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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가는 한국 영화, 피와 욕밖에 없나?
2017.03.27
모로코 정부가 주최한 '아프리카의 발전과 남-남 협력 증대 방안' 포럼에 초청받아 지난주 모로코를 다녀왔습니다. 인천공항에서 아랍에미리트의 두바이까지 9시간 이상, 거기에서 모로코의 카사블랑카까지 6시간 이상 가야 했습니다. 최종 목적지인 다클라(Dakhla)라는 소도시까지 가는 데는 또 국내선 비행기로 2시간 30분이 걸렸습니다. 갈아타려고 대기한 시간까지 다 합치면 24시간 이상이니 가는 데 하루, 오는 데 하루가 소요된 셈입니다.좌석은 초청자 측이 비즈니스석(국내선은 이코노미)으로 예약해주어 편했는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니 지루한 건 어쩔 수 없었습니다. 가져간 책을 좀 읽으려 했지만 불을 켜면 옆 사람이 불편할까 봐 신경도 쓰이고 잘 집중도 되지 않아 대신 영화를 보기로 했습니다. 처음엔 ‘제이슨 본’과 같은 외국 스릴러를 이것저것 헤집다가 ‘아시아 영화’로 분류된 곳에 우리나라 영화도 있기에 반가워서 작품 제목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다 영어로 돼 있고 평소 영화관에 잘 가지 않아서 정확한 원제를 알기 어려웠습니다. 기내에서 그 영화들을 보거나 나중에 검색한 결과 기내 상영되는 한국 영화의 제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괄호 안에 표기한 것은 주연배우입니다. ‘아수라’(정우성 황정민), ‘특별수사’(김명민), ‘럭키’(유해진), ‘인천상륙작전’(리암 니슨, 이정재), ‘덕혜옹주’(손예진), ‘범죄의 여왕’(박지영) 등등. 모로코를 갈 때와 올 때 이런 영화들을 보았습니다. 결론을 말하면 ‘인천상륙작전’은 논외로 치고(특별히 언급할 게 없으니) ‘범죄의 여왕’은 저예산 독립영화로서(귀국 후 확인한 내용임) 연출력과 배우들의 연기가 탄탄하고 구성도 그럴 듯한 데 비해 다른 작품들은 황당하거나 거부감이 커 영화를 본 게 후회될 정도였습니다. 이미 제작 당시부터 논란이 된 작품이지만 ‘덕혜옹주’는 역사 왜곡이 너무 심해 왜 영화를 만들었을까, 조선 황실에 대한 동정심과 미안함 때문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한국인들도 마찬가지이지만 아랍에미리트 항공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그 영화를 보면 일제 강점기의 조선과 일본의 역사에 대해 잘못 알게 될 것입니다. 영화는 역사 자체가 아니라고 말하겠지만, 역사 자체를 왜곡하는 것은 영화의 잘못이자 해악이 아니겠습니까? 나머지 영화들은 다 범죄와 관련된 액션작품들입니다. 그저 때리고 부수고 싸우고 죽이고... 이야기 전개도 황당한 데다 화면에 피와 폭력이 낭자합니다. 개중에는 실화도 있다지만, 한국은 폭력과 범죄의 나라라고 선전하고 있는 꼴입니다. 더욱이 욕을 빼면 영화를 만들 수 없는 걸까요? 보는 내내 불편할 정도로 애나 어른이나 양복 입은 검사나 시장이나 변호사 사무장이나 양아치나 다 욕을 입에 달고 삽니다. 욕할 줄 모르는 사람은 한국에서 살 수 없을 것 같아 보입니다. 우리나라 영화가 모두 다 그런 건 아니겠지요. 그리고 폭력과 범죄가 심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다른 나라들보다는 덜하다고 생각되는데, 어째서 이런 작품 위주로 기내영화가 선정된 것인지 궁금합니다.올해 아카데미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 등 6개 부문상을 받은 미국 영화 ‘라라랜드’도 기내에서 상영되고 있었습니다. 뮤지컬이면서도 흥겨운 음악과 영상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보는 이들에게 가볍지 않은 메시지를 안겨준 좋은 작품입니다. 우리는 왜 이런 영화를 기내에서 상영하게 하지 못할까, 아니 왜 이런 걸 만들어 내지 못할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에겐 막가는 액션스릴러밖에 없나, 정겹고 감동적인 로맨스나 드라마는 없는 것인가. 삶과 시대에 대해 깊이 성찰하는 심각하고 진지한 영화는 아예 안 만드는 건가, 못 만드는 건가. 미국 인도 이란 일본 중국 유럽 등등 전 세계의 영화가 소개되는 기내영화판에서 한국 영화가 제일 못나고 초라해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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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임철순
1974~2012년 한국일보 근무. 문화부장 사회부장 편집국장 주필 및 이사대우 논설고문을 역임했다. 한국기자상, 삼성언론상, 위암 장지연상 수상. 현재 이투데이 이사 겸 주필, 자유칼럼그룹 공동대표, 한국언론문화포럼 회장, 시니어희망공동체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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