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도 말고 순천만 같아라 - 정유재란 탐방기 [정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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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도 말고 순천만 같아라 - 정유재란 탐방기

2016.11.16


순천만, 하면 순천만 갈대숲이 떠오릅니다. 그 옆에 넓게 잘 꾸며 놓은 ‘국가정원’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서너 해 전 순천에 갔을 땐 비안개가 끼어 있는 데다 짱뚱어탕, 삼합 등 먹거리 순례로 바빠 갈대밭은 멀리서 대충 훑어보기만 했는데 이번 방문에서는 제법 갈대밭 사이를 걸으면서 가을의 낭만을 맛보기도 했습니다. 순천 출신의 동료 필진 한 분은 이 칼럼을 통해 절절한 고향 생각을 시적인 문체로 남겼습니다. “그곳에 닿고 싶습니다. 순천만 갈대숲에. 궁륭상의 물길이 바이올린의 몸체 같은 호선(弧線)을 그리고 바람이 말발굽 소리를 내며 얼굴을 때리는 곳. . . . 천지간에 갈대 울음 가득한데 검붉은 낙조는 애잔하게 날개를 펼칠 거예요.” 그런데 오늘은 아름다운 순천만의 추억을 다시 더듬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번 순천 방문은 순천만의 빼어난 풍광보다도 순천과 순천을 둘러싼 지역의 역사를 되짚어보러 간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난달 중순 제가 소속한 외교협회가 한국대학총장협회와 공동으로 ‘정유재란(丁酉再亂) 사적지 탐방’을 주관하였는데 제주에 사는 만큼 저로서는 어렵사리 탐방단의 일원으로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이른 아침에 버스에 오르니 놀랍게도 오래전에 장관을 지내신 분을 포함한 원로 외교관들과 대학총장을 역임하신 사회 원로들이 많이 계셨습니다. 아마 일흔이 그리 멀지 않은 저와 몇몇 동료들이 연령으로는 맨 아래였지만 다행히 가장 연소한 현역 신문사 논설위원 한 분이 합류하여 다소 분위기를 활기 있게 하였습니다. 바로 이 논설위원의 열띤 강의로 순천 지역의 역사 탐방이 시작되었던 셈인데 그의 열강은 임진년 왜란 때 최초로 호남지역에서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싸우다가 장남과 함께 순국한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국난을 당하여 선비정신을 발휘해 적과 싸우러 나간 당시의 의병장(義兵將)들이야말로 오늘날 우리가 아쉬워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귀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임진왜란 당시의 분위기가 되살아나는 한편, 정유재란(1597. 8~1598. 12)은 임진왜란(1592~1598)이란 이름의 무게에 가려져 우리의 인식 속에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어 안타깝다는 주최 측의 설명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정유재란의 역사적 의의를 바로 세우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그 사적지들을 탐방키로 하였다는 것입니다. 정유재란은 임진년에 시작된 왜군과의 전쟁이 1년여 만에 교착상태에 빠진 다음 명(明)과 왜(倭) 간 3년에 걸친 종전협상이 결렬되자 왜가 정유년에 전라도 지역을 다시 침략하면서 시작된 전쟁입니다. 총 7년여에 걸친 침략전쟁의 초반에 전라도 지역을 장악하지 못함으로써 보급선이 끊겨 고전을 면치 못했던 것을 깨달은 왜가 전략적으로 우선 전라도부터 손에 넣고자 다시 일으킨 육상, 해상의 전쟁이었습니다. 요즘 영화와 드라마로 유명해진 명량해전(1597. 9. 16), 노량해전(1598. 11. 8) 등도 다 정유재란 중에 벌어진 전투였습니다.

당시 왜장(倭將) 고니시 유끼나가(小西行長)는 순천 앞바다에 연한 언덕에 성(城)을쌓아 결전의 기지로 삼고, 수륙 양면전을 펼치다가 해상에서 아군에 밀리는 형국이었습니다.그러던 중 본국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는 바람에 급히 철수하게 되지만 바다에서 결연히 무장된 이순신의 수군을 맞아 큰 피해를 입었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고니시 유끼나가 본대(本隊)는 명의 수군 사령관 진린(陳璘)에게 뇌물을 주고 진도 앞바다로 빠져나갈 수 있었습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염두에 두고 당시 전적지를 탐방한 것인데 명량해전이 벌어졌던 진도까지는 못 가고 순천을 중심으로 여수, 광양, 남해 일대를 둘러보았습니다. 순천의 왜성(倭城) 답사를 시작으로 순천 외곽 아군의 육군 사령부가 있던 검단산성, 순천 충렬사, 광양만을 건너는 이순신대교, 남해 충무사와 이락사(李落祠) 순이었습니다.

왜군이 3개월에 걸쳐 쌓았다는 왜성은 성채의 기반 부분만 복원된 모습이지만 겉보기만으로도 난공불락의 강고한 요새였음을 짐작할 수 있었으며 광양만을 내려다보는 전망탑이 있던 정상부에서는 당시 수군의 전쟁터였던 바다가 지금 상당 부분 땅으로 메워져 있음을 내려다볼 수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는 현대제철과 현재 공사가 중단된 율촌산업단지가 서 있었습니다. 율촌산단 공사 중 당시 우리 수군의 사령부가 있던 장도(長島)의 상당 부분이 파손돼 있어 씁쓸함을 남겼습니다. 충렬사에서는 일제강점기 때 일제 당국이 세운 고니시 유끼나가 기념비가 두 동강이 난 채로 멀리 따로 떨어져, 버려진 듯 서 있는 모습이 어쩔 수 없는 역사의 흐름을 가늠케 해주었습니다. 

남해 충무사에서는 장군을 모신 사당 뒤에 장군의 가묘(假墓)가 있는데 노량해전 당시 ‘전황이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戰方急 愼勿言我死)’란 비장한 말씀을 남기고 관음포에서 산화(散華)하신 장군의 시신이 임시로 묻혀 있던 곳이라 비감(悲感)에 잠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마지막 답사지인 이락사는 주위를 둘러싼 높은 소나무숲이 이곳의 상서로움을 더해주는 듯하였으며 그 위쪽에 세운 사당의 현판이 이를 더욱 잘 나타내 주고 있었습니다. 대성운해(大星隕海), 큰 별이 바다에 지다는 뜻이니 바로 아래 관음포 바다에서 장군이 맞이한 장렬한 최후의 장면이 떠올라 가슴을 때렸습니다. 더불어 장군의 부하 한 사람이 총에 맞아 바다로 뛰어들면서 “나는 순천 사람이다”라고 외쳤다는 일화가 그 자리에서 소개되어 순천인들의 남다른 역사적 자부심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이번에 탐방한 곳들은 순천 왜성을 빼고는 거의 다 관광지로 개발되어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지만 사람들이 당시 왜란의 전모(全貌)에서 정유재란이 차지하는 의의를 올바로 새기고 가는지 모를 일입니다. 그래서인지 순천의 뜻있는 분들이 모여 ‘정유재란연구회’를 발족시켜 내년으로 420주년이 되는 정유재란 사적지들을 다듬어 부각시키고 당시의 역사를 바르게 알리고자 물심으로 노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정유재란 당시 순천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왜군과 싸웠다는 데에 높은 긍지를 갖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이번 탐방도 이들의 안내로 이루어진 것이며 더 직접적으로는 순천 출신의 원로 대사 한 분과 이 지역을 잘 아는 전직 대학총장 한 분이 뜻을 모아 추진한 것입니다. 이번에 특히 80대 전후의 우리 사회 원로들이 이처럼 우리 역사 알리기에 앞장선 것이 돋보였는데 이런 분들이라면 4, 5세기 전에 태어나셨더라도 기꺼이 의병장으로 나서 국난을 극복하는 데 앞장섰을 법하다는 생각이 얼핏 스쳐갔습니다.

그 외에 이번 역사탐방의 하이라이트를 꼽으라면 저는 단연코 ‘이순신대교’를 들겠습니다. 이순신대교는 당초 ‘광양만대교’라는 무미한 이름으로 될 뻔하다가 그 바다가 품은 깊은 역사를 되살려 ‘이순신대교’로 명명하게 되었다는데, 여수시 묘도(猫島)와 광양시를 잇는 이 멋진 다리를 어찌 달리 부를 것입니까. 바로 그 바다에서 조명(朝明)연합군과 왜군 사이에 숙명적인 전쟁이 벌어져 그 많은 생명들이 스러지고 급기야는 구국의 대영웅인 이순신 장군께서 전사하셨으니 말입니다. 그 바다 속에 장군의 영혼이 어려 있을 것이니 이순신대교를 건너는 현대의 사람들은 장군의 높은 뜻을 기리면서 다시금 호국의 정신을 가다듬을 것입니다.

순천은 바다를 낀 그 풍광도 아름답거니와 예나 지금이나 인물이 풍부하다고 하니 우리나라의 다른 도시들이 더도 말고 순천만 같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순천에서는 인물 자랑을 말고, 여수에서는 돈 자랑을 말고, 벌교에서는 주먹 자랑을 마라”는 항간의 우스개말에 미소를 금할 수 없습니다. 내년 정유재란 발발 420주년에 즈음하여 생태와 환경, 그리고 역사의 도시인 순천에 더 많은 발전이 있기를 기원하면서 정유재란 사적지 탐방기를 마칩니다.

*2013년 순천만정원박람회 때 조성된 정원을 지금 ‘국가정원’으로 부르고 있는데 저는 ‘국민정원’으로 부르는 게 맞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국가정원’이란 이름은 취지는 그렇지 않겠지만 마치 국가의 목적에 쓰이기 위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자유칼럼그룹은 특정한 주의나 입장을 표방하지 않습니다.

필자소개

정달호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후 줄곧 외교관으로 일했으며 주 파나마, 이집트대사를 역임했다. 은퇴 후 제주에 일자리를 얻는 바람에 절로 귀촌을 하게 되었고, 현재 제주평화연구원 객원연구위원으로 있으면서 한라산 자락에 텃밭과 꽃나무들을 가꾸며 자연의 품에서 생활의 즐거움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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