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이웃집으로 만난 두 부부"


윤병무 시인


   16년 전 가을, 우리 가족은 위성도시 변두리에 위치한, 처음 분양받은 24평 아파트에 간신히 입주했다. 


IMF 시절이어서 분양가보다 낮은 가격으로 되팔 수도 없었기에 고금리를 견뎌가며 은행 빚과 개인 빚의 열차를 환승하면서 중도금과 잔금을 어렵게 치렀던 것이다. 그러는 동안 우리 부부는 옆 동네에서 지어지고 있던 아파트 건축물이 올라가는 현장에 종종 찾아가 해당 건설사가 부디 부도나지 않길 기원하면서 공정 상황을 멀찍이 서서 바라보았다.



꼬박 3년을 기다린 가을날, 나는 동네에 살던 후배와 함께 우리 집 405호를 찾아갔다. 아침부터 오후 4시경까지 온종일 입주 청소를 하고 거실에 앉아 쉬고 있을 때였다. 웬 할머니와 삼십대 중반의 남자가 우리 집의 열린 현관문 안으로 조심스레 들어와서는 미안한 표정으로 빗자루 좀 빌릴 수 있냐고 물어왔다. 나는 정중히 빗자루를 건네면서 앞집에 입주하느냐고 물었다. “그류”라고 할머니께서 대답했다. 그곳에서 충청도 토박이 말씨를 들으니 반가웠다.


입주 이사를 하고 보름쯤 지났을까. 나는 퇴근길에 갑자기 생선회가 생각나 회센터에 들러 우럭 회 한 접시와 해삼, 멍게를 포장해서 귀가했다. 상을 차리던 아내가 말했다. 며칠 전에 앞집 여자와 인사한 후 자주 왕래한다며 알고 보니 공교롭게도 우리 부부와 나이가 똑같댔다. 나는 앞집에서 전동 드릴을 빌릴 수 있을까 싶기도 해서 무작정 앞집 초인종을 눌렀다. 내게 빗자루를 빌렸던 남자가 전동 드릴을 가져와서는 대뜸 작동법을 잘 모르는 나를 대신해 금세 콘크리트에 구멍을 뚫어주고는 액자까지 걸어주었다. 곧이어 양쪽 집 부부는 생선회를 사이에 두고 마주앉아 인사를 나누고 술잔을 부딪쳤다.


며칠 후, 막 퇴근하려는데 아내로부터 온 전화를 받았다. 앞집 남자가 퇴근길에 차를 몰고 소래포구로 달려가고 있단다며 8시에 앞집으로 오란댔다. 일전의 답례로 신선한 생선회를 준비한다는 말이었다. 나는 퇴근길에 산 화이트 와인을 들고 아내와 함께 우리 집과 구조가 똑같은 406호를 방문했다. 동갑내기이니 다음번에 만날 때는 말을 트자는 약속은 쉽게 지켜졌고, 건배를 위해 자주 부딪는 술잔처럼 주고받는 유머도 쾌청했다.

 

그러다가 그즈음 눈길을 끌었던 영화 「화양연화」 화제에 불이 붙자, 나는 장만옥 배우의 (연기를 포함한) 표정 매력을 칭찬했는데, 곧바로 앞집 아줌마가 내 말을 받았다. 요지는 이렇다. ‘장만옥의 표정 매력은 그 작은 얼굴에서 상하로 이분된다. 눈매는 깊고 날카롭고 비애가 비치는 반면, 코와 입은 너무 순해 보이고 밝은 모습이다’라는 것이다. 그 이율배반적인 표정이 그 배우의 매력이라는 말이었다. 그 말을 들으며 나는 누구나 빛과 어둠, 선과 악으로 꼬아놓은 외줄을 타고 그 양쪽의 무게로 널을 뛰며 살고 있음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배우의 표정에서 우리는 자화상을 보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날 이후 양쪽 집 부부는 405호와 406호를 번갈아 드나들며, 때로는 동네 대구뽈찜 식당에서 허물없는 친구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IMF 막바지에 앞집 친구는 실직을 하고, 입주한 지 1년 만에 수도권 정반대편의 위성도시로 이사를 했다. 406호 가족이 떠나는 날, 405호의 안주인은 아쉬움으로 마주잡은 손끝에서 군고구마를 건넸다. 406호 안사람은 처음으로 분양받아 정든 집을 떠나는 차 안에서 눈물 젖은 고구마를 먹으며 그야말로 목이 메었다고 훗날 여러 번 회상했다.


앞집 부부가 떠난 지 15년이 되었다. 그땐 젊었고 지금은 아직 늙지 않았다. 여전히 우리 두 부부는 건너가든 건너오든 중간에서든 여행지에서든 한두 계절에 한 번은 만나 노란 은행잎 같은 웃음으로 악수하며 그사이 가정이라는 나무에서 떨어진 낙엽 몇 잎을 매번 펼쳐 보인다. 그러고는 테이블에 둘러앉아 각자의 낙엽마다 잎맥처럼 쓰인 그동안의 사연을 서로 읽는다. 단 한 번도 불편한 적 없는, 장만옥 같은 표정의 생활 이야기를...... 나는 바란다, 다 내려놓고 빈 가지가 될 때까지 내내 우리 두 부부가 한결같은 표정으로 늙어가길......


※ 필자 소개

윤병무. 시인. 시집 <5분의 추억>과 <고단>이 있으며, 동아사이언스 ‘스페셜’ 코너에 [생활의 시선]을 연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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