초유의 대작이며, 동시에 가장 아름다운 음악이기도 하다.


(멘델스존 <교향곡 제2번> 리카르도 샤이 지휘, 라 스칼라 필하모니 오케스트라)


장대한 이 음악을 듣고 충만하고 심오한 감동에 젖은 사람들은 헨델의 기념비적 명곡에 빗대 이 곡을 이렇게도 불렀다. ‘라이프치히의 <메시아>’. 복잡하고 거대한 스타일의 음악이라 현대에 와선 자주 연주되지 않지만, 그렇기에 더욱 소중하게 생각되는 명곡이라 할 것이다.


출처 발코니

케이콘텐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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