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까지가 자유인가 [김홍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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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까지가 자유인가

2017.03.14

“목자가 양의 목을 물고 있는 이리를 쫓아버렸다. 양은 목자를 자신의 해방자라고 감사한다. 그러나 이리는 자유의 파괴자라고 목자를 비난한다.…이는 똑같은 행동을 두고 양과 이리가 자유의 정의에 대한 견해를 달리 하기 때문이다.”(링컨의 연설문 중에서)

‘자유’, 인간이 만든 지고지순한 가치 중의 하나입니다. 그 자유가 요즘 남용되거나 심하게 변질 왜곡되고 있습니다. 살생 공포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는 양의 자유와 약육강식의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이리의 자유처럼.

로마의 캄포 데 피오리 광장. 그곳엔 ‘자유로운 사고의 순교자’ 지오르다노 브루노(Giordano Bruno: 1548~1600)의 동상이 우뚝 서 있습니다. 이탈리아 출신 철학자이자 수학자 천문학자인 브루노는 젊은 시절 수도원에서 신학을 공부하다 당시 이단으로 몰린 아리우스파를 지지하는 발언으로 파문당했습니다. 그는 처벌을 피해 스위스 프랑스 독일 영국 등지를 전전하며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설파했습니다. 그러나 끝내는 로마 교황청의 감옥에서 7년간 혹독하게 시달리며 재판을 받아 오다 클레멘스 8세 교황의 명령으로 화형을 당했습니다. 

아리우스파란 4세기 초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리비아 출신 신부 아리우스(Arius)가 주창한 기독교 신학을 따르는 종파입니다. 아리우스는 성부·성자·성신의 삼위일체를 반대하고, 성자(예수)는 창조된 존재(피조물)이며 성부에 종속된 개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의 주장은 아리우스주의라는 신학의 흐름으로 발전했으나 로마 가톨릭 교회는 제1차 니케아공의회(325년)에서 이를 이단으로 배격하고 아리우스파를 파문했습니다. 아리우스주의자들은 이후 독일에서 명맥을 유지하다 교황청의 탄압으로 완전히 사멸했습니다.

브루노는 각국을 돌아다니며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뛰어넘어 천체에는 수많은 태양계가 존재한다는 학설을 내놓았습니다. 런던에서는 가식과 허위에 가득 찬 옥스퍼드대학 박사들의 위선을 강하게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다양한 저술을 통해 인간은 신앙에 의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활동이 존엄하다고 주장했습니다. 비록 주류에서 밀려났지만 창조적 비판적인 자유로운 사고에서 한 치도 물러설 줄 모르는 그는 당시의 교황에겐 ‘회개할 줄 모르는 고집 센 이단아’였습니다.

자신의 이론을 무조건 철회하라는 교황청의 강요에 브루노는 “나에겐 철회할 만한 의견이 아무것도 없다”고 맞섰습니다. 그리고 사형 선고를 한 재판관들에게 “선고를 받은 나보다 선고를 내리는 당신들의 두려움이 더 클 것”이라는 말을 남긴 채 불에 타 죽었습니다.

그가 화형당한 바로 그 자리에 세워진 브루노 동상(에토레 페라리 조각)에는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습니다.

‘브루노에게, 그대가 불에 태워짐으로써 그 시대가 성스러워졌노라.’

‘자유’, 신에게 복종하고 신앙을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신의 가치’를 브루노는 ‘인간 가치’의 주류로 치환한 선각자 중의 한 사람입니다. 1517년 교황청의 면죄부 판매에 반발하며 95개 조의 반박문 게시를 발단으로 이뤄진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1483~1546 )의 종교개혁이 올해로 500년을 맞습니다. 그 루터조차 최근에야 사면을 받았으니 자유는 숭고한 인간의 가치로 자리매김했다고 볼 수 있을까요? 그러나 진정한 자유는 사상 이념 사변 이기 궤변 등 여러 가지 변수에 휩쓸리며 정착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유는 인간사회 최고의 가치로 정립하기까지 엄청난 난관을 겪어야 했습니다. 종교적 억압, 정치적 탄압, 경제적 지배, 관습적 차별, 제도적 소외, 윤리적 압박으로부터 시민적 자유를 쟁취하기까지 수백만 수천만 명의 희생이 따랐니다. 그 자유는 일반적으로 종교적 자유 물질적 자유 정치적 자유로 학자들은 요약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보트 피플, 아프리카와 중동 지역의 난민 행렬, 끊임없는 북한 인민의 탈북,트럼프 장벽 등 자유를 갈구하는 행진과 이를 막는 벽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가장 신장된 자유의 개념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자유지상주의자들은 현대국가의 정책과 법 가운데 다음 세 가지를 반대합니다.

△온정주의~인명 보호를 명분으로 한 안전벨트나 헬멧 착용을 의무화하는 법은 개인의 선택권을 침해하는 것이다.

△도덕의 법제화~다수가 도덕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소수에게 강요하는 법은 반대한다. 자의에 의한 합의로 이루어진 매춘을 법으로 금지하는 것은 옳지 않다.

△부의 재분배~부의 재분배를 위한 과세는 강제노동이나 절도와 같다. 국가가 가난한 사람을 돕도록 강요하는 것은 부자 돈을 훔쳐 노숙자에게 나눠주는 것과 차이가 없다. 

지적 신념으로 자유지상주의를 옹호한 사상가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경제학자이자 철학자인 하이에크(Friedrich Hayek: 1899~1992)와 프리드먼(Milton Friedman: 1912~2006) 등입니다. 하이에크는 <자유 헌정론>에서 “전반적인 경제적 평등을 성취하려는 시도는 무엇이든 강압적이며 자유사회를 파괴한다”고 주장했습니다. 1974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그는 시장자유를 중시하고 계획경제를 비판하는 신자유주의의 이론적 기반을 마련한 사람으로 꼽힙니다.

하이에크와 같은 시대를 산 프리드먼(1976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은 <자본주의와 자유>에서 “국가의 역할로 인정되고 있는 많은 행위들이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위법행위”라고 주장했습니다.  강제적인 사회보장제도, 정부가 운영하는 퇴직프로그램, 최저임금제, 정부가 인정하는 자격증(이발사, 미용사, 의사, 변호사 등) 같은 제도입니다. 국가가 개입할수록 개인의 ‘선택할 자유’가 줄어든다는 논리입니다. 다만 하이에크나 프리드먼이 주장하는 자유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합의에 의한 계약이어야 한다는 단서가 붙습니다. 

<정의론>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마이클 샌델((Michael Sandel: 1953~, 하버드대학 교수)은 신자유주의자들의 자유지상주의를 이렇게 반박합니다. “좋은 삶과 정의·공공선을 추구하기 위해 모든 것을 ‘선택할 자유’에 맡길 것이 아니라 공동체가 사람들의 가치와 행위를 통제해야 한다. 시민들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을 가진 공동체는 현대사회에서 국가밖에 없다”고.

자유가 최대로 보장된 시장사회는 오히려 불평등(inequality)과 부패(corruption)를 유발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도덕의 입법화’입니다.

그는 전통적 규범을 몰아내고 시장 지향적 사고가 몰고 온 현상을 다양하게 제시했습니다.(<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에서) 특정 차량 우선 차로, 전담의사 제도, 불임시술 현금 보상, 대리모 서비스, 탄소배출권, 바다코끼리 사냥권, 혈액 판매, 사인(sign)의 거래, 기업 이름을 딴  경기 명칭, 결혼식 축사 판매, 난자와 정자은행, 불임시술 장려금 등입니다. ‘선택할 자유’ 명분으로 탐욕이 가득 찬 시장지상주의의 폐단을 없애고, 공동체의 도덕과 ‘선택하지 않은 의무’(육아, 효도, 소속 공동체를 위한 공공선 등)를 접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난 몇 달 동안 우리는 나라를 뒤엎는 변화를 보고 겪었습니다. 적폐를 일소하는 혁신이 아닌, 권력이 바뀌는 혁명입니다. 물(민중)이 배(지도자)를 뒤집었습니다. 세계의 언론이 ‘평화적 시위’라고 격찬했습니다. ‘국민이 행복란 나라’를 만들겠다고 출범한 박근혜 정권은 ‘국가의 불운’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대신 남은 건 촛불과 태극기로 상징된 두 동강 난 민심과 미국 중국 일본 등 초강대국들의 도발적 쇼비니즘에 속수무책인 국가기반뿐입니다. 우리가 자초한 결과입니다.

자유!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던져 쟁취한 인간의 가치입니다. 그 지고한 가치를 우리는 공기처럼 마시고 음미하며 살아왔습니다. 자유극장, 자유시장, 자유시간, 자유투어,자유방임, 자유칼럼, 자유로, 자유CC, 자유학기제, 자유경제원, 자유총연맹, 자유게시판, 자유의 여신상….

하지만 시위 마당에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쏟아낸 말과 행동은 어떻게 쓸어 담을까요? 혁명, 분노, 처단, 내란 같은 섬뜩한 발언에다 단두대, 함거, 인공기, 나체그림 따위의 증오를 담은 퍼포먼스들 말입니다.

진정한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나라는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한마디로 단정할 수는 없지만 말로만 선의·정의로 포장된 자유를 외칠 것이 아니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고 나라를 되살리는 합일점을 찾는 게 최선의 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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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김홍묵

경북고, 서울대 사회학과 졸업.  동아일보 기자, 대구방송 이사로 24년간 언론계종사.  ㈜청구상무, 서울시 사회복지협의회 사무총장, ㈜화진 전무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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