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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의 비밀
2016.11.21
노란 은행잎이 만든 융단 길로 젊은 엄마들이 대화를 나누며 걷습니다. 엄마들 사이에는 키 작은 어린 아이가 입을 쩍 벌리고서 종종걸음으로 엄마를 좇아갑니다. 왜 그렇게 입을 벌리고 걷는지, 웃음을 참으며 가만 바라보니, 가끔씩 엄마는 아이의 입에 과자를 넣어줍니다. 입안에 퍼지는 과자의 단맛이 얼마나 좋은지, 아이는 오매불망 과자가 올 때까지 입을 크게 벌리고 걷습니다.저러다 아이의 입에 과자 대신 은행잎이 들어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미소가 번집니다. 볕이 좋은 가을의 한복판입니다. 아이의 미소를 닮은 노란 은행잎, 붉은 단풍도 그 시작은 초록이었는데, 어느덧 이렇게 알록달록 색깔 옷을 바꿔 입었습니다. 초록빛에서 노란빛으로 그리고 붉은 빛으로, 늘 가까이에 있던 초록은 이렇듯 풍성하게 계절 색을 바꿔놓습니다.초록은 우리의 눈에 가장 편안하며 심리적 안정감을 주는 색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눈의 피로를 풀어주고 두통을 완화시켜 주며 근육의 긴장도 풀어주는 등, 심신의 휴식을 만들어 주는데 도움이 되는 색입니다. 생명, 평화, 안전, 휴식, 희망과 같은 긍정의 의미들이 있으며, 특히 자연친화적인 우리의 민족적 정서나 미감은 이 초록을 더욱 평온하게 수용하도록 합니다.초록하면 떠오르는 것들이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 국민 주류로 통하는 소주가 있습니다. 본래 소주병은 1990년대 초반까지는 투명하고 연한 하늘색 병이었습니다. 그러다 1994년 당시 두산주류가 강원도가 연고지인 경월소주를 인수하면서 그린 소주를 만들었습니다. 대관령 청정수로 만든 깨끗하고 부드러운 소주라는 콘셉트로 소주병을 초록으로 한 것입니다. 그 이후 소주병들이 대부분 초록색이 되었습니다.하지만 모든 색이 그렇듯이 항상 긍정의 의미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부정적 의미로 사용될 때도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초록색 모자가 굴욕을 의미합니다. 아내가 바람이 났는데 정작 그 사실을 모르는 남편이 초록색 모자를 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국을 대상으로 마케팅을 할 때, 모자 뿐 아니라 모자가 달린 일명 후드티셔츠에도 초록색은 금지색이 됩니다. 실제로 중국 선전시에서는 교통 신호를 무시하고 무단횡단을 하는 위반자들에게 벌금을 내거나, 아니면 초록색 모자와 초록색 안전조끼를 착용하고 자원봉사를 하는 일 중, 택일하라는 벌칙을 내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처럼 초록색 모자를 꺼려하는 이유 때문에 상당한 개선 효과가 있었다고 합니다.서양에서는 초록색이 부정적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나폴레옹이 성 헬레나 섬의 습한 침실에서 임종했을 때, 초록색 즉 셸레 그린(Scheele’s Green) 벽지에서 나오는 비소 중독 때문이라는 이유가 거론되기도 했습니다. 초록색 벽지 뿐 아니라 초록색 카펫과 초록색 가구 등이 놓인 그의 공간이 지목되었고, 나폴레옹의 머리카락엔 독성의 비소가 검출되었던 것입니다. 독극물 이외에도 초록은 마약이나 도박을 상징하는 색이기도 하였습니다.인기리에 방영되었던 영화 헐크의 괴력을 표현하거나 피오나 공주를 구하던 괴물 슈렉의 색깔처럼, 초록색은 비현실을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영화 위대한 유산에서 여주인공을 맡았던 기네스 펠트로는 감독의 요청대로 초록색 의상만 입습니다. 톤이나 재질감을 다르게 할 뿐 그녀의 초록 의상은 사랑을 줄 듯 말 듯, 알 수 없는 여심을 드러내는 데 성공적이었습니다.예술가 가운데 칸딘스키는 “초록은 너무 건강해서 움직이지 않고 있는 암소와 같다.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되풀이해 씹는 것뿐이며, 근시의 희미한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다.”라고 합니다. 몬드리안도 초록을 싫어했던 작가로 꼽힙니다. 그는 비구상 작품들을 통해 자연의 묘사를 탈피하고자 하였는데, 초록이 갖는 안정감도 지나치면 지루함을 느끼나 봅니다.하지만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에서는 초록이 지루해질 일이 없을 것 같습니다. 다양한 가을 색을 품는 것을 보면서 한 여름을 뜨겁게 달궜던 초록을 잠시 떠올려보았습니다. 이 풍성한 가을 우리에게 아름다운 색을 선사한 초록은 다시 내년 봄에 싱그럽게 열리겠지요. 어린아이의 미소처럼, 생각할수록 초록이 고마운, 붉고 노란 가을입니다.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자유칼럼그룹은 특정한 주의나 입장을 표방하지 않습니다.
필자소개
안진의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 교수. 삶의 중심은 그림이지만 그림과 함께 일상을 풀어내는 방법은 글이다. 꽃을 생명의 미학 그 자체로 보며 최근에는 ‘꽃과 문명’이라는 화두를 붙잡고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저서 <당신의 오늘은 무슨색 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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