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이런 국민들에게 무슨 일을 한 건가요? [임종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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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이런 국민들에게 무슨 일을 한 건가요?

2016.11.14

100만 명의 시위대가 광화문을 메웠다는 12일 저녁 8시께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에서 내렸습니다. 광화문 일대에서 시위가 벌어지면 청와대와 1km쯤 떨어진 지근거리의 경복궁역은 무정차 통과역이 되곤 했던 터라 신통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날 법원은 시위행진을 청와대 인근까지 허용해달라는 시위 주최 측의 요구를 받아들였습니다. 이것도 신통한 일입니다. 최근의 최순실 게이트 시위에서 시위대들이 보여준 평화시위에 대한 법원의 신뢰가 반영된 결정이었습니다.

과거에는 광화문 네거리에서부터 청와대 쪽으로 향하는 모든 도로를 차벽으로 차단했습니다. 광우병 시위 때는 광화문 네거리에 차벽으로도 모자라 컨테이너 박스를 쌓아 차단함으로써 ‘명박산성’이라는 놀림을 받기도 했습니다.

경복궁역은 지하 2층 플랫폼에서부터 지하 1층까지 인파로 가득했습니다. 내리는 사람보다는 타는 사람이 많아 보였습니다. 타는 사람들의 손에 ‘박근혜 퇴진’ 플래카드가 들려 있는 것으로 미뤄 시위 참가 후 귀가하는 사람들인 듯했습니다.  

나는 효자동쪽으로 나가기로 했습니다. 3개의 출구 가운데 경복궁 쪽 출구는 경찰이 가로막았고, 인왕산 쪽 1번과 자하문 쪽 2번 등 두개의 출구는 열려있었습니다. 경복궁역 쪽 3번 출구 앞에서는 "길을 열라"는 시민들의 항의로 소란스러웠지만 몸싸움은 없었습니다. 밖의 함성이 경복궁역 지하에까지 쩌렁쩌렁 울렸습니다.

나와 보니 과거에 통제구간이었던 광화문 광장은 온전히 시위공간이 되어 있었습니다. 막힌 곳은 내자동 네거리와 삼청동 입구에서 청와대에 이르는 도로뿐이었습니다. 군중들이 청와대를 향해 “박근혜는 퇴진하라”고 외치고 있었습니다. 천둥같은 그 외침은  박 대통령의 귀에도 충분히 들릴 것 같았습니다.

나는 효자로를 따라 걷기로 했습니다. 차벽 밑으로 사람 하나 기어 다닐 수 있는 틈이 있어 사람들이 교대로 드나들었습니다. 나도 그곳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 청와대 쪽으로 인도를 따라 걷기 시작했습니다.

효자로는 4·19혁명 때 유혈이 낭자했던 곳입니다. 경무대(현 청와대)로 행진하는 시위대를 향해 경찰이 무차별 총격을 가했던 곳입니다. 12일 시위를 앞두고 그런 흉흉한 소문들이 나돌았습니다만 그것은 소문으로 그쳤을  뿐이었습니다.

광화문 일대는 1공화국의 시절의 유혈 사태 이후, 작년 11월의 농민 백남기 씨의 사망을 불러온 민중총궐기 시위에 이르기까지 한국 민주주의 발전과 시련을 증언하는 장소입니다. 최루탄과 화염병, 장갑차와 물대포, 명박산성과 차벽, 돌멩이 쇠파이프와 죽창이 이곳을 짓눌렀지요.

그 점에서 12일의 평화적 시위는 폭력으로 얼룩진 우리의 시위문화에 획을 그은 사건입니다. 일부 과격시위대의 폭력유발 행동에 대해 시민들은 “비폭력” “평화시위”를 외쳐 자제시켰습니다. 그들은 시위가 끝난 거리를 깨끗이 청소했습니다. 언론은 거리에 남은 것은 나뭇잎뿐이라고 보도했습니다.

경찰은 ‘평화로운 집회, 성숙한 시민의식, 여러분이 지켜주세요’라는 플래카드를 내걸었습니다. 효자로 인도 한 켠에 살수차가 대기하고 있었지만 물대포를 쏠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효자로를 걷는 도중에 만난 젊은 부부 중에서 여자가 버스 위에 앉아 있는 경찰을 향해 “바보들아, 너희들도 시위해”라고 했습니다. 경찰은 아무 소리 없이 내려다보았습니다. 여고생 둘이서 차벽안 쪽의 경찰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하는 모습도 보였습니다. 통인시장의 가게들은 불을 환히 밝히고 장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청와대 입구까지 갔다가 발길을 되돌려 내자동 네거리 초입의 내자시장에 들렀습니다.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술집 골목으로 변한 곳인데 술집마다 고객들로 왁작지껄했습니다. 한 고객이 “박근혜는 퇴진하라”고 외치자 옆자리의 손님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두 사람은 싸우지는 않았습니다.

지친 다리를 쉬려고  손님이 붐비는 맥주집 대신 편의점에서 캔 맥주 하나를 사 들고 테이블에 앉았습니다. 옆자리의 40대의 남자 친구 둘이 “오늘 밤 박근혜를 끌고 나와야 한다”고 열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앞자리에서 오래 침묵하던 50대가 입을 열었습니다. “박 대통령이 이렇게 잘못 할 줄은 몰랐다”고 했습니다. 이들 모두 지난번 대선에서 박근혜 대통령을 찍었다고 했습니다. 이날 시위에 참가한 사람 중 상당수는 이런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평화를 원하고, 이성을 따르는 이 선량한 국민들을 향해 박근혜, 당신은 무슨 일을 한 것입니까?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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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임종건

한국일보와 자매지 서울경제신문 편집국의 여러 부에서 기자와 부장을 거친 뒤 서울경제신문 논설위원 및 사장을 끝으로 퇴임했으며 현재는 대한언론인회 주필, 일요신문 일요칼럼, 논객닷컴 등의 고정필진으로 활동 중입니다. 한남대 교수,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위원 및 감사를 역임했습니다. 필명인 드라이펜(DRY PEN)처럼 사실에 바탕한 글을 쓰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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