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울어진 운동장의 외교관 [김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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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울어진 운동장의 외교관

2016.10.25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의 특전복을 입고 찍은 사진은 많은 사람들이 좋아합니다. 그는 학생운동 후 강제징집되어 특전사의 특전병으로 국방의 의무를 이행했습니다. 이것이 병역 면탈 논란을 일으키며 소송전도 마다않는 다른 대선주자와 그를 차별화하는 강력한 힘입니다. 그러나 그런 복색이 친북적 논란까지 덮어주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문 씨는 자신을 공산주의자라고 주장한 고영주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에 대한 소송의 1심에서 명예훼손 인정과 3,000만원의 위자료 승소판결을 얼마전에 받았습니다.

최근 노무현 정권 하에서 통일외교안보 정책실장과 외교통상부장관을 지낸 송민순 씨는 회고록 ‘빙하는 움직인다- 비핵화와 통일외교의 현장’에서 2007년 11월 참여정부가 유엔 북한인권결의안 찬반을 놓고 북한에 물어본 뒤 그들의 희망대로 기권했다고 밝혀 격랑이 일고 있습니다. 여당이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이던 문 씨를 대북 굴종자로 비판하자 그는 해명 대신에 “군대도 제대로 안 갔다온 사람들이 걸핏하면 종북타령을 하고 있다”며 논지 이탈의 격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송 전 장관은 유엔인권위원회가 2003년부터 북한인권결의안을 채택한 이래 2006년 청와대 안보실장으로서 처음으로 노무현 대통령의 명분을 살리자는 지침 하에 표결에 찬성을 주도했다고 썼습니다. 결의안은 북한에서 조직적이고 광범위한 인권침해가 자행되고 있음을 비판하고 개선을 촉구하는 내용입니다.

그의 회고록은 발췌로 읽어보았지만 6하원칙에 의해 치밀하게 기술했으며 우리나라 외교수장으로서 국가 현안에 대한 고민과 선택 과정을 잘 보여주었습니다. 흔히 진솔하지 못하고 자화자찬에 미화하기 일쑤인 정치인들의 글과 달리 그는 전직 외교관으로서 말의 무게를 잘 인식하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가 던진 팩트에 기초한 의문은 오랜 기간 남아 남북관계를 개선하는 데 큰 보탬이 될 것입니다.

송 전 장관의 북한인권결의안 지적이 아니더라도 그간 사상 최악의 북한 인권에 대해 눈감아 온 국회에도 비판의 여론은 높았습니다. 북한인권법은 11년간 잠자다가 작년 19대국회 말에 겨우 통과되었습니다. 송 씨는 인권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존중하는 것은 어느 나라도 예외일 수 없으며 우리가 유엔의 북한인권결의안 채택에 앞장설 것까지는 없지만 회원국들의 집단적 권고인 만큼 남북관계와 분리하여 이 결의안에 찬성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고 썼습니다. 그는 북한의 인권 상태를 중시한다는 입장을 취해야 국제사회도 우리의 대북정책에 신뢰를 보이고 지원할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이재정 통일부장관, 김만복 국정원장, 백종천 안보실장의 입장은 달랐다는 것이죠. 백 실장은 육사 22기입니다. 북한 체제에 대한 내정간섭이 될 수 있고, 또 인권결의안으로 실제 북한 인권이 개선된다는 효과를 기대할 수도 없으며, 특히 어렵게 물꼬를 튼 남북관계 발전에 지장을 초래한다는 이유로 기권을 주장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권 이후의 남북관계에 발전이 있었나요? 

문제의 2007년에는 노무현 대통령의 퇴임을 몇 달 앞둔 10월에 남북정상회담이 열렸습니다. 그 때 송민순 외교부장관은 인권결의안에 찬성을 주장했지만 김만복 국정원장이 북한에 물어보자고 했고 송 장관은 답이 뻔할 텐데 뭘 물어보느냐고 맞섰다고 합니다. 결국 북한의 쪽지를 받고 노대통령의 결심으로 기권했다는 것인데요. 북한에게 물어보는 게 뭐가 나쁘냐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당은 북한인권 문제에 북한의 결재를 받은 것이냐고 비난의 수위를 높이고 있어 인권변호사이자 유력 대선주자인 문씨의 입지를 흔들려 하고 있습니다. 

분단 대치상태인 나라에서 대북 정책의 전반적인 진상을 조사하는 것은 미래에 비슷한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필요하다고 봅니다. 2000년 4억5천만 달러의 대북비밀송금을 포함해서 말이죠. 국민의당 안철수 전 대표는 "인권과 사회적 약자 보호는 이념과 체제를 뛰어넘는 숭고한 가치"라며 “당시(2007년) 유엔 북한인권결의안에 한국 정부는 찬성했어야 한다"고 말했고 김영환 사무총장은 진상 규명은 종북몰이나 색깔론이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하기야 당시 대통령까지 북한 핵은 일리가 있다고까지 명언할 정도였으니 인권결의안을 물어보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다고 보았겠지요. 지금 우리가 그 핵의 포로가 되고 있습니다. 

남북정상회담이 열린 직후라서 기권이 필요했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럼 바로 전 해의 북한 최초의 핵실험은 남북대화 분위기를 위해서였던가요?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10·4평양회담에서 북핵문제를 거론하라는 여론의 요구를 받았지만 북핵과 인권에 침묵했다고 여당은 비판합니다. 아예 송 전 장관이나 6자회담 수석대표를 대동하지도 않았습니다. 

대선이 14개월 정도 남았습니다. 회고록이 적시한 북한인권결의안에 북한의 의견을 묻어본 관련 당사자들에게 진상의 설명을 요구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대권주자의 안보관도 함께 검증되는 것이죠. “북한에 물어볼 것 없이 결의안에 찬성투표하고 송 장관한테서는 바로 사표를 받을까 하는 생각도 얼핏 들었는데” 라고 한탄했다는 노 전 대통령의 생각을 회고록에서 보면서 만약 우파 인사가 이런 책을 썼다면 훨씬 더 거센 후폭풍과 진위 논란에 휩싸였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권력의 심부에 있던 핵심 장관의 회고록에 등장하는 내용을 기억이 안 난다고 회피할 수 없게 되었죠. 이병호 국정원장은 “기억이 아니라 기록이며, 근거를 치밀하게 갖고 기술한 것이라고 본다. 구체적이고 사리에 맞기 때문에 사실이나 진실이라는 느낌을 받았다”라고 국회정보위에서 밝히면서 쪽지의 존재 여부는 지금 말할 시점이 아니라고 여운을 남겼습니다. 

송 전 장관은 의미 있는 역사의 이면을 파헤쳐 국민 앞에 드러내 보여줬습니다. 패거리의 비밀을 무덤까지 가지고 가려는 사람들과 다른 용기를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엘리트 외교관으로서 우국충정이 저술의 동기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그가 우국충정을 펼치려던 운동장은 더 위에 있는 왼쪽 골대에 공을 차 넣어야 하는 기울어진 언덕이었습니다. 그는 힘에 부치는 경기를 그것도 혼자서 벌인 듯합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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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김영환

한국일보, 서울경제 근무. 동유럽 민주화 혁명기에 파리특파원. 과학부, 뉴미디어부, 인터넷부 부장등 역임. 우리사회의 개량이 글쓰기의 큰 목표. 편역서 '순교자의 꽃들.현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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