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권력자, 김제동 [박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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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권력자, 김제동

2016.10.27


20년 전의 일입니다. 아이돌 그룹의 선두주자였던 HOT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 때였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아저씨가 그랬듯이 필자 역시 HOT가 누구인지 잘 몰랐습니다. 방송사에서 근무를 했어도 예능 프로그램보다는 뉴스와 교양 프로그램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이돌 스타에게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루는 엘리베이터 안에 누군가 ‘누가 HOT 욕을 해?’라는 낙서를 써 놨습니다. 필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누가 핫 욕을 해? 이게 무슨 얘기지? 그나저나 누가 이런 낙서를 했을까?”라고 옆에 있던 동료에게 얘기를 했습니다. 그러자 같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있던 초등학교 5,6학년 정도 되는 여자 아이들의 표정이 일그러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더니 자기들끼리 “별 꼴이야.”,“아이 재수없어.” 등등의 얘기를 하면서 엘리베이터가 열리기 무섭게, 필자에게 눈을 한 번씩 흘기며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쟤들이 왜 저럴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는데, 이 얘기를 아내에게 해주자, “당신이 큰 실수를 한 거네요. 요즘 제일 핫한 HOT(에이치오티)를 핫이라고 불렀으니…” 아내의 핀잔에 “아무리 저들이 좋아하는 가수의 이름을 잘못 불렀어도 그렇지 그렇다고 어른을 쏘아보고 재수없다고 얘기하는 것은 뭐람? 아니 그리고 HOT이 ‘에이치오티인’지 ‘핫’인지 내가 알았냐구?”라고 얘기를 했지만 이런 경험이 득이 될 때도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숙직을 하고 새벽 5시 라디오 뉴스를 준비하는데 god가 부산에서 공연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교통사고가 났다는 기사가 올라왔습니다. 필자는 god를 ‘갓’으로 읽어야 할지 ‘지오디’로 읽어야 할지 고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마 HOT로 인한 굴욕적 경험이 없었다면 너무나 자연스럽게 ‘갓’으로 읽었을 겁니다. 게다가 대문자도 아닌 소문자 god로 쓰여 있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돌다리도 두드려 보자’라는 심정으로 뉴스 편집기자에게 “지오디예요? 갓이에요?”라고 물어봤는데 모두 헛갈려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침 새로 입사한 염용석 아나운서가 새벽 방송을 준비하러 나와 있는 것을 알고 있던 터라 바로 전화를 해서, “용석아, 갓이니 지오디니?”하고 다급하게 물어봤습니다. “아이고 선배, 지오디예요!” 이렇게 해서 뉴스 2분 전에 ‘갓’으로 나갈 뻔한 뉴스가 결국 ‘지오디’로 제대로 방송이 나가게 됐습니다.

사실 그때만 해도 ‘지오디’를 ‘갓’이라고 읽었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되지는 않던 시기였습니다. 물론 국제보건기구(WHO; 더블유에이치오)를 ‘후’로 읽었다면 큰 문제가 됐겠지만 생긴 지 몇 년 되지 않은 아이돌 그룹의 이름까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그 새벽에 그렇게 호들갑을 떨었던 이유는 그들을 좋아하는 팬들에 대한 예의를 지키고 싶어서였습니다. 물론 마음 한편에는 HOT 때문에 겪었던 아픈 기억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은 이유도 있었습니다.

아직도 대중은 방송사가 연예인 위에 군림하는 ‘갑’의 위치에 있는 줄 아는 분들이 많습니다. 과거 80년대에 언론이 통폐합되고 KBS와 MBC만 있던 시대에는 연예인들이 방송사 PD에게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썼습니다. 연예인들이 출연할 수 있는 TV매체가 달랑 채널 7, 9, 11번 세 개밖에 없었던 시기에는 자신들이 대중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오로지 몇몇 PD의 손에 달렸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180도 달라졌습니다. 매체는 넘쳐나고 이름이 알려진 연예인은 자신이 출연하고 싶은 프로그램을 골라서 할 수 있을 정도가 됐습니다. 그러다 보니 연예 정보프로그램에서 진행자가 출연한 10대 가수를 보며 “XX님께서 오늘 출연을 하셨습니다.”같은 극존칭을 쓰는 것이 통용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더 나아가서 유재석 씨를 ‘유느님’으로 부른 지도 벌써 몇 년이 흘렀지만 개신교의 수많은 종파와 가톨릭 교회에서 신성모독이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물론 그만큼 유재석 씨가 처신을 잘하는 이유도 있겠고 본인이 스스로 그렇게 칭하지 않았다는 이유도 있었겠지만, 언어는 생각의 틀을 규정하고 프레임을 변화시키는 역할을 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유재석 씨는 우리 사회에서 ‘문화권력자’로서 과거 사제가 가졌던 권력과 동일한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간주할 수 있습니다. 물론 방송사에서도 '갑 중의 갑'에 위치에 있다는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최근에 SBS에서 있었던 일은 달라진 갑을 관계를 확실하게 각인시켜 주었습니다. 한 연예인이 인기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기로 했다가 촬영을 위한 출국 바로 전날 마음을 바꾼 것입니다. 출국 하루 전날 불참을 선언했으니 다른 사람을 섭외할 시간도 없었을 테고 그러니 담당 PD는 얼마나 상처를 입었겠습니까? 예전 같으면 이렇게 약속을 어긴 연예인은 방송사의 출연금지 명단에 올라서 한동안 고생을 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 연예인은 보란 듯이 다른 케이블 TV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방송사의 프로그램 개편 시즌이 되면 이름있는 MC들을 모시기 위해 치열한 경쟁이 펼쳐집니다. 예능 PD는 물론이고 책임프로듀서인 CP까지도 삼고초려를 마다하지 않고 이른바 톱 MC를 모시기 위해 발벗고 뜁니다. 김제동 씨 역시 그러한 MC 군(群)에 속해 있습니다. 특히 그는 대중과 함께 호흡하면서 토크 콘서트를 이끄는 능력이 매우 뛰어난 MC입니다. 필자가 진행했던 <리얼 코리아>라는 프로그램에서 무명의 김제동 씨를 소개한 이후부터 필자는 그가 성장해 온 모습을 매우 흐뭇하게 지켜봐 왔는데 최근의 그의 행동을 보며 마음이 무거워졌습니다.

그가 보충역, 일명 방위 복무를 하던 시절 군대 행사 사회를 보면서 있었던 일을 한 TV 프로그램에서 얘기한 적이 있었습니다. “(행사 진행을 하면서), 아주머니 여기 서시고. 그런데 제가 아주머니 여기 서시고 했던 분이 군 사령관, 별 네 개짜리 사모님이었습니다. 저 미친놈이… 당장 진상 파악해! 이렇게 되어서 제가 영창을 13일 갔다 왔습니다.”

그런데 이 발언을 국회 국방위 국감에서, 국방부 차관 출신 백승주 의원이 문제를 삼았습니다. 한민구 국방부 장관이 김제동 씨가 영창에 다녀온 기록이 없다고 하자 국감 증인으로 그를 부르자고 제안한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김제동 씨는 이후 다른 프로그램에서 이렇게 맞받아 쳤습니다. “웃자고 얘기하는데 죽자고 달려들기 시작하면 답이 없습니다. (중간 생략) 진짜 저 불러서 이야기 시작하면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이 모습을 본 SBS의 원일희 선임기자는 자신이 진행하는 <정가(政街) 위클리>에서 "표정과 말투로 보면 김제동 씨 역시 죽자고 달려드는 것 같다."고 논평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국회 국방위의 김영우 위원장이 국감장을 개그 무대로 만들 일이 있냐며 반대하면서 그의 국감 증인 채택은 무산됐습니다. 하지만 김제동 씨의 영창 13일 발언은 이후 국감에서 한 번 더 논의되었고 그 결과 국방위 국정조사는 김제동 씨의 발언에 매달려 그보다 더 중요한 북한 핵, 사드의 한반도 배치, 방산비리 의혹 같은 문제는 어떻게 조사됐는지 언론에 비치지도 않은 채 끝나버렸습니다. 2016년 국회 국방위 국감은 김제동 씨가 국감 증인이 됐든 안 됐든 이미 그가 주연 배우 역할을 했으며, '기승전김제동'으로 끝났던 겁니다. 이러니 국방부 입장에선 때맞춰 이슈를 만들어준 김제동 씨가 속으로는 고마웠을 겁니다.

언론은 팔리는 기사를 확대 재생산하는 법입니다. 유명인이 등장하는 기사는 그 자체로 관심을 끕니다. 대한민국 국민 중에 백승주 의원이나, 김영우 국방 위원장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아도 김제동이라는 이름은 거의 다 알고 있을 겁니다. 김영우 위원장의 의도와는 달리 결국 김제동 씨가 국방위 국감의 이슈를 다 집어삼킨 블랙홀 역할을 했던 겁니다.

연예인은 정치적 중립을 지킬 의무가 없습니다. 물론 의식 있는 많은 분들은 스스로 중심을 잘 잡으면서 멋지게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만, 간혹 자신의 정치적 색깔을 드러내는 분들을 보게 됩니다. 표현의 자유, 양심의 자유는 헌법에 보장된 권리입니다만 수많은 팬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는 연예인이 자신의 문화권력을 대중에게 기쁨과 행복을 주기 위한 곳이 아닌 특정 정치적 목적에 사용한다면 그 여파는 매우 큽니다.

최근에 로버트 드니로가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인 트럼프를 향해, “한 대 쳐주고 싶다.”는 발언을 해서 화제가 되었습니다. 똑같은 말을 미국에 사는 필자의 친구가 로버트 드니로보다 먼저 했습니다만, 그 친구가 한 말은 필자만 기억합니다. 반면에 유명인의 발언은 확대 재생산됩니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매우 후련해지는 발언입니다. 하지만 전 세계 사람들이 로버트 드니로가 트럼프를 싫어하는 것을 알게 됐고, 그의 말을 통해 트럼프를 싫어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추론하게 되었습니다. 로버트 드니로는 자신의 명성을 이용해 일종의 ‘아젠다 세팅’을 한 결과를 초래했던 것입니다.

김제동 씨 역시 자신의 발언이 이렇게 확대 재생산되고 국감장에서 이슈가 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겁니다. 하지만 국민의 세금으로 억대의 연봉을 받는 국회의원과 국방부 장관이 일개 보충역 복무자의 군 기록을 들추는 해프닝까지 벌어지게 된 책임의 일부분은 그에게도 있습니다. 김제동 씨 본인은 못 느끼고 있을지 모르지만 자신이 이미 문화권력의 중심에 있다는 사실을 인지할 때가 되었습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김제동 씨가 보다 현명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이 칼럼을 필자와 자유칼럼그룹의 동의 없이 상업적 매체에 전재하거나, 영리적 목적으로 이용할 수 없습니다.

필자소개

박상도

SBS 아나운서. 보성고ㆍ 연세대 사회학과 졸. 미 샌프란시스코주립대 언론정보학과 대학원 졸. 
현재 SBS TV 토요일 아침 '모닝와이드'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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