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라노의 ‘라크리모사' Milano Lacrimosa : videos


Milano Lacrimosa


  밀라노의 라 스칼라 극장 주변을 지날 때마다 베르디 <레퀴엠>의 가장 아름다운 선율, ‘라크리모사’(Lacrimosa, 눈물의 날)가 귓가를 웅웅거리며 맴도는 것만 같다. 착각이지만, 그건 제법 맥락 있는 착각이기도 하다. 



베르디는 주로 이국(異國)의 작가들을 동경하고 숭배했다. 그는 쉴러와 셰익스피어, 빅토르 위고를 더없이 흠모했으며, 이들의 소설과 희곡을 각색해 극적인 오페라로 만들었다. 그럼 자국에는 없었을까? 이탈리아는 근대적인 자각이 늦었던 국가였다. 19세기까지도 동네별로 흩어진 크고 작은 도시국가들이 도토리 키재기식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처럼 지리멸렬한 정치상황은 시민적 세계관의 성립을 봉쇄했고, 정체된 정신문화는 문학의 발전에도 커다란 장애가 되었다. 한마디로 근대 국가의 수립이 늦다보니, 근대 문학의 출발도 늦게 된다. 우리가 19세기 프랑스나 독일의 고전 교양소설은 여러 권 쌓아놓고 읽으면서도 딱히 그 시대 이탈리아 작가의 소설이나 문학작품이 떠오르지 않는 것은 이런 연유다. 


그러나 없다고 전혀 없는 건 또 아니다. 아니, 사실은 위대한 대문호가 그 당시 이탈리아에 있었다. 그는 고고한 롬바르디아의 귀공자였으나, 힘있는 필치와 뜨거운 휴머니즘으로 그 땅에 살고 있던 민초들의 고난과 투쟁의 장대한 서사를 근대적인 어조로 써내려갔다. 그의 이름은 알레산드로 만초니(Alessandro Manzoni). 그가 남긴 대표작이 바로 <약혼자들(I promessi sposi)>이다. 국내에도 문학과지성사의 번역본으로 나와 있다. 물론 맥락 없이 무작정 읽으면 전혀 페이지가 넘어가지 않는 소설이다. 그건 마치 밀라노의 30대 ‘패션 가이’가 박경리 선생의 <토지> 이태리어 번역본을 넘기는 것과 비슷하다. 날렵한 스리피스 아르마니 수트를 입고, 평생을 리조토 밀라네제나 코톨레타만 먹던 남자가 갑자기 최참판댁이 어쩌니 저쩌니, 객주의 주막과 장터 국밥이 어쩌니 하는 걸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건 머리보다 우선은 정서의 문제다. 


(알레산드로 만초니, 1785 ~ 1873)


1873년 만초니가 서거했다. 그를 너무도 흠모하던 베르디는 커다란 정신적 충격에 휩싸인다. 만초니의 자택은 하필이면 스칼라 극장 바로 옆에 있다. 마리아 칼라스의 라이벌이었던 레나타 테발디가 오디션을 받으러 가기에 앞서,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려 이 집 앞 거리를 몇 바퀴나 빙빙 돌았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러니 베르디도 오페라를 공연하러 만초니 선생의 사택 앞을 몇 번이나, 아니 몇 백 번이나 지나쳤을 것이다. 그렇게 경애하는 작가였으나, 생전에는 단 한 번도, 인사조차도 드리지 못한 베르디였다. 그 천추의 한이랄까, 애끓는 추모의 심정을 베르디는 음악으로 풀어낸다. 그가 써내려간 진혼미사곡 <레퀴엠>은 알레산드로 만초니의 죽음 앞에 헌사된 참으로 장엄한 경외의 고백록이다.


(현대의 만초니 거리(Via Manzoni)는 이탈리아적 ‘엘레간차’의 상징과도 같다.)


보석 같은 이 명곡 가운데서도 가장 아름다운 건 역시나 ‘라크리모사’다. 네 명의 독창자들이 저마다 가슴 속의 깊은 울림을 담아 실존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지닌 슬픔과 고통을 노래한다. 짙은 인간적 연민, 신에게 애타게 구원을 갈구하는 이탈리아 특유의 종교관이 강하게 투영된 음악이기도 하다. 독일인들은 말한다. 이건 종교음악이 아니라 혹시 오페라가 아니냐고. 그들은 잊고 있다. 종교음악은 원래 이탈리아에서 나왔음을. 그리고 원래 이탈리아인들의 종교음악은 독일처럼 고졸하고 소박한 적이 단 한번도 없었음을. 존재의 영육(靈肉) 모두를 뒤흔드는 장엄한 격노(激怒)와도 같은 진혼. 이 음악이야말로 이탈리아 종교음악의 원형이자 본령이다.



(베르디 <레퀴엠> 중 ‘저는 탄식하나이다 Ingemisco’,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 1967년 밀라노)



 

(베르디 <레퀴엠> 중 ‘라크리모사 Lacrimosa’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지휘, 1967년 밀라노)


카라얀은 1967년 밀라노 스칼라 극장에서 기념비적인 <레퀴엠> 영상을 남겼다. 소프라노 레온타인 프라이스, 메조 소프라노 피오렌차 코소토, 베이스 니콜라이 갸로프 등 당대의 가장 위대한 성악가들이 모두 등장한다. 거기에 테너 파트는 당시 겨우 32세의 무명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노래했다. 이때 스칼라에는 파바로티보다 훨씬 유명한 스타 테너가 수 명은 더 있었다. 그러나 카라얀의 최종 선택은 “루치아노”였다. 그 시절의 영상기록은 지금도 <레퀴엠> 연주사의 ‘전설’로 남아 있다.

황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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