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짝이 양말 패션 [안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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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짝이 양말 패션

2016.10.24


노랗게 염색한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반바지를 입고 계단을 급히 올라가는 여학생이 있었습니다. 뒷모습을 보니 발목을 덮는 컬러풀한 양말이 짝짝이어서 제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그런데 지하철 안으로 들어서니 그 여학생이 쑥스러운 눈빛으로 꾸벅 인사를 합니다. 알고 보니 제 수업을 듣는 학생이었던 것입니다.

매번 컬러나 패턴이 다른 목양말을 짝짝이로 신고 학교에 오는데, 이젠 만날 때마다 자연스레 그 학생의 발을 보게 되고, 짝짝이 양말임이 확인될 때 미소를 짓게 됩니다. 부끄러움을 타는 듯 조용한 성격이지만 그와 대조적인 짝짝이 양말은 미처 드러내지 못한 내면의 감정들을 소극적이나마 통통 발산하는 듯 경쾌해 보여 좋습니다.

1955년도 영화 <이유없는 반항>을 보면 당시에는 짝짝이 양말이란 부모의 관심, 애정이 부재한 현실을 드러내는 코드였습니다. 이혼에 따른 전형적인 희생양으로서, 엄마 없이 가정부에 의해 길러지며 항상 아버지를 기다리는 아이, 영화의 말미에 빨간 양말과 파란 양말 한 짝씩을 신은 상태로 죽음을 맞이하는데, 그런 친구의 짝짝이 양말을 보며 제임스 딘이 울다 웃다 처연하게 바라보던 장면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짝짝이 양말은 부모의 무관심을 상징하기도 했었고, 그게 아니라면 일단 튀어보겠다는 대단한 용기나 무지 혹은 착각일 거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습니다. 그래서 같은 색상의 똑같은 양말을 신는 건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고, 어쩌다 짝짝이를 신고 나온 날이면 이런 낭패가 있나 싶어 신발 벗어야 할 장소를 피해 다니기도 했습니다.

요즘은 이런 양말에 패션성을 염두해 두고 맵시 있어 보이도록 여러 가지를 고려합니다. 예를 들어 복고감성이 유행하면서 흰 양말들을 많이 신고 있는데, 짧은 하의에 목양말을 신을 때, 다리가 굵고 짧은 경우라면 길이가 긴 흰색 목양말을 피하여 신체의 단점이 부각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여성이 구두 위에 목양말을 드러나게 신을 때는 가급적 구두나 다리의 살색과 유사하게 하거나, 전체적인 의복 컬러와 조화를 이루도록 길이와 색상을 조절합니다. 발목을 가리지 않고 구두 속에 숨을 수 있는, 페이크 삭스라 불리는 덧버선을 신은 후, 피부색과 같은 누드 톤의 구두를 신어 다리가 길어 보이게도 합니다. 검은 스타킹에 검은 구두를 신어 다리를 시각적으로 연장시키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그렇다 해도 옷을 입을 때 대개 바지 단 속에 숨어서 노출빈도가 적은 양말까지 크게 신경 쓰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저도 그저 평범한 검은색과 회색 양말을 가장 많이 갖고 있는데, 신다보면 양말 한쪽이 먼저 닳거나 고무줄이 느슨해지거나 하나만 행방불명되어 제 짝을 잃어버리는 일이 많아서, 아예 짝짝이가 될 수 없도록 같은 색으로 구입을 합니다.

그럼에도 수 년 전부터 쌓인 짝짝이 양말들을 버리지는 못하고 잊고 있었는데 그 학생 덕분에 양말을 다시 꺼내보게 됩니다. 생각해보면 짝짝이 양말이 패션의 아이콘이 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주로 아이돌 스타들의 옷차림에서 회자되는데, 어느 여배우는 디자인은 같지만 색상이 다른 옅은 파스텔 톤의 양말에 구두까지 짝짝이어서 눈길을 끌기도 했었습니다. 

동화작가 수지 모건스턴이 쓴 <엉뚱이 소피의 못말리는 패션>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나는 시를 쓰는 것처럼 옷을 입는 거예요. 내 몸은 종이고요, 두 손은 만년필, 두 눈은 영감의 창이에요. 모자는 느낌표이고요, 스카프는 쉼표, 레이스는 말줄임표예요.” 시를 쓰듯 옷을 입는, 평범하게 옷 입기를 거부하는 초등학생 소피의 이야기입니다. 

분명 발은 두 개인데 왜 사람들은 같은 모양의 구두를 신는지. 같은 색깔의 양말을 신는지 소피는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 짝이 없어진 양말을 모으기 시작하여 짝짝이로 신습니다. 소피는 반복과 단순함이 싫은 아이였던 것입니다. 이상한 옷 입기로 학교에서는 경고를 받지만 심리치료사는 소피가 창의력이 뛰어난 아이라고 하지요. 다른 것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결국 사회성에 문제가 되지 않는 다면 창의력과 상상력은 존중되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짝짝이 양말의 즐거움을 알려준 제자를 떠올리며, 저는 짝짝이 양말 서랍 속에서 먼저 색상은 다르지만 같은 무늬의 양말끼리 한 짝을 이루도록 묶었습니다. 그 다음 길이가 같은 것들끼리 어울리게 짝을 만들었습니다. 가끔 유쾌하게 튀고 싶을 때나, 내 안의 은밀한 즐거움이 필요한 날 청바지 아래 코디를 해볼 생각입니다. 

짝짝이 양말이 있다면 생각 없이 버리진 마세요. 환경을 생각하는 마음에서라도, 개성보다 유행을 쫓는 시대에 가끔은 대세와 모범과 규격을 깨뜨리고 싶을 때 기분전환을 위해서라도 말입니다. 반드시 예의를 지켜야 할 드레스 코드가 있는 곳이 아니라면 짝짝이 양말 패션의 소소한 즐거움을 느꼈음 합니다.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자유칼럼그룹은 특정한 주의나 입장을 표방하지 않습니다.

필자소개

안진의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 교수. 삶의 중심은 그림이지만 그림과 함께 일상을 풀어내는 방법은 글이다. 꽃을 생명의 미학 그 자체로 보며 최근에는 ‘꽃과 문명’이라는 화두를 붙잡고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저서 <당신의 오늘은 무슨색 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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