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시대의 벡텔'과 한국 건설업


[이젠 바꿔봐요]

'40년 외길 건설엔지니어' 

이순병 한국공학한림원 원로회원의 주문


   이순병 한국공학한림원 원로회원(사진) 작년 9월, 118년의 역사를 가진 가족회사 ‘벡텔’의 5세대 CEO로 35세의 브렌덴 벡텔(Brendan Bechtel)이 취임합니다. 벡텔은 한국 건설산업 선진화의 대표적 벤치마킹 대상인 미국 최대의 건설회사지요. 

 

그런데도 그간 이 회사에 대한 정보는 상당히 닫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주 예외적으로 회사 내부를 공개하는 기사가 CEO 취임 전인 5월17일 미국의 친자본 월간지 ‘포브스’에 실렸습니다. 물론 대부분의 내용은 벡텔의 우수성에 대한 것이었지만, 당초 일정보다 앞당겨 승계하는 사유와 더불어 현재 벡텔이 처해 있는 어려움에 대하여도 많은 지면을 할애하였습니다.


벡텔이 내부를 공개하기로 한 것은 포브스 기사가 나오기 두 달 전 발간된 책 ‘The Profiteers, Bechtel…(악덕업자, 벡텔…)’과 무관하지 않게 보입니다. 이 책은 여류 탐사기자인 샐리 덴튼(Sally Denton)이 쓴 것으로, 이 사람은 미국 역사상의 대형 미공개 사건들을 파헤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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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후반 미국은 ‘신이 주신 운명(Manifest Destiny)’이라는 이론을 만들어 인간의 탐욕을 정당화하면서 서부개척시대를 엽니다. 목장에서 소를 키우던 26살 청년 워렌 벡텔(Warren Bechtel)은 1898년 회사를 만들어 철도 건설에 뛰어듭니다. 이 회사는 경제대공황 당시 후버댐을 비롯하여, 해외에서는 아라비아 횡단 송유관을 건설하였습니다. 늘 최초, 최대의 건설사업을 수행하였고, 이런 실적을 바탕으로 전 세계에서 지속적으로 초대형 인프라사업을 수주해 왔습니다. 한국에서도 1950년대 당인리발전소를 시작으로 원자력발전소, 경부고속철도 등 최초, 최대라는 수식어를 달았습니다.


책의 저자 샐리 덴튼은 벡텔을 전형적인 정경유착회사로 묘사했습니다. 예를 들면 공화당의 레이건 행정부 시절, 이 회사 출신인 조지 슐츠와 캐스퍼 와인버거가 각각 국무장관과 국방장관 재직시 이 회사의 사업을 도왔다는 것입니다. 그간 벡텔은 윤리규정이 매우 엄격한 회사라고 알려져 있었습니다만, 이는 공사를 수행하는 단계에서 적용되는 룰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2000년대 들어 보스톤 빅딕(Boston Big Dig; 도심 지하도로 건설)의 부실공사와 공기 지연으로 미국 건설 역사상 가장 비싼 도로라는 평가를 받았고, 방사성폐기물 처리장 건설 사업이 환경단체와 정치권으로부터 공격을 받는 등,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빚어 그 간의 명성에 큰 흠집을 남기기도 하였습니다. 


기존 시장에서는 수주가 급격히 감소하고 수익성이 떨어지는 등 고전하고 있고, 새로운 기술혁명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외부적 어려움에다, 내부적으로는 가업승계가 진행되고 있는 와중에 공격적이고 비판적인 책이 나오자 적극적인 방어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벡텔의 주 사업분야는 광산, 원자력과 국방을 포함한 정부사업, 에너지, 인프라 등 4가지인데, 근래 가장 타격을 받은 분야는 에너지 분야입니다. 1940년대부터 사우디 아라비아를 거점으로 오일·가스 사업에서 막대한 돈을 벌었던 벡텔도, 세계적인 에너지 시장의 위축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거기에 원가 개념이 없는 중국의 거센 공격 앞에 고전하고 있습니다. 우리 건설회사들보다 기술력이 앞섰다 하지만, 오일머니와 중국이라는 두 개의 커다란 벽 앞에 어려운 사정은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또한 여느 회사와 마찬가지로 사업다각화와 민간투자사업 참여라는 두 줄기의 전략에 맞게 신기술이나 발전사업 등에 참여하고 있지만 아직 커다란 성과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모건 스탠리, 구글, GE 등과 함께 참여한 392MW 용량의 세계 최대 이반파(Ivanpah)태양열발전소 사업의 상황은 녹록지 않습니다.  


연간 300억달러 규모의 매출에 직원 수가 5만명을 넘는 이 회사의 2014년 신규 수주는 180억달러에 그쳤습니다. 지난 100여년 신비의 왕국처럼 군림하였던 벡텔이 스스로를 공개하고 나선 배경은 뭘까요. 급변하는 사업환경과 함께 비판적 여론이 커지는 상황에서, 건설회사의 가장 큰 자산인 인적자원관리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사업 포트폴리오가 바뀌면 인적 구성도 바뀌어야 합니다. 기존 사업에서 평생을 바친 유능한 기술자들에 대한 처우도 있어야 하고, 한편으로는 신기술 분야의 기술자들을 확보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게다가 구글이나 애플 등 예전에는 건설업과 전혀 관계가 없던 회사들이 신기술과 막강한 자금력으로 도시개발을 비롯한 건설영역을 무섭게 잠식하고 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1조달러의 인프라사업을 벌여 일자리를 만들겠다고 공약했습니다. 인프라가 노후되어 열악한데 재정은 매우 부족하다는 것은 공화당에서도 이미 잘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공화당 성향의 벡텔이 트럼프 대통령과 어떻게 조율하며 지금의 사업위기를 헤쳐 나갈 것인가가 눈여겨 볼 대목입니다.  


특히 벡텔을 벤치마킹하겠다는 우리 정부와 업계가 과연 이 회사로부터 무엇을 어떻게 배울 것인가는 매우 중요한 주제입니다. 지난 몇 년 동안 한국의 대형 건설회사들은 해외사업의 막대한 손실을, 경기에 민감한 국내 주택사업에서 상당히 만회했습니다. 미국도 상업용 건축이나 주택시장은 거대하지만, 벡텔은 이런 분야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R&D도 어디까지나 시장 선점 차원에서 추진하는 것이지, 한국이나 일본처럼 기초연구분야를 기업이 국가와 함께 하는 형태는 아닙니다. 


벡텔이 창업 이래 늘 최초의 사업에 도전하는 퍼스트 무버(First Mover)로서의 실적을 무기로 시장을 지배했다면, 한국의 건설회사들은 1970년대 싼 인건비를 무기로 해외시장의 패스트 팔로어(Fast Follower)로서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한국건설회사들은 해외시장에서 너트 크래커(Nut Cracker)로 고전하는 상황입니다. 업계에서는 정부와 금융에 지원을 요청하고 있으나, 분명한 것은 기술경쟁력은 업계의 몫이며, 이를 전제로 제도 개혁을 요구한다는 점을 정부에 분명히 말해야 할 것입니다. 

아시아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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