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정하지 말라! 확률로 말하라! [정숭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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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정하지 말라! 확률로 말하라!

2017.04.12

‘불확정성의 원리’는 독일 물리학자 베르너 하이젠베르크(1901~1976)가 1927년 발표했습니다. 물리학, 그중에서도 양자역학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이론이지만 현실의 삶에 대한 태도와 방식도 가르쳐줍니다. 보통 사람은 평생 한 번도 마주칠 일이 없을 복잡하고 어려운 물리학 용어들과 수식으로 이뤄진 이 이론이 ‘밥·일·꿈’이라는 책에서 비교적 쉽게 풀이된 것을 보았습니다. 

책은 이 원리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가 사물의 속도를 정확하게 측정하려 하면 할수록 그 위치의 정확성은 떨어진다. 반대로 사물의 위치를 정확하게 측정하려 하면 할수록 그 속도의 정확성은 떨어진다. 사물을 측정하는 바로 그 도구가 사물과 영향을 주고받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미립자의 세계에서 사물의 위치를 측정하기 위한 도구로 빛을 사용하면 빛은 측정하는 그 순간 에너지로 사물에 작용하여 위치에 영향을 주게 되는 것이다. 즉 우리는 현상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으며 오직 확률로만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좁쌀의 현재 위치를 측정한다고 자와 핀셋을 좁쌀에 들이대는 순간 좁쌀이 움직이는 경우와 같습니다.) 

책은 이 원리가 우리 삶에 영향을 끼치게 된 데 대해서는 ‘결정론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해주었기 때문’이라고 알려줍니다. “근대 물리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뉴턴의 역학에 따르면 어떤 순간에 어떤 물질의 위치와 속도를 알면 미래에 이 물질이 어디 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모든 것은 미리 결정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불확정성원리에 의하면 오직 확률을 통한 범위와 추세만 알 수 있을 뿐 미리 결정되어 있는 것은 없다. 이 두 개의 견해는 인간의 사고와 행동에 아주 다르게 나타난다.” 

20여 년 전에 방식이 바뀐 일기예보가 그 예라고 합니다. “근대적 (즉, 뉴턴 역학적) 사고로 일기예보를 하면 ‘내일 비가 온다’ 또는 ‘오지 않는다’로 한다. 온다고 하면 우산을 챙긴다. 비가 오지 않으면 기상청를 욕하게 된다. 현대적 사고로 일기예보를 할 때는 ‘내일 비가 올 확률은 60%’라고 한다. 그러면 우산을 챙길지 말지는 자신이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한다. 우산을 챙겼는데 비가 오지 않으면 ‘괜히 가져왔구나’라며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기상청을 욕할 확률이 줄어들었다. 근대적 사고와는 다른 사고와 행동을 보이는 것이다.”

나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이분법(二分法)을 근대적, 결정론적 사고방식의 대표선수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편이 아니면 누구든 우리의 적일 뿐’, ‘나의 정의만이 정의이며 다른 모든 것은 불의일 따름’이라는 식의 이분법에는 확률, 즉 다른 가능성에 근거한 판단이 끼어들 여지가 없습니다. 미리 정해놓고 두 편으로 나눠놓은 것이어서 그렇습니다. 

문제는, 이처럼 ‘흰 것이 아닌 것은 오직 검은 것이다’라는 이분법적 사고에 젖은 사람들은 세상에는 무지개보다 훨씬 많은 색깔이 있다는 걸 애써 외면하려 한다는 겁니다. 이런 사람들은 비 올 확률 60%에서 우산을 안 챙겨 가고서는 비를 한 방울이라도 맞으면  기상청에 욕을 쏟아부을 확률이 매우 높은 사람들입니다. 

‘밥·일·꿈’의 저자는 장명국 내일신문 사장입니다. 이 책은 신문 창간 이후 지금까지의 도전과 그것을 극복한 기록입니다. 70~80년대의 대표적 노동운동 이론가로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옥살이까지 했던 그는 언론 경영자로 변신했으며, 성공적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불확정성의 원리’에 기초한 열린 마음, 열린 생각 덕분일 수 있다고 봅니다. 단정하지 말고, 확률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라는 그 원리 말입니다.

장 사장은 불확정성의 원리를 설명한 후 끝에 가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불확실한 혼돈의 세계에서 미래를 확실히 예측(단정)할 수 있는 길은 없다. 단지 확률에 의지하여 스스로 매 순간순간 판단하고 행동할 수밖에 없다. 불확정성의 원리를 염두에 두면서부터 필자는 언제든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사고를 하게 되었다. 완벽(100%)은 없다. 오늘의 완벽이 내일은 아닐 수 있다.”  나는 이 말에는 ‘미립자의 세계일망정, 사물의 위치와 속도도 확정할 수 없는데 누군들 천길만길보다 더 깊은 사람의 속을 어떻게 단정(斷定)하고 예단(豫斷)할 수 있겠냐’는 생각이 담겨있다고 봅니다.

세상에서 인정될 만한 이분법은 ‘세상은 이분법으로 생각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뿐입니다. 다른 모든 이분법은 억지일 따름입니다. 분열을 획책, 조장하고 고착시킨 후 억압하고 착취하려는 책략일 뿐입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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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정숭호

1978년 한국일보 입사, 사회부 경제부 기자와 여러 부서의 부장, 부국장을 지냈다. 코스카저널 논설주간, 뉴시스 논설고문, 신문윤리위원회 전문위원 등 역임. 매주 목요일 이투데이에 '금주의 키워드' 집필 중. 저서: '목사가 미웠다'(2003년), '트루먼, 진실한 대통령 진정한 리더십'(201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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