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녀, 덜 알려진 그들의 이야기 [정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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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녀, 덜 알려진 그들의 이야기

2016.12.13


지난달 말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에서 개최된 유네스코(UNESCO) 산하 인류무형문화유산 정부간위원회는 제주해녀문화를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제주도민들의 숙원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유네스코 등재에 이르기까지 ‘해녀’ 이야기는 근래 제주 안팎에서 널리 회자돼 왔습니다. 올레길 유행을 타고 제주를 내왕하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바닷속을 드나드는 해녀들이 자연스레 관심을 끌기도 하였을 것이며 어쩌면 인간 본연의 바다에 대한 낭만적 동경도 해녀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켰을 법합니다. 또 요즘처럼 수산물 양식(養殖)이 흔해지기 전에는 해녀들의 노동에 의해서만 그 귀한 전복, 소라들을 먹을 수 있었으니 식도락가들은 해녀들에게 애틋한 고마움을 느꼈을는지 모르겠습니다.늘 바다를 마주하며 제주에 사는 저로서도 이런저런 연유로 해녀라는 현상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또 그들의 생명을 건 위험한 작업에도 걱정 어린 호기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너나없이 매체와 책을 통해 ‘해녀’를 말하고 써내니 그 이야기들이 조금씩 지루해지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저의 생각을 바꾼 계기가 몇 차례 있었습니다. 제주도 고위직에 있던 어느 분과 환담하는 가운데 해녀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우도 출신인 그분의 어머니가 80대 중반까지도 해녀 일을 놓지 못하였는데, 결국 본인의 갈망을 이루고자 한 듯 노구에 바다에 나가 물질을 하다가 거기서 숨지셨다는 것입니다. 해녀는 바다에서 삶을 시작하여 많은 경우 바다에서 삶을 거둔다는 것을 알려주는 절박한 이야기입니다. 가슴이 찡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해녀 일에 종사하는 여성들은 바다에 나가 물질을 하면 뭍에서의 온갖 근심과 상념을 다 잊을 수 있어서 바다를 결코 떠나지 못한다고 합니다. 원래 잠녀(潛女)로 불리던 이들이 언젠가부터 해녀로 불리게 되었는데 영어로 우먼 다이버(woman diver)로 번역되는 점에서는 잠녀가 적당한 말이지만 바다에서 그들의 삶이 이루어지고 진다는 점을 생각하면 ‘해녀’란 말이 더 적실(適實)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최근의 어떤 기사를 보니 해녀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조선 숙종 때의 문인으로 300여 년 전 제주도에 유배됐던 김춘택의 잠녀설(潛女說)에 나온다고 합니다. 그는 해녀가 “물속에 들어가 전복을 확인하면 (태왁의) 빈껍데기를 뒤집어 놓아 위치를 알 수 있도록 하고 다시 물 위로 올라온다. 숨이 차서 소리를 내는데 ‘휘익’하는 소리를 오래도록 낸다.”고 썼습니다. 지금도 제주 바닷가에서 들을 수 있는 그 소리입니다. 또 그가 제주의 어느 바닷가에서 만난 해녀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한 번 물에 잠겨 전복을 찾지 못하면 다시 물에 잠기곤 하는데 전복 하나를 따려다가 몇 번이나 죽을 뻔하곤 한다. 물밑의 돌은 모질고 날카롭기도 하여 부딪혀 죽기도 한다. 함께 작업하던 사람이 갑자기 죽거나 얼어 죽는 것을 보기도 했다. 나는 요행히 살아났지만 병으로 고생하고 있다.” 제주에서는 원래 조정에 공물(貢物)로 바치기 위해 남자들이 전복을 땄는데 바다 속에 들어가 할당량의 전복을 따는 일이 너무 힘들기에 많은 사람들이 육지로 도망쳐 갔으며, 그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주로 미역 따기에 종사하던 여자들이 대신 전복을 따는 데 동원되었다고 합니다. 그것이 제주해녀의 유래(由來)로, 남자들이 해도 힘든 일을 그때부터 여성들이 맡아 하게 된 것입니다.

제가 해녀에 새로운 관심을 갖게 된 또 하나의 계기는 소설 ‘검은모래’(구소은, 은행나무)를 만난 것입니다. 이 소설은 3대, 4대에 걸친 해녀 가족사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로서, 일본으로 건너가 물질을 하는 해녀 할머니와 그 손녀를 중심으로 한국인과 일본인, 그리고 일본 사회를 아우르는 갈등과 화합의 인간 드라마를 다루고 있습니다. 우도의 검은 모래(‘검멀래’) 해변에서 어머니로부터 일찍이 물질을 배운 ‘상군’ 해녀가 기구한 운명으로 동경 앞바다의 화산섬 미야케지마로 건너가 해녀로서 부박한 삶을 이어가는 중 그 아들이 일본인 장애인 아버지에게 양자로 입적됩니다. 그 아들과 일본인 아내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의 딸이 사회적 편견 속에서 겪는 정체성 혼란과 이를 둘러싸고 가족이 겪는 갈등이 실화처럼 생생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수년 전 이 작가를 초대해서 마련한 대학생들과의 대담(토크 콘서트)에 우도 출신의 한 중년 독자가 찾아와서 그 책을 두 번 내리읽고 줄곧 눈물을 가누지 못했다고 토로한 일화가 기억에 남습니다.

이런 연고로 해녀에 대해 새로운 관심을 높여가던 중 바로 지난달, 제주영화제에서 본 ‘물숨’이란 다큐멘터리 영화가 또 한 번 가슴을 때렸습니다. 영화를 보는 동안 이따금 흐르는 눈물을 훔쳐야 했습니다. 해녀들이 바다 속에서 채취작업을 하고 물 위로 올라오면서 참았던 숨을 내쉴 때 나는 소리를 ‘숨비소리’라고 하는 건 알았지만 ‘물숨’이란 말은 들어보지 못하였습니다. 영어로 번역된 제목은 ‘Breathing Under Water’로, 물숨이 마치 물속에서 숨을 쉬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지만 실은 역설적으로 물속에서 숨을 쉬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물숨을 오래 유지할수록 더 깊은 바다에 들어가 작업을 할 수 있기에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이 해녀의 최고위급인 ‘상(上)군’이 됩니다. 바다가 깊을수록 더 많은 해산물을 채취할 수 있으며 깊은 바다에 들어갈 수 있는 능력에 따라 상군 다음에 ‘중군’ ‘하군’으로 나뉜다고 합니다.

7년여에 걸쳐 이 영화를 찍은 고희영 감독은 제주 출신의 젊은 영화인으로 베이징에서 활동하다가 투병을 위해 귀향해 있던 중 우도에서 해녀들의 숨비소리를 듣고 해녀 영화를 만드는 것이 자기가 해야 할 진정한 일임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이 영화는 이미 국제적으로도 유명해져서 영국, 스웨덴 등지로부터도 초청을 받아 상영되고 있다 합니다. 지난달 열린 아주 작은 행사인 제주국제영화제(제 12회)를 통해서도 아시아지역으로 퍼져나갈 것입니다. 영화를 많이 보는 편이 아닌 저로서는 제주 4.3 사건을 다룬 흑백 극영화 ‘지슬’(오멸 감독)과 함께 ‘물숨’이 근래에 본 영화 중 가장 큰 감명을 준 작품입니다. 이 두 영화는 주제 자체가 제주를 대변하는 큰 화두이기도 합니다. 

유네스코는 이번에 제주해녀문화를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우리나라로서 19번째)하면서 제주해녀문화는 “지역공동체가 지닌 문화적 다양성의 본질적인 측면을 보여준다. 안전과 풍어를 위한 의식, 잠수기술의 전승, 책임감과 공동 작업을 통해 거둔 수익으로 사회적 응집력을 높이는 활동 전개 등이 무형유산으로서 가치가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또한 여성의 경제활동이란 점에서 문화유산의 여성성이 부각되었는데 제주 해녀야말로 이 지역 여성의 억척스러운 삶을 표상한다고 하겠습니다. 제주도민들은 해녀의 삶을 제주 문화, 나아가 우리나라 여성의 강인함을 대변하는 문화현상으로 보고 이를 계승, 발전해나가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습니다. 다만 해녀의 수가 늘지 않고 줄어드는 추세라서 이 일이 만만치 않음을 예고합니다. 다른 무형문화유산과 마찬가지로 해녀문화라는 인류의 문화유산을 잘 지키고 확산시켜나가는 것은 이제 우리 국민 모두가 함께 져야 할 과제일 것입니다.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자유칼럼그룹은 특정한 주의나 입장을 표방하지 않습니다.

필자소개

정달호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후 줄곧 외교관으로 일했으며 주 파나마, 이집트대사를 역임했다. 은퇴 후 제주에 일자리를 얻는 바람에 절로 귀촌을 하게 되었고, 현재 제주평화연구원 객원연구위원으로 있으면서 한라산 자락에 텃밭과 꽃나무들을 가꾸며 자연의 품에서 생활의 즐거움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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