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일의 미래, 문화에서 찾아야 [정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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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일의 미래, 문화에서 찾아야

2017.01.06

케이-팝이다, 드라마다, 영화다 하면서 한류 대중문화가 일본 열도를 강타하다가 혐한(嫌韓) 운동의 역풍을 맞아 한동안 주춤하기도 했습니다. 한류는 양국 간 외교 갈등의 격랑을 타고 오르락내리락하기도 합니다. 독도에 갔던 가수는 아예 일본 입국이 금지돼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중국 대륙을 흔들던 한류의 물결도 외교적 냉기류를 따라 주춤하고 있습니다. 제주에서는 요즘 그 많던 중국인 유커(遊客)들이 뜸하다고 울상을 짓습니다. 중국인 내왕이 줄어드는 바람에 내국인의 제주 하늘 길 다니기가 쉬워져서 좋은 점도 있습니다. 요즘은 항공기 연발이 줄어들고 도착 항공기가 제주 상공에서 시간을 많이 보내는 일도 거의 없어졌습니다. 붐비는 공항에서 유커들의 막무가내식 소란에 눈살을 찌푸릴 일도 없습니다. 걱정이 되는 건, 이로 인해 줄어드는 돈도 돈이지만 이들이 오가며 나르던 문화의 흐름이 말라버리면 어쩌나 하는 것이지요.

이런 걱정을 하던 중 신선한 뉴스 하나가 눈에 확 띄었습니다. 지난해 12월 하순, 유력 일간지와 외교부가 공동주최한 사업으로서 ‘청년 신조선통신사(新朝鮮通信使’) 30명이 일본을 방문했다는 기사였습니다. 신조선통신사는 부산항을 출발해 대마도를 거쳐 후쿠오카에 상륙했으며 시모노세키,히로시마, 후쿠야마, 오사카, 교토, 히코네, 다카쓰키, 시즈오카, 하코네로 이어진 조선통신사 여정을 그대로 밟았다고 합니다. 이들은 각 여정에서 일본 측 청년 30명과 조선통신사 당시의 분위기를 연출하면서 한일 청년 간 우의를 다졌다고 합니다. 스무  살부터 스물일곱 살까지 한국의 젊은이들은 일정을 마치고 ‘조선통신사의 현재적 교훈을 되새기는 마음의 견문록‘을 쓴다고 하니 이들이 쓸 견문록이 벌써부터 궁금해집니다. 

우리 기성세대 대부분은 은근히 일본의 자연과 문화를 좋아하면서도 과거사와 영토 문제의 굴레로 인해 일본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이 유보적인 태도를 취하는 모양새입니다. 저는 공직 생활을 해오면서 가끔은 일본인들과의 유쾌한 교류를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10여 년 전, 폭탄주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지 못하던 일본 경제계 인사 한 분과 동경 인근의 현(縣) 지사(知事) 한 분이 따로따로 방한했을 때 이들과 번번이 폭탄주를 같이 마셨는데 이들은 몇 순배 돌고 나자 나중에는 두려움은커녕 당초 예상보다 폭탄주가 마시기에 좋다고 하면서 일본에 가서 폭탄주를 유행시키겠다고 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후자의 경우, 제가 일본에 갔을 때 그분은 부하들을 다 모아 놓고 폭탄주 시범을 보이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때  ‘아, 문화가 별 것이 아니구나. 우리의 김치, 비빔밥, 삼계탕을 좋아하고 폭탄주까지 흔쾌히 마신다면 그들의 속마음도 어느 정도 내보이는 게 아니냐’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먹고 마시는 걸 서로 좋아한다는 건 오감(五感)이 통한다는 것이므로 문화교류로서는 매우 온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일본을 욕해도 신선하고 맵시 있게 차려진 일본 밥상을 마주하면 마음이 풀리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이번 청년 통신사들도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400여 년 전의 조선통신사들처럼 일본의 문물을 익히고 돌아와서 양국 간 속마음이 통하는 그런 우의를 쌓아갈 것으로 기대해봅니다. 이들에게 역사나 영토 문제를 지나치게 강요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나중에 이들이 더 성장하여 결정할 위치에 가면 자연히 그런 문제는 그런 문제대로 고민해야 할 것이지만 지금 쌓아 놓은 순수한 우정과 상호존중을 저버리기는 어려울 것이라 봅니다. 임진, 정유 양차의 왜란을 겪고 나서 서로 신뢰를 쌓기 위해 파견하기 시작한 조선통신사가 1607년에서 1811년까지 12번이나 파견된 것을 보면 그 200여 년간의 양국 관계는 매우 좋았을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통신사는 한일 양국이 전쟁 후의 증오를  문화로 극복한 빛나는 역사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중국에 대해서도 오랫동안 때로는 굴욕적인 각종 사절단을 보내 외교관계를 유지하는 한편 그들의 문물을 들여옴으로써 우리의 문화생활을 높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대가 다르므로 이런 형태의 사절단보다는 대등한 형태로, 당나라, 송나라와 우리 신라, 백제, 고려가 행한 활발한 무역교류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무렵 해상왕 장보고의 활약은 우리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에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우리 지식인들이 중국, 일본에 가서 활약한 사례도 많습니다. 이런 역사를 거슬러 양국의 청년들이 해상, 육상의 실크로드 체험을 하게 하는 것도 매우 바람직하다고 하겠습니다.

지난달 하순에 제가 참여했던 또 하나의 한중일 문화교류 행사가 있었습니다. 이름하여  ‘한중일 인문학 콘서트’로, 2016년도 ‘동아시아문화도시사업’에 참여한 3개 도시인 중국의 닝보(寧波), 일본의 나라(奈良), 그리고 우리나라의 제주도 간의 문화교류 행사였습니다.  중국 당, 송 시대와 일본의 나라 시대, 그리고 제주의 탐라국 시대가 인문학 교류의 대상이었습니다. 이 세 도시가 각국을 대표하여 한자리에 모인 것은 우연한 조합(組合)이었을 뿐인데  당시 중국의 관문인 닝보와 실크로드의 종착지인 나라는 서로 활발한 교류를 하였으며  탐라국도 신라, 백제와 더불어 동아시아의 해상 무역에 적지 않은 역할을 하였기에 ‘세 도시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은 이번 3개국  인문학자들의 모임은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이 활발하였습니다. 

그날 저에게 가장 인상적으로 다가온 것은 일본 학자들의 솔직함이었습니다. 나라 동대사(東大寺) 한쪽 구석에 자리한 일본 최대의 고대유물 창고인 정창원(쇼소인, 正倉院) 수장 유물과 관련해서 일본 학자 한 분이 대부분의 유물이 당나라에서 들어온 것이라는 게 통설이었는데 최근에는 상당 부분이 신라에서 들어왔을 가능성이 크다는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다는 얘기를 하였습니다. 그는 당시 나라와 신라 간 사절 교환이 각각 20여 회를 상회하였으며 752년에는 무역인을 포함한  우리 신라사(新羅使)의 규모가 700인이 넘었다는 것과  당시 나라 귀족들의 신라물품 구매 희망을 표시하는 매신라물해(買新羅物解)가 정창원에 보관돼 있음을 그 근거로 들었습니다. 이런 증거자료는 종이 문화가 들어오기 전 필기구인 목간(木簡)의 표기나 표찰(標札)에 잘 나타나 있다고 합니다. 

일본 측 다른 발표자에 의하면, 1963년 나라에서 많이 발굴된 목간 자료들은  738년(天平 10년)에  21명의 탐라국 사절이 세토 내해를 통과할 즈음 일본 조정이 이들에게 쌀 지급을 지시했던 기록과  745년 탐라국 전복 6근이 궁에 진상되었다는 기록을 비롯하여  탐라국과 나라 간 여러 번의 교류와 내왕의 기록을 담고 있다고 합니다. 제주 학자들은 탐라국에 관한 역사적 기록이 일본 자료에 생생하게 나타나 있다는 사실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나라에서 온  발표자는 또 일본의 역사 문화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인 목간은 중국 남북조에서 시작하여 주로 백제와 고구려, 신라를 통해 일본에 전달되었다고 하면서 목간의 전래는 당시 일본이 율령국가로의 체제를 갖추는 데 매우 중요한 기여를 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1960년대 일본 내 대대적인 목간 발굴을 계기로 그 전달 루트를 찾기 위해 한국을 매년 여러 번 방문했는데 함안의 성산산성 목간(신라)과 나주 복암리 유적의 목간(백제)발굴이 일본 목간의 루트 추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전했습니다.

중국 측 한 발표자는 양명학의 시조인 왕양명(王陽明)과 나중에 이를 경세치용(經世致用)으로 발전시킨 황종희(黃宗羲)라는 대학자가 모두 닝보 출신으로, 이들이 중국의 현대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에 높은 자부심을 나타냈습니다. 그에 의하면 닝보의 학문적 뿌리는  절동문화(浙東文化)인데 이는 제노(齊魯)문화, 광동(廣東)문화, 상초(湘楚)문화, 파촉(巴蜀)문화와 함께 중국 5대 문화권의 하나라고 합니다.  또 닝보는 중국과 바깥 세계를 연결하는 해·육상  무역으로 유명하여, 닝보상방(寧波商幇)이라 하면 당시 중국 내 최고의 상권(商權) 집단으로 알려져 지금까지도 그 명성을 유지한다고 합니다. 닝보는  14세기 신안  앞바다에서 침몰한 송나라 무역선의 출발지로서도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습니다. 

저는 앞으로도 한중일이 정치, 경제, 통상에만 치중할 게 아니라 3개국에 공통된 문화적, 역사적 교류와 그 현대적 의미를 새기는 논의를 더 깊고 넓게, 지속적으로 다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당시의 대일 통신사나 대중 사절단의 활동을 현대의 언어로 보면 바로 인문학 교류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최근 3개국 주요 언론기관들(중앙, 닛케이, 신화)이 공동으로 주관하여 개최해온 한중일 30인회의에서 3개국 공통의 한자 800자를 선정하였다는 것도 큰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유구한 문화적 전통을 자랑하는 동북아 3국이 앞으로 세계사에서 주역을 맡을 것이라고 보면 한중일 3국이 상호 문화적 소통을 더욱 긴밀히 해 나갈  필요가 있으며 특히 미래를 짊어질 젊은이들 간의 교류를 촉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봅니다. 이런 맥락에서 이번 청년 조선통신사와 같은 인문학적 교류도 계속 이어가고 한중일 청년 실크로드 체험도 지속적으로 추진해 나갔으면 합니다. 사실 이런 인문학적 교류는 비단 청년에게만 국한할 일도 아닙니다. 기성세대도 시류에 휩쓸려 역사 갈등을 부각시키기보다 과거의 교류와 협력에 더 천착함으로써 동북아의 안정적 발전에 더욱 힘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정창원에 신라 유물이 많다는 것은 우리 학계에 익히 알려져 있지만 일본 측이 소장 유물 공개를 꺼려서 이에 대한 학문적 연구가 미진한 실정이며 정창원은 1년에 한 번 꼴로 소량의 유물만을 전시해오고 있다고 합니다.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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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정달호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후 줄곧 외교관으로 일했으며 주 파나마, 이집트대사를 역임했다. 은퇴 후 제주에 일자리를 얻는 바람에 절로 귀촌을 하게 되었고, 현재 제주평화연구원 객원연구위원으로 있으면서 한라산 자락에 텃밭과 꽃나무들을 가꾸며 자연의 품에서 생활의 즐거움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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