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니까 길이더라 [신아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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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니까 길이더라

2017.01.17

지난 주 금요일(13일), 본 자유칼럼에 실린 박상도 SBS 선임 아나운서의 글 ‘내 친구 권태준'은 제게  적잖은 여운과 감동을 주었습니다. 주인공 권씨의 삶의 여정으로 인해 오래전 제가 쓴 ‘위기의 중년 남자들’이란 글과 최근 제 블로그 이웃의 글이 겹쳐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제 것은 그만두고 블로그 지인의 진솔한 마음을 그대로 옮겨 보겠습니다.


“만 33년을 근무한 회사를 떠납니다. 무려 3분의 1세기를 한 회사에서 일했습니다. 퇴직을 결정하고 난 후 오늘까지 하루하루가 정말 소중했습니다. 인간이란 묘해서 좋지 않은 기억은 재빨리 지우고, 좋은 기억만 남기는 기억편집기계라고 합니다. 고통은 최소화하고 행복은 극대화하기 위해 이렇게 진화해왔다고 합니다. 저 역시 오랜 직장 생활에서 수없이 겪었던 어려움과 고통은 그다지 생각나지 않고, 좋았던 일만 새록새록 떠오릅니다. 

동료들과 자연휴양림에서 하룻밤을 즐겁게 보내고 맞이한 아침, 단풍나무 숲으로 비치는 가을 햇살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승진하고 어깨를 으쓱이면서 귀가한 날, 수십 개의 색 색깔 풍선으로 집안을 장식해 놓고 나를 기다리던 아내와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묻습니다. 회사 그만두고 나면 뭘 할 거냐고 말입니다. 저는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일을 마음껏 해보려고 합니다. 우리나라 교육제도 상 우수하다는 말은 남이 닦아 놓은 길로만 다니고, 수상한 곳에는 일체 눈길도 주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수의 편에 안전하게 서서 홀로 가는 소수를 그저 바라보는 것이 지금껏 우리가 사는 방식이자 가장 에너지를 덜 쓰는 생존법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방식의 삶은 창의력을 키우는 데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창의력을 키우려면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을 해봐야 합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결론을 가지고 있다. 주어진 길을 따라가다 보면 예정된 결론에 이르게 된다. 지금 그 길을 이탈해서 다른 길을 가면 완전히 다른 결론에 이르게 된다.’- 스크루지 영감이 크리스마스 아침에 한 말입니다. 은퇴로 인한 사회적인 고립감이 솔직히 두렵습니다. 그렇지만 이제 예정된 길에서 한 발 벗어나 또 다른 결론에 이르는 발걸음을 내디뎌 보려고 합니다.”

권씨와 제 블로그 지인은 익숙하게 가던 길을 수정하거나 아예 버린 후 다른 길을 가게 된(될) 사람들입니다. 인생 후반전이니, 은퇴 후 설계니, 노후 준비니, 백세 시대니 하는 말도  ‘새 길, 다른 길, 가지 않은 길’을 마주하거나 맞닥뜨리는 시기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박희채의 장자 인문학 에세이 <다니니까 길이더라>에는 ‘길은 다니니까 생기는 것’이란 장자의 인용이 나옵니다. 애초에 길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다님으로써 생기는 것, 내가 감으로써 길이 되는 것이란 뜻입니다. 또한 길에는 가야 할 길, 가고 싶은 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옷감의 씨줄날줄처럼 묵묵히 가다 보면 가야 할 길이 어느새 가고 싶었던 길로, 가고 싶은 길이 곧 가야 할 길이 되어 있더라는 것이 저자의 경험입니다. 문제는 지속성이며 연속성입니다. 내가 원했던 길이 아니라며, 애초 내가 품었던 지도와는 다른 길이라며 도상에서 주저앉지만 않는다면 길은 어떤 식으로든 열리고 이어지기 마련이라고 저자는 당부하듯 말합니다.

최근에 읽은 건축가 임창복 씨가 쓴 <알파 하우스를 꿈꾸다>에는 '이동한 방향에서 돌아서서 자신의 이동 경로를 다시 보는 것이 인간의 체험에서 가장 감흥을 주는 일'이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건축과 공간에 관한 담론이지만 삶의 체험도 별반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이력서를 다시 써야만 했던  권태준 씨나 새로운 스타트 라인에 선 블로그 지인처럼 저 역시 가정이라는 울타리, 남편이라는 난간이 허물어진 후 이제는 글을 써서 밥을 먹는 이른바 전업 작가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비록 가난에 시달리고 암중모색을 거듭하지만 거뜬히 자존감을 지키며 옹골지게 내면을 다져나가는 제 경험도 권태준 씨와 닮았습니다. 다녀 보니 길이고, 다니니까 길이더란 말이지요.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자유칼럼그룹은 특정한 주의나 입장을 표방하지 않습니다.

필자소개

신아연

대 철학과를 나와 호주동아일보와 호주한국일보 기자를 거쳐, 현재는 자유칼럼그룹과 자생한방병원 등에 기고하며 소설을 쓰고 있다. 저서로는 장편소설 『사임당의 비밀편지』를 비롯, 『내 안에 개있다』 『글 쓰는 여자, 밥 짓는 여자』 『아버지는 판사, 아들은 주방보조』 『심심한 천국 재밌는 지옥』 『마르지 않는 붓(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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