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리 브란트’를 떠올리며 [이성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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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브란트’를 떠올리며

2017.02.10

필자가 20여 년간 독일에 체류하면서 목격한 가장 충격적인 정치적 사건을 두 가지 들라면 동독 공산 정권이 1961년 8월 13일 느닷없이 세운 베를린 장벽(Berliner Mauer)과 1974년 독일 총리 빌리 브란트(Willy Brandt, 1913~1992)의 하야에 얽힌 정치 스캔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장벽’의 출현을 놓고 독일 사회는 한동안 공포 분위기 속에서 격동했습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국제 상황’임을 인정하고 이내 비교적 조용한 일상으로 돌아갔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한편, 독일 총리실이 동독 정부가 계획적으로 침투시킨 고정 간첩과 연루된 사건은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습니다. 이는 빌리 브란트 총리가 동방 정책을 펴며 동독 공산 정권과 거리를 좁히려 무단히 노력해왔기에 더욱더 독일 사회를 아연실색케 했습니다. 

당시 빌리 브란트 총리는 자신이 주창한 신동방정책(Neue Ostpolitik)의 기치 아래 소비에트연방공화국은 물론 이웃나라 폴란드에 가서 저 유명한 참회의 ‘무릎 꿇기(Kniefall, 1970)’를 하는가 하면, 동서독 간의 팽팽하기만 하던 긴장 관계를 보란 듯이 뛰어넘어 동독을 방문하기도 했습니다(1970. 3. 19.). 국제적 냉전 시기에 보여준 이런 행보 덕분에 빌리 브란트는 1971년 노벨평화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빌리 브란트 총리의 개인 보좌관인 기욤(Guenter Guillaume)이 동독 비밀경찰인 스타시(Stasi)에서 파견한 간첩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서독 사회는 놀라움과 격분의 도가니에 휩싸였습니다. 

특히 총리실의 각종 국내 보고서는 물론 주요 외국 정상과의 교신 자료도 기욤의 손을 거쳐 동독으로 넘어갔습니다. 이는 단순한 빌리 브란트 개인의 실책을 넘어 국가의 기간(基幹)을 흔드는 엄청난 대형 사건이었습니다. 

모든 언론 매체가 들끓은 것은 당연했습니다. 특히 빌리 브란트가 그런 간첩을 최측근으로 채용한 잘못을 저질렀다며 맹렬한 비난이 쏟아졌습니다. 그 결과 빌리 브란트는 사건 발발 한 달여 만에 총리직에서 물러나야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독일 사회의 정서를 지금의 시각에서 돌아보면 상대적이긴 하지만 생각보다 참 조용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무엇보다 “빌리 브란트는 물러나라!”와 같은 시민들의 구호나 시위가 없었습니다. 혹시나 해서 필자의 지인들에게 확인 차원에서 물어보았지만, 모두가 그런 시위를 본 기억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를 뒷받침하듯 빌리 브란트는 총리직에서 불명예스럽게 하야(下野)한 뒤에도 독일연방의회(Bundestag)의 의원직을 계속 유지한 것은 물론 1987년까지, 그러니까 13년간 사회민주당(SPD) 총재로서 당을 계속 이끌며 정치인의 생명을 이어갔습니다. 왠지 우리에게는 생소하고 멀고 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닌가 싶기까지 합니다. 

이 사건과 관련해 필자는 좀 다른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빌리 브란트는 잘 알려졌다시피 청년 시절 독일공산당원으로 활동했습니다. 나치 정권이 태동하자 노르웨이로 피신한 그는 국적을 노르웨이로 바꾸고 그 나라 일간신문의 특파원 신분으로 당시 나치 독일에 잠입해 첩보 활동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전쟁 후에는 독일사회민주당(SPD)에 입당해 정치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1957년에는 서베를린 시장에까지 올랐습니다. 

그리고 빌리 브란트가 서베를린 시장으로 재임할 때인 1963년 케네디(John F. Kennedy, 1917~1963) 미국 대통령이 베를린을 방문했습니다(1963. 6. 23.). 케네디는 시청 광장에 구름처럼 모인 군중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오늘 전 세계 모든 지역에서 서베를린의 투쟁과 저항 정신의 상징인 여러분의 뛰어난 현(現) 시장의 초청을 받아 여러분의 도시에 오게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케네디는 연설의 마지막을 이렇게 마무리 지었습니다. “어디서 살든 모든 자유인은 서베를린의 시민입니다. 그래서 나는 자유인으로서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베를린 시민(Ich bin ein Berliner)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때 케네디는 마지막 부분을 독일어로 말했는데, “Ich bin ein Berliner”로 집약되는 케네디의 이 연설은 독일인에게 ‘세기의 명연설’로 각인되었습니다. 

케네디의 연설은 물리적으로 동독 영토에 작은 섬[島]처럼 갇혀 있어 늘 위기감 속에서 살던 서베르린 시민에게 참으로 큰 감동을 선사한, 거대 우방인 미국이 전하는 희망적인 약속의 메시지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 연설을 지켜본 베를린 시민은 물론 전 서독이 열광한 것은 당연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케네디 옆에는 빌리 브란트가 서 있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빌리 브란트는 정치 변경인 베를린에서 수도 본(Bonn)이란 독일 정치의 중앙 무대로 진출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빌리 브란트는 여세를 몰아 1949년 이래 콘라트 아데나워(Konrad Adenauer, 1876~1967) 초대 총리 이후 줄곧 지켜온 기독민주당(CDU)과 기독사회당(CSU) 보수 연합 정권을 제치고 1969년 그가 이끈 독일사회민주당(SPD)이 역사상 처음으로 집권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합니다. 

그럼에도 보수 진영에서는 빌리 브란트의 정치 길목마다 그의 젊은 시절 경력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심심치 않게 드러내곤 했습니다. 그런 빌리 브란트 총리의 최측근이 동독 간첩이었으니 ‘그러면 그렇지’ 하는 극우들이 속내를 표출하기도 하였습니다. 

필자가 1974년 빌리 브란트 총리가 동독 간첩인 최측근 인물 때문에 하야하는 과정과 당시 독일 사회의 정서를 새삼 떠올리는 것은 요즘 우리 사회에 일고 있는 과도한 정치 풍토를 마음 졸이며 지켜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며, 우리 사회가 논리적이고 이성적으로 다스려야 하는 정치(政治)이기보다 감성적인 정치(情治)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은 아닌가 싶어 마음이 편치 않아서입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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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이성낙

뮌헨의과대 졸업. 프랑크푸르트대 피부과학 교수, 연세대 의대 교수, 아주대 의무부총장 역임.
현재 가천대 명예총장, 의ㆍ약사평론가회 회장, (사)현대미술관회 회장, (재)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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