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샛길’은 왜 자꾸 만드나 [정숭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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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샛길’은 왜 자꾸 만드나

2016.12.27

동네 뒷산을 자주 오릅니다. 가파르지 않고, 흙길이어서 걷기에 좋습니다. 능선 가운데 오솔길은 키 큰 나무들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햇빛 좋은 날엔 나무 꼭대기 위에 걸린 해가 잎새 떨어진 나뭇가지 사이로 노란 빛을 수천, 수만 가닥씩 내려 보내고, 흐린 날이면 안개가 나무 옆구리를 휘감습니다. 이 길을 걷노라면 몸과 마음에 좋다는 피톤치드가 얼굴에 알갱이 알갱이 부딪힙니다. 새 소리는 귀에 와 부딪히지요. 여러 가지 생각과 기억이 제멋대로 떠올랐다가 지나갑니다. 

10년 전 이사 왔을 때는 한 가닥뿐이었던 이 오솔길 옆에 언제 생겼는지 여기저기 샛길이 새로 많이 났습니다. 동네가 개발되고 아파트가 더 들어서며 산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났기 때문일 겁니다. 샛길이 여러 군데, 많이 생겨서 세 갈래 길이 된 곳이 많지만 나는 산이 망가지는 게 두렵고 걱정돼 원래 있던 길로만 걷습니다. 그러면서 샛길을 낸 사람들, 샛길로 가는 사람들을 원망하고 비웃습니다. 

길을 처음 낸 사람은 항용 위대한 사람, 본받아야 할 사람이지만 이런 산 속 오솔길 옆에 샛길을 낸 사람은 그저 자기 편하기 위해, 자기 혼자 빨리 올라가기 위해 길이 없던 곳을 밟아댔을 뿐이라는 생각 때문이지요. 그가 그쪽으로 올라가는 걸 보았거나, 없던 발자국을 본 사람들이 그 뒤를 따라 올라가는 바람에 샛길이 새로 생겨나게 된 거라는 말입니다. 

새로 난 샛길들은 길어봐야 30~40미터, 갈라지는 곳에서 다시 합쳐지는 곳이 한눈에 보이는 곳이 대부분입니다. 단지 좀 더 빨리, 더 편히 가고자 만들었겠지만 빨라봤자 몇 십 초, 편해봤자 미리 만날 오르막을 약간 뒤로 미룬 것일 뿐입니다. 운동하러 왔으면 몇 걸음이라도 더 걷고, 일부러라도 힘들여 오르는 게 더 좋으련만 그들에게는 여기서도 앞서가는 사람들을 어떻게든 제치고, 남보다 편하게만, 먼저 오르려는 경쟁심만 발동하나 봅니다. 

그래서 이런 길은 아무리 새로 나도 ‘새 길’이 아니라 ‘샛길’이며, 이때 ‘샛길’은 ‘얍삽한 길, 치사한 길’일 뿐이라고 여기면서 이 길을 처음 낸 사람, 멋모르고 그를 따라간 사람들을 비웃는 겁니다. 이런 길은 자기희생을 각오해야 하는 개척자의 숭고한 길, 창조의 위대한 길과는 절대 비교할 수 없습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고, 나는/ 사람들이 적게 간 길을 택했다고/ 그리고 그것이 내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고’로 끝나는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도 행여 이곳에서는 외워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세 갈래 길을 만난 앨리스가 어느 길을 택할지 망설일 때 고양이 체셔가 나타나 “어디로 가고 싶은데?”라고 묻습니다. 앨리스가 “모르겠어”라고 대답하자 체셔는 “아무 길이나 골라. 목적지를 모르면 어느 길이나 마찬가지야”라고 말합니다. 이런 멋진 교훈도 우리 동네 뒷산 오솔길에 생긴 세 갈래 길에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목적지가 빤하기 때문입니다. 능선 끝에 있는 약수터이거나, 약수터부터 가팔라지기 시작하는 고개 끝에 오르면 나타나는 정상이 이 산에 오르는 대부분 사람들의 목적지이지요. 

새 아파트 공사장이 눈에 보이는 것만 해도 3곳입니다. 2,000가구 이상이 내년 여름께면 입주한다고 합니다. 만약 내기를 한다면 ‘새로운 샛길이 더 생긴다’에 돈을 걸겠습니다. 이미 겪은 것처럼 ‘나 홀로 개척자’, ‘어쭙잖은 선두주자’가 부족한 적은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우리 동네 뒷산에는 정말로 샛길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누구든 길을 다 아는 곳에서는 샛길은 그만 만들었으면 싶습니다. 힘들고 멀더라도 있는 길 그냥 걷는 사람만 있게 되면 좋겠습니다. 내년에도 옛길을 걸으며 샛길을 만든 사람들을 여전히 욕하고 있을 내 모습을 상상하니 좀 짜증이 나는군요. 그들 보기 싫어서 산에 안 갈 수도 없고….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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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정숭호

1978년 한국일보 입사, 사회부 경제부 기자와 여러 부서의 부장, 부국장을 지냈다. 코스카저널 논설주간, 뉴시스 논설고문, 신문윤리위원회 전문위원 등 역임. 매주 목요일 이투데이에 '금주의 키워드' 집필 중. 저서: '목사가 미웠다'(2003년), '트루먼, 진실한 대통령 진정한 리더십'(201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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