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왜 가깝고도 먼 나라여야 하나? [정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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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왜 가깝고도 먼 나라여야 하나?

2017.03.03

유라시아 대륙에서 남쪽으로 불거져 나온 한반도에서 일본열도는 매우 가깝습니다. 그러나 마음으로는 그리 가깝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저명한 교수 한 분은 한일 관계는 서로 상대에 대한 콤플렉스 때문에 거리감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하면서 한국은 일본에 대해 ‘현대사 콤플렉스’가, 일본은 한국에 대해 ‘고대사 콤플렉스’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럴듯한 설명입니다. 우리가 일본을 쉽게 용납할 수 없는 것은 그들의 조선 침탈에 이어 일제강점기 중 가혹한 지배를 당해야 했던 아픈 기억 때문이지요. 그런데 일본도 고대에 우리가 그들에게 높은 문화를 전달해 준 것에 대해 어떤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을까요? 저는 그간의 경험에 비춰 후자의 콤플렉스는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해도 미미할 뿐이라고 봅니다.

지난달 중순 '세계역사NGO포럼(대표 이장희 외대 명예교수)'이 꾸린 한일 역사유적 탐방단의 일원으로 큐슈 지역을 여행하였습니다. 도쿄나 오사카는 몇 번씩 가보았고 히로시마, 쓰시마에도 발을 들여놓았지만 정작 우리와 오랜 관계를 맺어온 큐슈에는 여태 가보지 못해 늘 마음에 걸렸는데 이번에 숙원 하나가 풀린 것입니다. 관광이 아니라 역사 탐방이어서 더욱 의미가 있을 것이란 기대를 하고 갔습니다. 주관 단체가 역사를 전문으로 하는 NGO였기에 박사님들도 여럿 있었고 또 유홍준 교수의 '일본문화답사기' 큐슈 편도 읽었기에 말하자면 ‘준비된’ 역사 탐방객이었습니다. 그런 저의 기대는 100% 달성된 셈입니다.

9개의 현(縣)을 품고 있어 큐슈 즉 구주(九州)로 불리는 이 지역을 한꺼번에 다 가볼 수는 없어 주로 북부의 후쿠오카(福岡)현, 사가(佐賀)현, 나가사키(長崎)현 등 3개 현만 돌았는데 우리와 관련이 큰 역사 유적은 대충 돌아본 것으로 생각됩니다. 고대사 유적으로, 한반도 도래인이 전한 야요이(彌生) 문명의 터 요시노가리(吉野ヶ里) 유적, 고대 행정수도인 다자이후(太宰府) 정청(政廳) 터, 신라인 후손으로 알려진 학문의 신(神) 스가와라 미치자네(菅原道眞, 845~903)를 모신 텐만구(千萬宮), 백제 패망 후 나당(羅唐) 연합군의 왜(倭) 본토 침공에 대비해 쌓은 백제 식 수성(水城) 터 등을 둘러보았습니다.  

삼국 중 백제가 일본과 교류가 가장 많았던 만큼 백제 연고지로 의미가 큰 제 25대 무령왕 탄생지도 방문하였습니다. 가라쓰(唐津市) 시 요부코(呼子) 항에서 배를 타고 가카라시마(加唐島)에 가서 오비야(オビヤ) 포구의 ‘무령왕생탄지(武寧王生誕地)’ 표지 지점과 첫 목욕 장소인 작은 우물을 찾아 아득한 감회를 느꼈습니다. 그리고 2006년 백제쪽을 향해 공주시와 가라쓰 시가 합작으로 세운 기념비를 참배하였습니다. 그 섬을 내왕하는 유일한 나룻배의 선장이 무료로 직접 안내도 했는데 그의 모습에서 어쩐지 한반도 도래인의 흔적이 보이는 듯했습니다. 나룻배를 타고 이 마을에 들어오는 사람은 무령왕 탄생지를 보러 오는 한국인 탐방객이 대부분이고, 일본인들은 개를 키우지 않는 이 섬에 유난히 번성하는 다양한 고양이들을 보러 찾아온다고 합니다. 나룻배의 출항지인 요부코 앞바다는 일본에서 제일 맛있는 오징어가 잡히는 곳으로 알려져 있으나 우리 일행은 먹는 운이 없었는지 그날 오징어 배가 들어온 게 없어 그 유명한 요부코 오징어를 먹어보지 못했습니다. 

한일 근대사에서 우리에게 크나큰 의미가 있는 곳인 히젠나고야성(肥前名護屋城) 터도 찾았습니다. 임란 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의 성주들을 불러모아 조선 침략의 발진 기지로 쌓은 거대한 성(城)입니다. 이들이 정명가도(征明假道)를 내걸고 침략하려던 조선을 이 언덕에서 호시탐탐 노렸을 것을 생각하니 우리의 지정학적 형세가 엄중하다는 사실이 무겁게 마음을 눌렀습니다. 그리고 임진(壬辰), 정유(丁酉) 양차의 침략전쟁(1592~1599)이 끝난 후 공주 부근에서 일인들이 잡아갔던 이삼평(李參平)과 그 일행이 자리 잡아 일본 도자기 문화를 꽃피운 아리타((有田) 방문도 깊은 감회를 일으켰습니다. 일본의 도조(陶祖) 또는 도예의 신(神)으로 추앙받는 그의 신사를 참배하면서 아득한 그 시절 우리의 기술과 문화가 이곳으로 전달되었다는 사실과, 이에 더해 우리 도공들이 현지에서 합당한 대우와 존경을 받았다는 것에 나름 흐뭇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우리 양민을 강제로 데려온 죄는 용서할 수 없지만 우리 기술로 새로운 도자기를 만들어 일본 내에서 화려한 도자기 문화를 세우고 네덜란드를 비롯한 유럽 일대에 이를 소개한 것은 칭찬할 만한 일이라 생각됩니다.

현대사의 흔적으로는 나가사키 원폭 자료관과 평화공원을 방문한 것인데 이에 관해서는 기왕에 많은 언급이 있었으므로 특별히 더 기록할 것은 없습니다. 다만 일인들이 원자폭탄을 맞고 입은 피해만 부각하고, 왜 그런 참혹한 사단(事端)에까지 이르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이나 자료가 전무하여 이런 자료관이 과연 후세에 올바른 역사의 교훈을 전해 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번 답사기에서 정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군함도(軍艦島) 방문입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문제로 양국 간에 한 차례 시끌벅적하기도 했었고 최근에는 한수산의 소설 ‘군함도’가 나와서 인구에 회자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곳을 방문하게 되니 미리부터 무언가 가슴을 치밀고 올라오는 듯하였습니다. 파도가 너무 거칠어서 두 번 접안을 시도하고도 결국 성공하지 못했지만 섬 주위를 가까이 돌면서 아픈 역사를 되새기기엔 충분하였습니다. 

원래 이름은 하시마(端島)인데 매립으로 확장된 섬 전체를 한 바퀴 둘러싼 굳건한 방파제에다, 신사, 학교, 아파트 등을 건축하여 마치 군함 같은 모양을 띠게 됨으로써 군함도라 불리게 된 것이지요. 작은 탄광 섬으로 시작하여 1890년경 미쓰비시가 인수하면서 본격적인 산업생산 체제로 들어갔습니다. 소위 태평양전쟁 중 군함과 무기 등 군수물자 용 철강 생산에 불가결한 석탄 채굴을 책임졌던 탄광입니다. 바다 밑 해상(海床) 7백~1천미터 깊이에 수 킬로미터로 뚫린 지하 탄갱을 운영하였는데, 한때 거주자가 5천3백에 달할 만큼 탄광이 번성하여 당시 이 섬의 인구밀도가 도쿄의 9배나 되었다고 합니다. 1970년대에 폐광이 되었으며 군함의 형태를 이루는 각종 건축물들도 이제는 폐허가 되어 붕괴 위험이 현저하였습니다. 강제노역에 종사한 조선인과 중국인 징용자들의 노동력 착취와 인권유린 등 수치스러운 역사를 지닌 섬을 그들이 왜 유네스코 산업유산 등재에 포함한 것인지 잘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메이지유신 이후에 성취한 산업 군사 강국이란 명성에 대한 짜릿한 추억을 놓기 싫다는 심사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사가현 답사 길에 이토국(伊都國)이란 마을에서 '이토국역사박물관'을 방문한 것 또한 빠뜨릴 수 없는 대목입니다. 이토국에 관한 역사 기록은 위지왜인전(魏志倭人傳)에 나오는데 옹관총과 청동기 문화의 전성기를 누리던 이 작은 나라는 당시 중국의 한, 위, 그리고 우리 백제와 활발한 교류를 하였다고 합니다. 우리에게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은 이 작은 마을에 이런 당당하고 잘 기획된 역사박물관이 세워져 있다는 데서 일본의 대단함을 새삼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곳 사람들은 먼 과거에 중국과 조선에서 문물을 들여왔다는 사실에 긍지를 느끼고 있는 것으로 보였으며 자원봉사로 일부러 나온 노신사의 설명에서도 그런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는 우리 선조에게 감사한다는 말을 일행에게 해주기도 했습니다.

4박 5일의 짧은 일정으로 돌아본 소감이긴 하지만 일본이란 나라를 아는 데 큰 도움이 된 여행이었습니다. 여행 전후 일본 지도를 보면서, 또 유적지를 찾아 내지의 산하를 누비면서, 일본은 참으로 땅이 넓고 물산이 풍부하다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되었습니다. 사방으로 넓게 퍼진 영토와 이 영토가 품은 광대한 바다는 이 나라가 천혜의 강국일 수밖에 없다는 관찰을 하게 합니다. 이런 크고 오래된 나라에서 나름의 고유한 문화인들 왜 없었겠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섬나라인 그들은 한편 배타적이면서도 다른 한편 남으로부터 잘 배우는 습성이 있어 근대에 들어와서도 과거처럼, 바깥 세계로부터 빠르게 문물을 습득함으로써 이처럼 강대국이 될 수 있었다고 봅니다.

우리는 식민지배라는 현대사 콤플렉스 때문에 강대국인 일본을 있는 그대로, 보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를 주저해서 그런지 일본을 대수롭지 않게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현실적으로는 매우 가깝지만 마음속으론 멀고 먼 나라로 인식합니다. 물론 작금 일본의 비열하고 옹졸한 행태가 그렇게 만드는 측면이 크다고 봅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일본은 우리에 대해 이렇다 할 고대사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들은 고대에 한반도로부터 문화적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이를 활용하여 찬란한 일본 문화를 구축하였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일왕(日王)이 스스로 나서서 왕가의 혈통에 백제인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고백하기도 한 나라가 아닙니까?

우리는 일본 문화는 오로지 일본으로 건너간 우리 조상이 일으켜 준 것으로 배워왔고 또 그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과연 그랬을까요? 저는 일본 역사나 한일 교류사를 깊이 있게 공부하지는 않았지만 상식적으로 볼 때 이는 지나친 아전인수(我田引水)가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고대에 백제, 신라, 고구려, 나아가 발해까지도 일본과 교류하면서 일본에 큰 영향을 주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우리가 ‘미개한’ 일본에 문명을 송두리째 가져다주었다는 식의 인식은 결코 올바르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는 그야말로 ‘현대사 콤플렉스’로 인한 왜곡된 역사 인식이 아닐까 싶습니다. 지금도 우리가 과연 일본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면서 일본이란 나라를 제대로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더욱 절실해집니다. 이제 우리도 일본에 대해 그때그때 꾸짖을 것은 준엄하게 꾸짖더라도 평정한 마음으로 이웃 나라를 바라볼 만큼 여러 면에서 성숙했습니다. 과거사에 대한 콤플렉스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일본을 알아야 미래의 양국 관계를 건전하게 구축해 나갈 수 있습니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그래야만 먼 옛날에 그랬듯이 서로 가깝고도 가까운 나라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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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정달호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후 줄곧 외교관으로 일했으며 주 파나마, 이집트대사를 역임했다. 은퇴 후 제주에 일자리를 얻는 바람에 절로 귀촌을 하게 되었고, 현재 제주평화연구원 객원연구위원으로 있으면서 한라산 자락에 텃밭과 꽃나무들을 가꾸며 자연의 품에서 생활의 즐거움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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