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만의 베네치아 Thomas Mann's Venezia: VIDEO


토마스 만의 베네치아 

Thomas Mann's Venezia


   견실하고 강건한 삶을 살아가던 한 작가가 있었다. 


뮌헨의 프린츠레겐텐 거리에 살고 있던 그의 이름은 구스타프 폰 아셴바흐. 이미 대가의 반열에 오른 초로의 작가는 어느 날 강렬한 내적 충동에 휩싸여 국경을 넘게 된다. 


(<베니스에서의 죽음 Der Tod in Venedig>는 토마스 만이 쓴 중편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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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르 강가의 아테네’라 불리는 뮌헨을 떠나, 그 질서와 조화의 견고한 건축물과도 같은 도시에서 탈출하여 미지의 탐미와 황혼의 퇴폐가 넘실거리는 곳, ‘세레니시마’(Serenissima) 베네치아로의 월경을 감행한 것이다. 


거기서 그는 완결된 미(美)의 화신과도 같은 존재와 조우한다. 10대의 소년, 폴란드의 귀족, ‘타지우’라 불리고 타지오(Tadzio)라 쓰는 금발의 소년이다. 평생을 이성과 절제, 조화와 중용의 가치 속에 살아왔던 노작가는 뜻모를 감정 앞에 급격히 흔들린다. 소년을 사랑하게 된 것이다. 그는 견실한 시민이기 이전에 존재하는 아름다움에 대해 아낌없는 찬미를 보내고, 이를 글로 옮겨 다른 이들에게 전하는 예술가가 아니었던가. 아셴바흐는 이제 완전히 소년에 사로잡혀 끈적이는 탐욕의 눈길을 보낸다. 그가 그토록 경멸했던 행위 - 늙어감을 거부하며 염색과 화장, 심지어 입술에 빨간 분칠을 하면서까지 말이다.


작가는 왜 소녀가 아니라 ‘소년’을 내세웠을까. 동성애 소설을 쓰고자 했던 것일까. 꼭 그렇진 않을 것이다. 초로의 대작가가 자신이 평생 견지했던 모든 가치관을 포기하면서까지 정신없이 빠져드는 대상은, 동구(東歐)에서 온 미지의 소년이다. ‘소녀’였다면 벌어졌을 지저분한 현실감, 금지된 쾌락의 비릿한 비루함이 여기엔 없다. 절대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비현실적인 탐미만이 있을 뿐이다. 소년에 대한 그 사랑과 집착은 차라리 신화적(神話的)이다. 토마스 만은 아마도 이것을 의도했을 것이다. 실제로 소설은 작가의 소년에 대한 복잡한 감정을 플라톤의 <파이드로스>까지 끌어 들여 보다 고원한 경지에서 풀어나간다. 


독일의 위대한 예술 전통은 ‘아름다움’이라는 절대적, 감정적 가치를 이성으로 정제하고 다듬어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고 거기에 표현과 수식을 더해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탄생시켜 나가는 것이었다. 지고의 감정적인 대상에도 ‘이성’이라는 브레이크를 걸어 조화와 중용을 찾아가는 게 독일인들이 숭앙한 시민적 가치요, 교양 있는 예술가의 바른 자세였다. 그러나 아셴바흐는 지금 탐미와 퇴폐의 땅 베네치아에 와 있다. 여기는 독일이 아니다. 아름다움이 있다면, 그리고 사랑과 에로스가 있다면, 그 때는 이성과 절제, 사회적인 체면 따위는 집어던지고 심지어 생에 대한 욕구조차 뒤로 하고 무조건 그 대상에 온 몸을 던져도 되는 그런 충동의 공간이다.


아셴바흐는 콜레라가 창궐한 베네치아를 떠나지 못한다. 타지오를 한 순간이라도 더 지켜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죽음의 공포를 뛰어넘은 사랑, 아니 차라리 사랑의 환각 속에서 그만 죽어 버려 그 기억을 영원히 안고 가겠다는 이 극단적인 충동 – 우리는 이를 흔히 ‘타나토스’라고 부른다 - 을 안겨다주는 곳. 베네치아의 비릿한 물 냄새는 아셴바흐에게 지고의 쾌락은 곧 죽음 그 자체라는 강렬한 원죄적 깨달음을 안겨다준다.


(이 매혹적인 소설은 루키노 비스콘티에 의해 영화(1971년)로, 벤자민 브리튼에 의해서는 오페라(1973)로 만들어졌다. 잉글리시 내셔널 오페라의 브리튼 오페라 공연 모습) 




독일 예술가들의 거대한 정신성과 위대한 교양적 깊이를 구체적으로 증언하는 이 소설은 사실 어떤 형태로 읽혀도 좋을 것이다. 병적인 집착과 사랑에 관한 ‘러브 스토리’이기도 하고, 플라톤의 <파이드로스>적 이성과 낭만적 죽음의 충동 사이에서 방황하는 한 예술가의 미학적 투쟁의 기록이기도 할 것이다. 내게는? 차리라 가장 뛰어난 기행문학, 여행소설이 되지 않을까. 단 한번이라도 이 기적의 도시, 베네치아를 찬탄의 눈길로 바라본 기억이 있는 사람이라면 단번에 소설이 그려내는 베네치아의 그 숨 막히는 퇴락의 정서에 정신없이 빠져들고 말 것이다. 


 

(독일의 보수적 탐미주의를 대표하는 대문호 토마스 만)


“예정된 여정은 석호를 거쳐서 산 마르코를 지나 대운하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었다. 

아셴바흐는 뱃머리에 놓인 둥그런 벤치에 앉아 


팔을 난간에 받치고 손으로 그늘을 만들어 눈을 가렸다.


공원들이 뒤로 멀어져 있고 작은 광장은 여전히 군주다운 기품을 뽐내며 

쓸쓸히 펼쳐져 있었다.


웅장하게 죽 늘어선 궁전들도 뒤에 남았다.

수로의 방향이 바뀌자 리알토의 화려한 대리석 아치가 나타났다. 


여행객 아셴바흐는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는 가슴이 찢어지도록 슬펐다. 


그 도시의 분위기를, 그리고 도망가라고 그토록 그를 몰아붙였던 

바다와 습지의 좀 썩은 냄새를 

그는 이제 깊고 애정 어린 고통스러운 호흡으로 들이마시고 있었다.


- 토마스 만 <베니스에서의 죽음> 중에서 


소설의 무대가 된 베네치아에서는 올해도 신년음악회(Concerto di Capodanno)가 열었다. 빈 신년음악회와는 또 다른, 특유의 드라마틱한 우아함을 자랑하는 콘서트다. 거장 파비오 루이지가 지휘봉을 잡아 근년 들어 최고의 음악을 들려줬다. 특히나 그는 벤자민 브리튼의 음악을 다수 선곡했다. 이 도시와는 잊을 수 없는 인연을 간직한 작곡가이며, <베니스에서의 죽음>을 오페라로 만든 브리튼이다. 


밀라노 라 스칼라에서 객원으로 참여한 발레단이 살루테 선착장 옆 옛 세관건물, 푼타 델라 도가나(Punta della Dogana)와 아르세날레(Arsenale) 등에서 브리튼의 음악에 맞춰 발레 공연을 펼쳤다. 그곳은 소설 속에서 아셴바흐가 처음으로 베네치아 땅에 발을 디디고는 정체불명의 곤돌라 사공에 붙잡혀 마치 명계로 이송되듯 리도 섬으로 실려 떠나기 시작할 때의 기착지이기도 하다. 


 

(브리튼 관현악 모음곡 <음악의 아침 Matinées musicales> 중 행진곡. 2017 베네치아 신년음악회)


(브리튼 <음악의 아침> 중 왈츠. 2017 베네치아 신년음악회) 


역사적인 페니체 극장에서 펼쳐지는 베네치아 신년음악회는 제일 마지막 곡으로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 중 축배의 노래를 부르는 게 전통이다. 지휘자가 이에 앞서 신년인사를 전한다.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은 평화를 위해, 이제 축배의 노래는 축하의 기쁨을 위한 곡입니다’라고. 소프라노 로자 페올라와 테너 존 오스본이 아름다운 화음으로 신년을 맞이한 환희를 찬란하게 노래한다.


(베르디 <라 트라비아타> 중 축배의 노래. 2017 베네치아 신년음악회)


여러분께도 다시 한번 인사 올립니다. “이제 정유년(丁酉年)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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