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대 궁궐 정문은 왜 모두 ‘화(化)’일까

카테고리 없음|2017. 1. 15. 09:50


경복궁 광화문, 창덕궁 돈화문, 

창경궁 홍화문, 덕수궁 인화문, 경희궁 흥화문 


   요즘 역사의 중요성이 무척 강조되고 있습니다. 


광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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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도대체 무엇이기에 제대로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그렇게 난리들일까요? 단순히 조상들이 살았던 시대, 옛날의 이야기라면 그렇게까지 중요하게 여길 필요는 없을 텐데 말입니다. 


역사가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미래를 비추는 거울’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끊임없이 되풀이된다는 역사의 속성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조상들이 겪었던 일들이 우리 앞에도 다시 펼쳐질 것이기 때문에 그 일들을 어떻게 처리했는지에 대한 교훈은 우리 미래에 큰 도움이 되겠지요.


위클리공감 이번 호부터 ‘가볍게 떠나는 역사 기행’을 시작합니다. 역사는 교과서에서만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까이 우리 주변에도 역사의 현장이 많이 있습니다. 그 역사 현장을 가벼운 마음으로 찾아다니며 살아 있는 역사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합니다. 이제 궁궐과 왕릉, 서원 등의 이야기로 역사 기행을 떠나보겠습니다.



 

궁과 궐의 차이를 알면 궁궐이 보인다

서울에는 조선의 5대 궁궐인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이 있습니다. 궁궐은 ‘궁(宮)’과 ‘궐(闕)’을 합한 말입니다. ‘궁’은 임금과 신하들이 나랏일을 보고, 임금과 그 가족들이 생활하는 공간을 말합니다. ‘궐’은 궁을 지키기 위해 에워싸고 있는 담장과 망루, 출입문 등을 일컫는 말입니다. 경복궁의 광화문을 바라보고 섰을 때 오른쪽에 보이는 동십자각(東十字閣)은 현재 남아 있는 유일한 ‘궐’의 흔적입니다. 동십자각은 광화문 좌우에 연결된, 경복궁을 둘러싼 담장의 동쪽 귀퉁이에 있던 망루로, 당직 병사가 올라가 근무를 하는 곳이었습니다. 경복궁을 중심으로 서쪽 대칭 지점에 서십자각도 있었습니다. 서십자각과 부근 담장은 1923년 전찻길을 놓을 때 철거되었습니다.


조선은 경복궁을 중심으로 한양에 새로운 도읍을 만들었습니다. 경복궁 주변에 국가의 근간이 되는 종묘와 사직을 세웠고, 정신적 지주가 되고 교육을 담당할 문묘와 성균관도 만들었습니다. 1394년 9월부터 시작된 새 궁궐 세우는 일에는 조선의 개국공신 정도전(鄭道傳)이 중심이 되었습니다. 그는 경복궁을 지금의 자리에 세워야 한다고 적극 주장하였지요. 착공 10개월 후 새 궁궐이 완성되었을 때 정도전은 궁궐의 이름과 주요 전각의 이름을 지어 올렸습니다. ‘경복’은 중국 고전 <시경>에 나온 “이미 술에 취하고 덕에 배가 불러서 군자 만년의 빛나는 복[경복(景福)]을 빈다”라는 시구에서 따왔다고 합니다.


 

광화문 앞 동십자각.


경복궁의 정문은 광화문(光化門)입니다. 경복궁의 광화문, 창덕궁의 돈화문, 창경궁의 홍화문, 덕수궁의 인화문, 경희궁의 흥화문 등 각 궁궐의 정문 이름에는 모두 ‘될 화(化)’ 자가 들어 있지요. ‘화’ 자는 백성을 정신적으로 가르치고 이끌어 감화하게 한다는 ‘교화’의 의미를 담은 글자입니다. 세종 때 집현전 학사들이 지은 이름 ‘광화’는 ‘빛이 사방을 덮고 교화가 만방에 미친다’는 뜻입니다. 밝고 안정된 시대를 열고자 한 세종의 염원이 담긴 이름이기도 합니다.


광화문 앞에는 해태상이 있습니다. ‘해치’라고도 불리는 해태는 상상의 동물입니다. 예전에는 해태가 불을 먹는 동물이어서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막기 위해 세워진 것이라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해태는 시비나 선악을 판단하는 정의의 수호자로 여겨졌다고 합니다. 또 원래 자리는 궁궐 앞이 아니라 지금의 정부서울청사와 세종문화회관의 중간쯤 되는 사헌부 앞이었습니다. 즉 해태는 화기를 막기 위해서가 아니라, 관리들에게 법과 정의에 입각하여 나랏일을 제대로 행하라고 경계하기 위해 세워진 것입니다.


광화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흥례문(왼쪽)이 보인다. 광화문과 흥례문 사이에선 매일 수문장 교대식이 

열린다.


임금만 지나다니던 문, 어칸

광화문의 규모와 건축 양식만 봐도 경복궁이 조선의 정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른 궁궐의 문들은 낮은 기단 위에 만든 삼문(三門) 형식입니다. 그런데 광화문을 비롯해 경복궁의 사대문은 석축을 쌓고, 중앙에 홍예(虹霓 : 윗부분을 무지개 모양으로 반원형이 되게 만든 문)를 터서 문을 만들고 그 위에 누각을 얹은 구조를 하고 있습니다. 마치 성곽의 문과 같은 웅장한 모습이지요. 그중 광화문은 홍예문을 3개나 가진 위풍당당한 모습입니다.


광화문을 지날 때 고개를 들어 홍예의 천장을 살펴보면 서로 다른 그림이 그려져 있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가운데 문의 천장에는 봉황이 날고 있고, 동쪽 문에는 기린이, 서쪽 문에는 신령스러운 거북이 그려져 있습니다. 봉황은 임금의 상징입니다. 가운데 문은 임금의 행차만이 지나다닐 수 있는 문이었고 이를 ‘어칸(御間)’이라고도 합니다. 


광화문의 홍예, 천장에는 봉황과 기린, 거북 등 신령스러운 동물 그림이 그려져 있다.


궁궐의 문은 그냥 출입을 위한 장치가 아니었습니다. 상서롭지 못한 것은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상서로운 것은 나가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었습니다. 또 깨끗하지 않은 몸을 가진 사람이 여러 문을 거치면서 깨끗한 몸으로 다시 태어나도록 하는 정화 기능도 가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궁궐의 문은 신분의 벽을 강조하는 도구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군신과 지위의 높고 낮음, 남녀와 역할의 차이를 문의 방향이나 크기, 형태 등으로 철저하게 구별했습니다. 그래서 거의 나란히 붙어 있는 문들도 크기나 모양, 방향에 차이가 있습니다.


광화문으로 들어서면 정면에 흥례문(興禮門)이 보입니다. 광화문과 흥례문 사이에서는 매일 몇 차례씩 수문장 교대식이 열립니다. 이 교대식을 보고 흥례문 안에 들어서면 신성한 공간의 시작임을 알리는 시내 금천(禁川)이 보입니다. 금천 위에 놓여 있는 영제교(永濟橋)는 삼도(三道)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가운데 조금 높게 만든 길은 임금이 다녔던 어도(御道)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이유 없이 어도 위를 걸으면 곤장을 맞았다고 합니다.


영제교 난간 양쪽 기둥에는 서수(瑞獸 : 상서로운 동물) 4마리가 조각되어 있습니다. 궁궐에 잡귀나 사악한 기운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지키는 것이지요. 다리 옆 물가에는 상상의 동물인 천록(天祿)들이 물을 노려보고 있습니다. 이 동물들은 물길을 타고 들어오는 사악한 기운을 막아내라고 만든 것입니다.




조선 사람들이 문과 서수 등 여러 겹의 장치를 통해 그토록 막으려 애썼던 ‘사악한 기운’이란 실제로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임금의 현명한 판단을 흐리는 간신배들의 간악한 사심이 아니었을까요?

글 · 황인희 역사칼럼니스트

[위클리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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