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두 가지 묘수 [신아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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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두 가지 묘수

2017.02.15

저는 지난해 12월에 난생처음으로 장편 소설을 한 권 냈습니다. 지금까지 칼럼만 쓰던 제가 소설을 썼다고 하니 어떻게 그 일을 해냈냐며 지인들이 축하를 겸해 궁금해 하셨습니다. 저는 그 대답을 책 말미의 ‘작가의 말’에서 했습니다. 독자 중에는 그 내용에 힘을 얻어 그간 미뤄 뒀던 일을 해치우게 되었다는 분도 계셨습니다. 저와 그분에게처럼 다른 분들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을까 하여 좀 길지만 옮겨보겠습니다. 

안회가 어느 날 배를 타고 강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사공이 배를 젓는데 몸놀림이 가히 신의 경지에 달한 듯 보였습니다. 안회가 물었습니다. “배 젓는 법을 내가 배울 수 있겠는가?” 사공이 대답합니다. “물론입니다. 헤엄을 잘 치는 사람은 몇 번 저어 보면 금방 배웁니다. 잠수에 능한 사람 역시 배 같은 것을 본 적이 없어도 금방 노를 저을 수 있지요.” 

그 말이 선뜻 납득되지 않은 안회가 사공에게 왜 그런지를 물었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안회는 스승인 공자에게 이 이야기를 하자 공자가 이렇게 말해 주었습니다. 

“헤엄을 잘 치는 사람이 배를 저을 수 있는 것은 물을 의식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에 빠지는 것이 두렵지 않으니 오직 배 젓는 것에만 집중할 수 있다. 또한 잠수를 할 수 있으면 배가 뒤집히더라도 결코 당황하지 않는다. 그 사람은 깊은 물속이 마치 발이 닿는 언덕처럼 여겨져서 배가 뒤집힌 것을 수레가 뒷걸음질 친 정도로 여긴다. 따라서 엎어지든 뒤집히든 물러나든 미끄러지든 어떤 역경과 위험이 닥치더라도 그것들이 마음을 어지럽히지 않는다. 그러니 늘 마음에 여유가 있는 것이다.” 

『장자』 달생편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소설을 쓴 후 장자를 인용하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소설이라는 걸 처음 써 보면서 제대로 쓸 수 있을지, 제대로 쓰고 있는지, 제대로 쓴 것인지 스스로 확신을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글을 쓴 지가 30년 가까이 되고 지금까지 책도 다섯 권이나 냈지만 소설만큼은 이번이 처음이라 두려움과 긴장이 컸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저는 헤엄을 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장자의 말대로 소설이라는 배를 무리 없이 저어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저는 글의 바닷속으로 유연하게 들어갈 수 있는 잠수부이기도 하기에 역시 소설이라는 노를 익숙하게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장자가 격려했습니다. 단, 헤엄을 잘 치고 배를 잘 젓기 위해서는 물을 의식하거나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단서를 붙였습니다. 그러면서 친절한 장주(장자의 이름) 씨는 그 방법도 일러 줬습니다. 즉, 오직 거기에 집중하라는 것이지요. 다만 몰두하고 전념하라고 당부했습니다. 

둘째,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지를 묻는 안회를 향한 공자의 답(실상은 공자의 입을 빌어 장자가 한 대답이지만)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답이기도 했습니다. 

배가 뒤집히고 거꾸러지는 등 어떤 역경과 고난을 마주한다 해도 노련한 잠수부나 뱃사공이 그러하듯이, 마음을 흩뜨리지 않고 여유를 가질 것을 장자는 당부하고 있습니다. 

저는 장자의 말에 의지하여 소설 쓰기의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지만 어찌 글쓰기뿐일까요? 저처럼 자신의 일에 적용하고 응용했다는 그 독자처럼 우리 모두는 노련한 뱃사공이자 잠수부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분야와 인생이라는 물에서 지금까지 익숙하게 헤엄을 쳐왔기 때문입니다. 

단, 물을 두려워하거나 의식하지만 않으면 된다고 장자는 말하지만 우리의 문제는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중년 이후 세대로만 국한해서 말하자면 백세시대니 노후 준비니 재취업이니 하는 정형화된 틀이나 사회적 구호가 강박과 초조를 부추기며 걱정 근심을 낳습니다.

사는 것에 너무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고 죽을 때까지 뭔가를 성취하고자 집착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다 보니 자유롭게, 현재에 집중하기가 어렵습니다. 제 경우는 젊었을 때도, 심지어 어렸을 때도 그때그때 주어진 시간을 유영하며 평화롭게 살아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더 우스운 것은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여행지, 먹어야 할 음식 목록까지 만들어 실제로 찾아다닌다는 사실입니다. 저라면 죽음의 침상에 누워 남들처럼 세상을 유람하지 못하고 식도락에 빠져보지 못한 것을 한탄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지금껏 세상을 헤쳐 온 자신의 경험을 신뢰하고 현재의 시간에 집중하는 것, 그것밖에는 인생의 묘수가 달리 없다는 장자의 가르침을 따라 한시적이나마 그렇게 했더니 소설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처럼, 저는 남은 생의 시간도 그런 자세로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무엇보다 올 한 해를 그렇게 보내려고 합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이 칼럼을 필자와 자유칼럼그룹의 동의 없이 상업적 매체에 전재하거나, 영리적 목적으로 이용할 수 없습니다.

필자소개

신아연

이대 철학과를 나와 호주동아일보와 호주한국일보 기자를 거쳐, 현재는 자유칼럼그룹과 자생한방병원 등에 기고하며 소설을 쓰고 있다. 저서로는 장편소설 『사임당의 비밀편지』를 비롯, 『내 안에 개있다』 『글 쓰는 여자, 밥 짓는 여자』 『아버지는 판사, 아들은 주방보조』 『심심한 천국 재밌는 지옥』 『마르지 않는 붓(공저)』 등이 있다. 

게스트칼럼 / 박대문

잉카의 길 트레킹과 포터

트레킹(treking)에 포터(porter)가 필요한가? 트레킹이란 등산이 아니라 전문적인 등산 기술이나 지식 없이도 즐길 수 있는 자연 답사 도보 여행을 말합니다. 어쩌면 신라 시대의 화랑도 수행이나 조선 시대 선비들의 산천경개 유람과 같은 것입니다. 

근래 들어 트레킹 열풍이 불고 있습니다. 아마도 2007년 제주 올레길이 개발되면서부터가 아닐까 싶습니다. 제주 올레길이 유명해지면서 지자체마다 다투어 둘레길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서울 둘레길, 북한산 둘레길, 지리산 둘레길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이러한 둘레길을 트레킹 하는 데에 포터가 필요 없습니다. 

작금의 트레킹이라는 용어의 정착은 전문 산악인들이 개발한 네팔의 히말라야 등 험한 산악길이 일반에게 공개되면서부터라고 합니다. 이러한 트레킹에는 포터가 자연스레 따라붙습니다. 일반 관광 트레커의 편의를 위해 단순한 노무를 제공하는 임무입니다.

이번에 3박 4일의 ‘마추픽추로 가는 잉카의 길’ 트레킹을 다녀왔습니다. 잉카의 길은 잉카 시대에 제국의 변방 먼 구석까지를 관리 통치하기 위하여 구축한 전국 연결 도로망입니다. 수도 쿠스코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뻗쳐 있었는데 잉카 전성기에는 이 길의 총연장이 3~4만km나 되었다고 합니다. 잉카의 길에는 땀보(tambo)라는 객사를 설치했고 이 길을 따라 차스끼(chasqui)라 부르는 파발꾼이 바람처럼 나는 듯이 사방으로 달려 나갔다고 합니다. 땀보와 차스끼는 광활한 영토를 지배했던 몽골 평원의 원나라가 정보통신망으로 이용했던 역참제와 같은 시스템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잉카의 길 중 가장 인기 있는 길이 마추픽추로 가는 잉카의 길(Inca Trail to Machu Picchu)입니다. 이 길은 오얀따이땀보에서 마추픽추까지 안데스 산맥의 자연과 잉카 유적지를 보고 느낄 수 있는 45km의 고원지대 산길입니다. 

오늘날은 잉카 제국의 혼이 담긴 유서 깊은 잉카의 길을 전 세계의 관광객이 유유자적하며 트레킹하고 있습니다. 몰락한 제국의 후예들은 포터가 되어 관광객의 짐 보따리를 대신 짊어지고 이 길을 달립니다. 잉카 황제의 명령 전파와 긴급 용무를 수행했던 차스끼는 오늘의 포터가 되어 이 길을 달리고 있는 셈입니다. 무상한 역사의 한 단면을 봅니다.

트레킹 첫날 포터와 첫 대면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우리 일행보다 수가 더 많은 14명이었습니다. 가이드와 조리사 그리고 각종 취사도구와 식재료, 텐트, 침낭, 매트리스, 간이 식탁과 의자 등을 운반해야 하는 요원들입니다. 각자가 담당하는 짐의 무게가 만만하지 않아 보였습니다. 필요한 최소의 장비와 차림으로 최상의 신발을 신고 걸어도 힘들고 어려운 산길입니다. 포터는 무거운 짐을 지고 일행보다 먼저 가서 식사를 준비해야 하고 식사할 장소에 텐트와 식탁을 차려야 합니다. 식사가 끝나고 트레커가 출발하면 설거지와 조리 기구, 텐트, 식탁을 챙기고 뒤처리를 하느라 한참 늦게 따라옵니다. 그러나 트레커가 다음 장소에 도착하기 전에 미리 가서 또 텐트를 치고 식사를 준비해야 하므로 곧장 달리듯 뛰어야 하는 힘들고 고달픈 일정입니다. 

고산증과 하루 산행의 피곤함에 몸이 천근만근이라 잠자리 텐트에서 끙끙댑니다. 하지만 이들은 이른 새벽에 일어나 아침 식사를 준비하느라 부산을 떱니다. 고산지대에 우기라서인지 하루에도 몇 번씩 비가 내렸다 개기를 반복했습니다. 우리는 판초 우의나 오버 트라우저를 입고 걷지만, 포터는 등위의 짐에 빗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최우선입니다. 널따란 비닐 보자기를 짐 위에 걸치고 손을 머리 위로 올려 비닐 보자기 양 끝을 잡고 맨발에 운동화를 신고 걷습니다. 식사하는 동안에 이들 중 일부는 시중을 들지만, 나머지는 비좁은 화장실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거나 비닐 조각을 머리 위에 얹고 비를 맞고 있어야 합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생계를 위한 이들의 서비스를 받으며 트레킹을 하는 것이 민망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습니다. 아무리 고산지역에 적응하여 살고 있으며 수년간 포터 생활을 했다고 하지만 그들 역시 초인이 아닌 우리와 같은 인간들인데 어찌 힘들지 않겠습니까? 포터들을 소개할 때 보니 나이가 20대에서 50대 후반까지 있었고 더구나 그중 한 명은 팔이 하나 없는 외팔이였는데 그 역시 같은 크기의 짐을 메고 달려야 했습니다. 값싸고 부질없는 측은지심이 일면서 목구멍에 왈칵 눈물이 흘러들었습니다. 멀리 동양의 코리아에서 온 손님을 위하여 무거운 짐을 메고 걸어야 하고 꼭두새벽에 일어나 아침 식사 준비를 하느라 차가운 밖에서 부산스럽게 움직여야만 하는 잉카제국의 후예들, 이들을 보면서 어렵고 가난했던 지난날 우리의 아픔이 되살아 난 것은 어인 청승일까요? 

일제 강점기에 지리산 노고단에는 외국인 선교사 별장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별장에 가려면 화엄사 뒤 가파른 비탈길인 속칭 코재를 올라가야만 합니다. 나이 많고 비만한 외국인 선교사가 그곳에 갈 때 사인교나 들것에 실려 갔다고 합니다. 그 가마꾼 노릇을 했다는 동네 아저씨 말씀입니다. ‘돈벌이 없어 배고프고 가난한 그 시절에는 사인교나 들것을 서로 메려고 기를 썼다. 산행 가마꾼 노릇 한 건 하면 큰 횡재를 한 것 같았다’고 했습니다. 기가 막히게 슬픈 일제 강점기 시대의 서글픈 우리의 실상이었나 봅니다. 

‘돈이면 산 호랑이 수염도 뽑아 온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전(錢)의 위세로 잉카제국 후예인 포터의 서비스를 받고 왔습니다. 당연한 것으로 넘기기에는 왠지 가슴 한구석이 미어지는 안쓰러움이 머리에서 떠나지를 않습니다. 오늘의 코리아가 있기까지 자신의 한 몸 부스러지고 사그라지면서까지 우리 경제를 끌어 올린 60년대, 70년대의 산업일꾼들의 고마움을 새삼 깨달아야만 했습니다. 잉카 트레킹을 함께하면서 성의껏 최선을 다했던 포터들에게 감사드리며 그들의 장래도 환하게 밝아졌으면 하는 소망을 전하고 싶습니다.

(2017. 2. 3. 잉카의 길 트레킹을 마치고)

 

 

필자소개

박대문

환경부에서 공직생활을 하는 동안 과장, 국장, 청와대 환경비서관을 역임했다. 우리꽃 자생지 탐사와 사진 촬영을 취미로 삼고 있으며,
시집 『꽃벌판 저 너머로』, 『꽃 사진 한 장』, 『꽃 따라 구름 따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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